2013.07.12





  작가는 책을 통해 세계를 말하며 독자와 만난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계를 읽으며 작가와 만난다. 순수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작가의 고된 창작을 음미하며 세 가지를 얻는다. 책, 세계, 그리고 작가.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단계는 책을 액면 그대로 읽는 첫 번째 행위, 책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두 번째 행위, (상상 속의 장소에서) 작가와 만나 대화하는 세 번째 행위로 나뉜다. 물론 단계별로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나, 세 번째 행위로 갈수록 독서는 은밀해진다. 이 은밀함을 통해서만 '좋아하는 작가'라는 소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나는 머지않아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전조를 느끼고 있다. 보물의 이름은 이탈로 칼비노이다.


  내가 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나는 책 읽기 계획을 세워놨다가 즉흥적으로 다시 목록을 만든는 일이 잦은 변덕쟁이이기도 하다. 별 고민 없이 생각해보면 책과 나의 만남은 정말이지 순전히 우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독자의 직감이라는 것도 있고, 일단 펼쳤을 때 초반이 재미있으면 지루해지는 부분까지는 일단 단숨에 읽어버리는 감각주의적(?) 습성 역시 한 몫 하는 것도 같다. 여하튼 칼비노는 어느 순간 나에게 들어와 있었다. '○○의 뇌 구조'라고 해서 누리꾼들이 패러디하기 좋아하는 뇌 단면으로 근래 나를 표현해보자면 분명 '칼비노'라는 부분이 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다섯 작품을 읽었다. 그간 이 공간에 리뷰들을 쭉 올려왔는데, 〈민음사〉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리의 선조들(I Nostri Antenati)' 3부작과 『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리고 〈열린책들〉에서 이현경氏가 번역한 『우주 만화』이다. 주요 인터넷문고들, 국회도서관, 내가 다니는 대학교도서관을 검색해봤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소설은 여섯 개인 것으로 보인다. 남은 하나는 지금 읽고 있는 그의 첫 작품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Il sentiero dei nidi di ragno, 1947)』 이다. (그 외에 민음사에서 나온『왜 고전을 읽는가(이소연氏 번역)』도 그를 아는 국내 독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다. 직설적으로 밝히긴 그렇지만, 나는 내가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타인의 평론을 먼저 읽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내가 읽으며 부딪혀보자는 '주의'인 셈이다. 영어 번역본들은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어로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은 완역됐는데, 그걸 사보기에는 영어 실력도 모자라고, 직수입 도서가 워낙 비싸서 솔직히 읽을 엄두를 내기가 쉽진 않다.) 그의 젊은 시절(24세) 작품인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까지 읽으면 시기별 대표작들을 큰 범위로 훑어보면서 그의 작품론과 작가론에 대한 여러 대학논문들을 아마 어렵지 않게 공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일단 앞으로 번역될 그의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여러 작품들을 반복해서 읽어 문학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칼비노와 만날 앞으로의 여정에 앞서 지금까지 그와 만났던 기억들을 졸문으로나마 회상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     *     *




1. 『반쪼가리 자작(Il Visconte Dimezzato, 1952)』


  내가 처음 읽은 건 『반쪼가리 자작』이다.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을 여는 작품이자, 개인적으로는 칼비노에게 단숨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도 이 작품과 만난 첫 순간을 기억한다. 간결하고 명확한 전개. 하지만 급작스럽고,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내용. 쉽게 말해 그 이후가 궁금해지는 전개 때문에 나는 책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이 작품은 선악(善惡)의 분명한 경계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구심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칼비노는 주인공 메다르도를 전쟁터에 내보내 대포 앞에서 두 동강을 내버린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 그의 한 쪽은 의사가 살려 악한 메다르도가 됐고, 다른 한 쪽은 수행자가 살려 착한 메다르도가 됐다. 둘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소설에서도 명확하게 제시된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그러나 그런 행동을 보는 마을 사람들은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위그노 교도들은 자신들의 안녕만을 기원하는 안이함으로, 마을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목 매달아놓은 시체들을 바라보며 악행의 결과가 그 장소에서 없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고 그 시체들을 만든 기계의 장인 피에트로키오도는 자신의 안에 그런 기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사악함이 존재하진 않나 하는 불안감으로 선악 사이의 애매함을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은 선하고 악한 행동 사이의 애매한 태도가 악함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어떻게 키우게 되는지, 도덕적으로 숙고해보게 하는 뼈아픈 역작이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주인공 메다르도를 둘러 싼 '일반적인' 인물들이 대변해준다. 우리는 맹목적인 선은 지나칠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때론 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둘은 사실 우리의 안에서 상당 부분 희석된 채 존재한다. 명확하지 않다. 마이클 샌델에 대한 지난 여론의 주목을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에게 제시된 과제는 '토론'이었으나, 우리는 희석된 선악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역량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안타까운 사실만을 재확인했었다. 그 후, 그의 이름은 예상 외로 우리나라에서 빠르게 식어버렸다.


