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07.04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3권]

 


  미치오 카쿠 박사가 출연한 BBC 다큐멘터리


  그의 질문에 답한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의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기꺼이 마시겠다는 사람들은,
  “I’m happy right now. So yes, I guess I would drink this elixir of life.”
  “Sure, Absolutely. I like life and er, I’d be quite happy to live an awful lot more of it.”
  “I think it would be great. I think the problem is, humans die too soon.”
  이라고 대답했고, 마시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Too sad when all my loved ones pass, too sad when my world disappears. Already I’m sick of everything.”
  “It’d be so boring to live forever. It would just be awful I think.”
  “I’d rather die really. I think that what makes life so worthy is that at the end we die, we all go.”
  라고 대답했다.

  노년의 미치오 박사는 “Sure.”이라고 말한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굉장히 많은,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다지 밀착되지 못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Sure.”이라고 답할 때의 애티튜드와 그의 것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무엇을 바라든, 타인들이 회고할 ‘나의 마지막 순간’은 다가온다. 죽음은 우리에게 시간을 줬고, 시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의 여정을 알려준다. 톨킨이 불사의 ‘엘프’를 상상하고, 롤링이 ‘마법사의 돌’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도, 우리는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을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진정한 주제이다. 비장하면서도 서늘한 것.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원제 : The Dying Game)>는 그것을 다룬다. 얼마간 나의 새벽을 두렵게, 착잡하게, 때론 슬프게, 그리고 흥미롭게 만든 이 책을 덮어 서재에 꽂아둔다.

 

 

*    *    *

 

 

  내가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진중권氏의 <춤추는 죽음(1997)>이다. 순전히 미술공부를 목적으로 산 그의 수많은 책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부보다는 감상이 앞서게 된 책이었다. 지금껏 기억하는 죽음의 에피소드들을 거칠게 펼쳐놓고 보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도상분석이나 문화적 지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뭉크와 케테 콜비츠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조란 무직(1909~2005, ‘고통’의 대명사인 슬로베니아 출신 화가)과 펠릭스 누스바움(1904~1994,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계 화가)은 또 어떠한가. 그들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죽음은 나에게 있어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비극의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감상의 자세는 흐트러지고, 나는 그렇게도 괴로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 중 하나인 <명탐정 코난>이라든지, 최근 열풍 그 자체인 ‘미드 수사물’들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이다. 이들 픽션의 공통점은 죽음의 비극이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은 픽션의 모티프가 된다. 냉철한 판단이 죽음의 원인을 쫓아가고, 사람들은 죽음의 또 다른 형태를 목격하게 된다. 혹은 매력적인 픽션에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의 의미를 발견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유형을 분류하기에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체험’은 무척 다양하고, 인상적이며, 또한 순일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체로 기억하는 죽음은 죽음이 갖고 있는 수많은 의미들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멜라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시로 깨닫게 된다.

 

 

*    *    *

 

 

  역자가 왜 이 책의 제목을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로 했는지 모르겠으나(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의 원제는 ‘The Dying Game’이다. 그냥 ‘다잉 게임’이라고 써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멜라니는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진 않는다.), 공교롭게도 정작 멜라니는 무려 1장에서부터 6장까지를 ‘시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사례 언급에 할애했다. 상상력은 좋은데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의 독서에 다소 지장이 있을 사례들, 하지만 나름 자신이 담대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울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남아권의 영화(아마 태국이 아니었을까?)로 기억하는데, 한 여자가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있었다. 산 채로 매장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자고 일어났더니 관 속에 있게 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까 두려워한다. ‘조기매장 공포증’이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형태의 두려움은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를 양분으로 삼아 괴담의 탈을 쓰고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괴담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멜라니가 2장을 통해 “사망의 정확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의학의 허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진단으로 의학계에서 ‘사망 공식화’를 선언하는 순간은 시반(livor mortis)이라고 한다. 멜라니에 따르면 이는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 “눈과 혀는 튀어나오고 입술이 퉁퉁 부어오르며 가슴과 생식기도 부푸는(43쪽)”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애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땅 속에 묻힌 시신이라고 해서 늘 유족들의 바람대로 평온하게 있지는 못한다. 도굴과 이장(移葬)의 사례를 살펴보면 산 자들의 횡포가 때론 극악무도한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묻힌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시체”들에서 장기만 적출하여 밀거래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음모론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정권에서는 시위탄압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고문으로 숨진 이들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대량으로 넘기기도 했다.


  시신은 정치적 목적으로도 이용된다. 5장 ‘발전하는 미라 제작술’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레닌의 시신을 40일 더 보존할 수 있게 요청(123쪽)한 스탈린의 일화였다. 이는 마오쩌둥, 김일성, 그리고 최근의 김정일에게도 해당된다. 사람은 죽은 후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28시간 내에 부풀어 오른다. 박테리아가 만든 가스 때문이다. 사회주의 정권들의 ‘인민’들은 그들이 우상화했던 지도자의 시신에 의사들이 엄청난 양의 화학물질을 투여해 인위적으로, 마치 ‘살아 있는 시신’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얼마 전 전공세미나 강의의 과제로 <변강쇠가>와 관련된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변강쇠의 아내가 되는 옹녀는 열다섯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매해 서방을 잃어(이를 ‘청상살’이라고 부른다.) 내쫓긴 신세가 된다. 변강쇠와는 길가에서 만난 사이이다. 이미 이 대목에서 옛 사람들은 “변강쇠, 저 놈도 죽을 목숨이구만.” 했을 것이다. 물론 변강쇠는 진짜 죽는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오늘날 학자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그 다음인데, 바로 옹녀의 치상(治喪)이다. 옹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여인이 아니다. 변강쇠의 상만 치를 수 있다면 어떤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다는 심보로 거리에 나앉아 온갖 교태를 부리며 애긍히도 운다. 결국 걸려든 남자들은 다 죽는다. 서양의 팜므파탈보다 가히 더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옹녀처럼 발칙한 치상하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나, 추모의 정도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 예전보다 크게 감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의 인권 신장,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의 폭발적인 증가, 바빠진 현대사회의 일상,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유행 등이 여러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별난 추모들도 있다. 타지마할이나 진시황릉의 경우처럼 절대 권력자들이나 소유할 수 있었을 규모의 추모 공간을 요즘의 신흥자본가들이 모방하는 사례가 있다. 멜라니는 그 중 ‘니콜라스 반 후그스트라텐’이라는 한 실업가를 소개했는데, 그는 엄청난 규모의 영묘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이룩한 것은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모두 가져갈 것입니다.(185쪽)


