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06
그녀가 굳게 입을 다물어도, 나는 그녀가 속으로 삭힌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서 있어도, 나는 나 몰래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누군가가 그녀였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손만 잡아도, 안아 달라, 불편하다, 배가 고프다, 빨리 걷고 싶다, 걱정된다,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그때 한창 시를 쓰겠다고 문장과 단어에 매달리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내가 백지에 적어 내려가던 그 복잡하면서도 속 깊은 모든 말이 그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됐다. 표현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반(反)구체적으로 그 세계와 교감한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우리의 이해는 배움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의 교감에도 빚진 바가 많다.
좀 더 크고 나는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요목조목 잘 따지고, 앞에 나가서 발표 잘 하면서 사회인으로의 자질을 다듬어나가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 만족은 점수가 자신의 미래와 어떻게 연관되느냐와, 콕 집어 말하자면 '취업'의 여부와 크게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학생의 버릇은 이제 그 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하나를 남겼다. 나는 아직도 서재에 둘러싸여 대체로 그 논리와 분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세계와의 교감에 써야 할 정신의 여력, 뭐라고 부르든 여하튼 그 일정의 여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하는 나의 날카로운 신경에 허비하게 됐다. 내가 지금 무엇과 교감을 하고 있기는 한 걸까? 하나같이 마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대학의 방식이나 책의 논리 등으로만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온갖 '잡것'들을 주워 담아 그냥 방치한 한 기괴한 모습의 세상은 나의 갤러리[추억]에서도 한참 구석에 밀려난 셈이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너무 딱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 특히 문화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날것'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 단어가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것이리라. '날것'은 보고, 만지고, 먹어봐야 하는 것. 그것에 논리와 분석의 가열을 가하진 않으리라. 나는 그냥 이런 생각이었다.
'교감', '날것',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은 대략 절반 정도이다. 물론 그런 취지에서는 글이라는 것을 애당초 쓰지도 않을 것이다. 글은 '가열'에 해당하니까. 이 공간에, 스스로도 별로 탐탁지 않은 감상문들을 올리는 건 모두 가열하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모두 가열이다. 날것을 그냥 먹으면 무슨 병에 걸린다더라 하는 의학적 지식이 우리의 '책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식이 아니던가. 사실이다. 책은 저자가 가공한 하나의 레이디메이드. 누군가는 책의 내용이 너무나도 참신해 그것에 '날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스스로 좋아하겠지만 그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장에는 마침표가 있으니, 우리는 예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셈이다. (자신의 독서능력, 즉 비판적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해보라. 반대로 너무 긴 문장이 있으면 우리가 어디 제대로 읽을 수나 있던가?) 아마 독서에 익숙한 사람에게 '교감', '날것'은 마이너(minor)일 것이다. 뭔가 현실에 꼭 대입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지만 나의 '메이저(major)'와 나의 '마이너'는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다. 이/저쪽에서는 불에 구워 먹지 않으면 몸에 나쁘다고 하고, 이/저쪽에서는 구우면 내가 죽는다고 한다.
우습지만 비유 하나 해보자.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면서, 나는 지금 윤중로의 벚꽃을 보고 있다. 물론 보는 건 벚꽃이지만 내가 만지고 있는 손은 여자친구의 것이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여자친구이다. 벚꽃은 핑계이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감동, 쾌감, 슬픔, 이런 것들을 윤중로 그 짧은 벚꽃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아니, 교감한다. 그것은 아무런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처럼 글로 쓴다고 하자. 복잡했던 '날것'의 순간이 정렬되면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 일련의 원인과 과정 등이 '발생'한다. 그런 것이 애당초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생각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시를 그만 쓰기로 하면서 사랑을 시로 쓰는 건 사기 치는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가면을 씌우면 안 되는 '날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주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흙 위에서 썩어 없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광경을 목격하며 '표류하는 감정'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쉽지,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상당히 뼈저리지 않던가.)
나는 몇 년 간 미술의 역사와 화가, 그리고 그들의 이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공부했었다. 당시 내가 '미술'이라는 세계에서 발견한 감동은 예술이 탄생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그냥 상상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에는) 논리적 구성과 튼튼한 이론이 있다. 그러나 구성과 이론 사이에 예술가 특유의 번뜩이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의 순간들이 있다. 구성과 이론을 공부하던 내가 오히려 밑줄을 긋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도 어렴풋이 안다. 그들과는 달리 나는 글로 창작을 하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를 쓰기로 결정하고 구상하는 그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사이에 고통의 아픔을 단번에 치유하고 창작 의지를 불태우도록 하는 '예술의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순간 자체가 하나의 '날것'이다. 그것이 그림과 글로 정착되는 순간 우리의 '날것'은 사라진다. (이걸 굳이 형식론으로 따지자면 좀 복잡해지니 차치하려고 하는데, 미술과 문학과는 달리 음악은 '날것'이거나 '날것'에 훨씬 가깝다. 예술 양식 사이의 비교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대체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읽지 않아도 직접 비교해보면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글로 '자동기술'을 하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아니면 피아노에 앉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이런저런 건반을 두드리면서 즉석에서 이도저도 아닌 '음률'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참고로 전자는 좀 어려웠는지 파리에 있던 초기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는 마약을 '빤'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게 위험하다는 걸 물론 사전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나중에'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뒀다.)