  나는 아직 이 '희석된 선악'의 관계에 대해 칼비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놀라운 의술로 두 메다르도를 다시 하나로 붙여버린 선의(船醫) 트렐로니의 행동과 말에 대한 의미를 더 생각해봐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필요는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면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집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을 들려주는 어린 '나'를 의무(善)와 도깨비불(惡)의 세상에 남겨두고 트렐로니가 다시 한 번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항해의 모험을 떠나버린 것, 그 '떠남'의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존재하지 않는 기사(Il Cavaliere Inesistente, 1959)』


  '우리의 조상들'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작품은 칼비노가 '존재'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통 우리는 존재를 단선적으로만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하거나, 혹은 '타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보통 둘을 종합해서 '거울'을 존재에 대한 사고의 매개체로 자주 사용하며,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칼비노는 훗날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라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상상을 통한 존재에 대한 사유 방법은 다양하다. 칼비노는 그 예를 몇 가지 보여주기 위해 다양하고 이상한 인물들을 만들었다.


  주인공이자 이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기사 아질울포는 갑옷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의지만 있다. 우리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나'라는 존재를 직접 상상하기는 힘들다. 분리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춥거나 더운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몸을 어쩔 수 없이 인식하게 된다. 플라톤처럼 정신의 이상적 상태를 아예 보이지 않는 하늘 위의 어떤 공간으로 상정하지 않는 이상(그것도 아니면 종교적 의미로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둘의 분리를 직접적으로 상상하거나,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아질울포'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상상을 해본다. 가령, 이 기사는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 우리가 거의 매일 하는 행위, 즉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당연히 "삶의 끈들을 다시 엮는" 일상과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드는" 꿈 사이를 우리가 마음대로 왕래하는 사실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는 정규적이지 않은 것, 나태한 것,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 등의 행동도 용납할 수가 없다. 한 학자는 아질울포를 "거의 완벽한 무의식을 통해 관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자동화된' 인간의 상징(the symbol of the 'robotized' man, who performs bureaucratic acts with near-absolute unconsciousness)"이라고 평가했다.(「La seduzione del cavaliere inesistente」, 『Romansk Forum』, Margareth Hagen, 2002.02)


  두드리면 텅 빈 소리 밖에 나지 않는 갑옷이거나 그 안의 의지일 뿐인 아질울포도 이상한 존재인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여러 존재들을 (우리가 보기에는) 흉내 내는 '구르둘루'도 칼비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굉장히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말 그대로 여러 존재가 된다. 따라서 자유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것은 분열증 같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여러 존재가 되고자 하는 현대인의 지나친 욕망 같은 것을 나타내는 듯도 하다. 그의 행동을 처음 봤을 때에는 속된 말로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그의 처지에 연민과 동정을 보내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구르둘루는 실존에 대한 위기이기도 하다.


  복수를 꿈꾸는 청년 랭보는 이해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될 대상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로 잰 것 같은 아질울포의 기사정신에 감명을 받는다. '롤모델' 같은 존재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아질울포로부터 랭보는 우리가 주로 하는 고민인 "나는 누구인가?"와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에 빠진다. 결국 그는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앞에서 "나의 적이 맞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한 번 실존의 문제 앞에 봉착하면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확신할 수가 없다. 해결책은 그냥 한 쪽을 믿어버리는 것뿐이다. 나는 그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한 흔적은 남기기 때문에 아질울포의 '의지'와는 다른 개념이다. 사랑은 실체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 말미에 가서는 아질울포가 사라지는 반면 랭보와 브라다만테,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사랑은 남는다. 이 두 커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남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지는 건 순전히 아질울포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칼비노의 개입이 아닐까 하는 부분, 그러니까 글쓰기의 어려움을 '테오도라'라는 서술자의 입으로 호소하는 부분이 평소 글에 대해 생각하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글은 상상으로 쓴다." "영혼구원의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기록과 글쓰기는 다르다." 이 세 가지 호소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3. 『나무 위의 남작(Il Barone Rampante, 1957)』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분량 상 가장 많기 때문에 담고 있는 내용도 많다. 그러나 복잡한 소설은 아니다. 모든 것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상적으로 종합된다. 주인공 코지모가 하늘에서 나타난 기구를 타고 돌연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픽션들 중에서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엔딩컷'이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 이따금 코지모가 매달려 있을지도 모를 기구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는 나의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다.


  12세 때 '지상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는 동생이자 서술자인 비아조가 말했던 것처럼 은자(隱者)이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살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땅으로 굽어 있어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책을 많이 읽으나 책에서만 생각을 그치지 않으며, 명사들과 편지로 교분을 쌓지만 명예에서만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식지 않는 계몽주의 열정은 당대 '프랑스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나란히 놓여 칼비오의 평가를 받는다. 아니, 평가를 받는 쪽은 실제 일어난 '형식주의적인 혁명'이다. 19세기는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은 모두 재가 되었다.(p.396)"고 묘사되며, 그 재가 된 시대에서 기인(奇人) 코지모마저 떠나자, 그의 마을 옴브로사에서는 외래종에 밀려 나무들이 사라진다. 그가 타고 다녔던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각자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바람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혹은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미지근한 절망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겠다.






4. 『우주 만화(Le cosmicomiche, 1965)』


  김칫국 잘 마시는 나는 벌써 '내년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으로 두 권을 골라놨는데, 『우주 만화』가 그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시절 나를 좌절에 빠뜨렸던 가오싱젠(高行健)의『영혼의 산(靈山)』이다.) 이 픽션은 과학과 상상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크프우프크(QFWFQ)'라는 초시간적 존재(혹은 우주의 시간에 해당하는 존재)을 사유하게끔 한다. 때문에 『우주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과학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체계들, 예컨대 천문우주학이나 진화론 등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은 '제 2의 지구'가 발견될 것이라는 최근의 희망에 부풀어 여러 우주 사진들을 살펴보거나(그러나 '제 2의 지구'로 가장 근접할 것이라 예상됐던 행성 HD 189733b은 사실 항성과 너무 가까워 기온이 매우 높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부는 목성형 행성임으로 밝혀졌다. 이 행성은 지구로부터 63광년 떨어져 있으며, 허블 천체망원경의 데이터를 분석해 NASA가 어제(2013년 7월 11일) 위와 같은 공식 발표를 했다. 링크를 해둔다. http://www.nasa.gov/content/nasa-hubble-finds-a-true-blue-planet/#.Ud_ojzsqzgA),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과 나의 존재에 대해 가볍게나마 고민을 한 사람들을 위한 우주적 사유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사실만으로 이뤄져 있진 않다. 최초의 존재들이 우주에서 놀이를 하거나, 달과 지구 사이를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멋지게 점프해 이동하거나, 혹은 기중기가 달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과학과 픽션 사이에서 우리는 사유의 공간을 얻는다.


  내가 칼비노에게 빠져버린 결정적으로 이유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섬세함, 깊은 통찰력, 엄청난 규모를 다루는 상상력이었다. 문제에 대한 집착이 어디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까? 이렇게 표현해놓긴 했지만 내가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뿐더러, 대체 통찰력이 깊다고 했는데 얼마나 깊은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로 『우주 만화』는 방대한 작품이다. '크프우프크'라는 가공의 존재로 여러 단편들을 연결시켜 우주의 다양한 시간대를 훑고 지나가는데, 각 시간대마다 깊은 의미들이 별도로 존재하는가 싶다가도 그 의미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모이는 것도 같다. 원시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진화의 근본(즉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의 '경계적 존재'들로부터 시작해서 공룡, 그리고 그 후의 존재들로 이어지는 사유)을, 천문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시간과 공간의 근본(여기에는 '창조'나 '시원(時原)'에 대한 위트 있는 사유도 포함)을, 생물학적인 부분을 다룰 때에는 우리 몸속의 미시적 근본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 1972)』


  이 책은 이번 주 리뷰에서 여러 이야기로 다뤘기 때문에 길게 뒤돌아보진 않겠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유도 깊다. 시적(詩的)인 내용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55개의 도시(이현경氏는 55개의 작품이라 했지만, 지난 리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랄라제'라는 도시가 따로 묘사되므로 56개의 도시이다.)에서는 각 장(章)의 도시를 형용하는 표현들에 대한 사유들이 등장한다. 길어봤자 한글 번역으로 채 5~6페이지도 안 되는, 대부분은 1~2페이지에 그치는 사유들이지만 그만큼 압축적이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하루 1~2페이지만 읽어도 자신의 글로는 10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이니까. '55'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나처럼 그 많은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나는 그것을 '삶의 지도'라 생각했는데)를 그리다가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고, 애당초 지도 그리는 것을 포기하는 현명함을 발휘해 칼비노의 사유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도 있다.


  다 읽고 나면 "도시(이 '도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인생의 가치들을 무수히 많이 대치시킬 수도 있다.)는 무엇이 구성하는가?"에 대한 사유의 기억보다는 "무엇을 우리는 잊고, 무엇을 우리는 모르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의 시선을 안개 속으로 돌려놓는다. '도시'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폴로가 황제에게 여러 형상들, 관계들, 그리고 의미들을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더라도 우리에게는 굳이 그것이 '도시'라는 한정된 기호에 그치지 않아도 된다.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invisibili)'이 된다. 우리가 평생 추구하며 산다는 어떤 것들. 그 인생이 고되고 때론 지옥처럼 느껴지더라도 칼비노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빌어 힘 있는 어조로 "현실은 지옥이지만 당신은 지옥이기를 거부하라. 지옥이 아닌 부분을 찾으라."라고 말한다. 이 어조는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독자들은 그 많은 도시들이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 환상으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방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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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저는 이제서야, 이 글 읽고나서 이탈로칼비노 (사기) 시작했어요. (읽기가 아님) 일단 한 권 읽어보려고. 전에 추천한 게 3부작 먼저 시작하라고 했었는데.. 저 뭐샀게요? 이건 저도 다 읽으면 그때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탕기 2013-07-18 11:59   좋아요 0 | URL
음... 『반쪼가리 자작』인가요? :) 잘 모르겠네요.
저는 잠시 소설은 서재에 꽂아두고 인문학 책들에 빠져 있습니다.
아. 나중에 읽으려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도 사뒀고요.
칼비노 읽으시면 리뷰 써주세요. 읽으러 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