책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주로 빠지는 인생의 함정은 정제된 걸 지나치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소위 '익스트림'한 걸 좋아할 수 있다. 비싼 돈 주고 마운틴바이크를 즐기거나, 짜릿한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도 애독가들 중 분명 많다. (오히려 애독가들이 그런 생생한 체험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예로 흔히들 회고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 극단을 오고 가는 경험들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준다고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즐기면서 추구하는 그 나름의 것이고, 문제는 그것마저도 다시 책이나 글 속으로 정제시키려는 경향이다. 나도 포함되겠는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블로거들도 그렇다. 정제된 감정들이 소통하기에도 편하다. 사실 '날것'은 개인에게 그 교감의 몫이 전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익은 고기가 된다. 먹기[서로 나누기]에는 좋겠지만 교감의 일부분은 표현되지 않은 채 우리의 비밀로 남아 있거나, 혹은 먹을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폐기되어 버린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의 감정에도 분명 '날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 그런 '날것'을 책에서 건져 올려봤는가? 나는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을 읽고 나자마자, 새벽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샅샅이 살펴봤다.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나무 위의 남작'이 하늘을 나는 기구를 붙잡고 먼 하늘로 사라졌다는 책의 결말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날것'의 감정은 지금 글을 통해 회상되는 처지에 놓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멸했다. 글은 그 감정의 묘비인 셈이다.) 분명 '날것'이 아닌 세계에도 '날것'은 존재한다. '날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과 교감하는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첫 번째 파동이자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다양한 강도를 지니겠지만 대체로 강렬한 편이다. 하지만 그 길이가 짧다. 우리를 일순간 주목시킬 수 있을 정도의 폭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서와 글쓰기, 혹은 비슷한 종류의 '정착시키기'를 통해서 감정의 난민들을 어떻게든 다시 우리 안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잘 안 돌아가면 우리가 으레 하는 '조각모음'처럼.
위에서 나는 '날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나의 '반쪽짜리 욕망'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감정이 정착되는 우리의 비근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는데, 이건 '날것'의 입장에 서 있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나는 내로라하는 장서가들도 하루 즈음은 "저 지겨운 책의 세상으로부터 떠났으면 좋겠네."라고 넋두리를 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겁이 나서 확신까진 못하겠지만, 분명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방벽'은 '날것'이 아니라 '책(문자)'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런 환경에 질식할 필요는 없다. 용기를 갖고 딜레마와 또 한 번 부딪히는 것이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어디 나갔다가 여기 다시 앉게 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과정 자체도 이미 다르거니와 일단 앉게 된 '이유'가 다르다.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과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앉는 것은 동기가 확연히 다르다.
오래도록 나는 '날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여겨왔다. 책을 열심히 읽을 때에는 "책이 세상의 전부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뿌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맞아. 전부는 아니지."라고 수긍했다. 이때, 나의 수긍에 한 몫 한 것은 '날것'에 대한 동경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비아냥거릴 때 말한 그 세상의 진의는 '날것'이 아니라, 책 밖에 있는 거친 세상일 것이다. 나는 조금 달리 생각해서 내가 세상과 접하는 방식의 이원성을 고민했다. 교감하느냐, 읽느냐. 둘은 광의(廣義)이다. 정말 내가 E.T.와 손가락 하나로 교감한다는 것, 혹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날것'을 그대로 놔두느냐, 그걸 요목조목 묘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성의 고민이 여물지 않았던 때에 나는 한쪽만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책이 지겨울 때에는 "독서, 이딴 거 다 때려치우고 말지."라는 앙탈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두 방법 사이를 끝없이 왕래하면서 나는 어떤 견고한 두 축을 만들어간다. (물론 '날것'은 그 모습을 절대 보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냥 편의상 상상한다면 말이다.) 두 세계가 나의 안에서 결코 동시에 자신의 음을 내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는 '도'의 음으로, 다른 하나는 '레'의 음으로, 혹은 어떤 음으로든 서로 다른 높이의 소리를 가진 채 나에게 하나의 큰 세계를 보여준다. 아이러니이다. 둘은 공존하지 못하면서도 긴 시간의 선상에서는 분명 공존하고 있다. 한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을 떠올리며 갑자기 나는 '날것'으로의 어떤 깨달음(연관성이라고 할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적어보는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사라질 나의 '날것'에 대한 추모이자, '날것'이 낳은 아들과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