  전 세계적으로 내세를 믿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서구식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이 세계가 끝이 아닐 것이다.”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다음 생애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은 무병장수의 기원과 사실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내세가 있으니, 사람들 중에는 이베이를 통해 영혼을 팔겠다는 이도 있고, 고인들에게 기원하는 이들도 있다. 대사부(흔히 말하는 ‘면죄부’의 가톨릭 용어)를 비싼 돈 주고 사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던 유럽인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주, 연대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에 교문 쪽을 바라봤는데, “불신지옥!”을 크게 붙여놓은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공자의 말, “未能事人, 焉能事鬼(사람을 섬길 줄 모르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세의 매력은 세속적이기까지 하다.


  9장과 10장은 현대적 의미의 죽음을 다룬다. 수사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볼 수 있는 사례들이 많고, 10장에서는 ‘죽음의 시작’을 찾아내려는 현대의학의 노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고 알고 있지만 심폐소생술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현대 의학은 “심폐 기능보다는 신경학적 기능을 기준으로 사망을 판정(257쪽)”한다. 아마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안락사의 윤리적 문제와 같은 난제와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소극적 안락사만이 법원의 사례별 판단(일명 ‘김 할머니’사건, 기억날 것이다.)에 따라 허용될 뿐, 안락사를 입법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죄가 적용된다.


  이처럼 의학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영생에의 욕망’이 거의 달성될 것처럼 보인다면 인간은 더 심각한 윤리적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장이 지구의 동력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경제관에 따르자면 우리는 인위적으로 무병장수하게 되고, 때때로는 복제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다볼 수 없는, 불명확한 미래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공포 그 자체이진 않을까? 죽음은 어쩌면 인간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공을, 중력이 지배하는 것처럼 우리를 지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죽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고쳐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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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할 만한 책이군요. 예전에도 인문책 리뷰어분 리뷰를 여기말고 다른 블로그에서 읽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는데..그나저나 저는 인문학책은 사놓고도 거의 읽지도 않으면서 >.<

열한 권은 모르겠고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의도적으로)읽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늘 자극이 돼요, 탕기님은.
비가 남부지방으로 내려왔네요, 시원해서 좋긴 한데, 뭐든 지나칠까봐 걱정이에요. :)

탕기 2012-07-07 00:37   좋아요 0 | URL
죽음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덜 상기시킨다는 점에서는, 가벼운 책이기도 해요.
일단 멜라니가 소개해주는 많은 사례들이 충분히 흥미로워요.

음. 인문학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들이 평소에는 좋고,
방학이면 집중할 시간이 있으니까 어려운 책도 좋은 것 같아요.
파농 읽겠다고 한 것도 그런 때문이고요. :)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로버트 D. 헤어 지음, 조은경.황정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2012.07.01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2권]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의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경철(배우 최민식氏)의 무덤덤한 표정으로부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이라는 형용사구의 함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저 영화 속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맹신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잊을 수 없을 만한 종류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무고한 죽음과 닿아 있다.

  <진단명 : 사이코패스(원제 : Without Conscience : The Disturbing World of the Psychopaths Among Us)>의 저자 로버트 D. 헤어는 “누구나 사이코패스를 만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살벌한 전제이다.

 

 

*    *    *

 


  사이코패스는 겉보기에 흉측스럽기 그지없는, 혹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카엘(1498년 작품)> 속에서 창에 찔린 고통을 온 몸을 뒤틀며 표현하는 용들처럼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대개 멀쩡하다. 지적인데다가 달변이기까지 한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속는 순간 우리는 그가 손으로 눌러 죽이는 벌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선정적인 표현이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예외’들을 과장하려는 수사법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피상적 감정을 가진 사이코패스들에게 선처를 호소해봤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돌아온 의식으로 한 피해자 여성이 장경철에게 “아저씨, 살려주세요.”라고 힘없이 호소했어도 결국 장경철은 그녀를 잔인하게 죽였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측은지심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우리의 신체는 생리적 변화를 겪는다. 전달물질을 통해 감정이 발생하고, 우리의 몸 어딘가는 분명한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로버트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들에게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생리적 불안이나 특징을 찾아볼 수 없(96쪽)”다.


  이 책은 사이코패스들의 ‘기막힌’ 사례를 시작으로 그들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이코패스들과 로버트가 직접 나눈 대담의 채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비정상적’이라는 단어 사용이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로버트는 사이코패스를 정의내리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우리들 중 “저 사람은 정신이상자이다.”와 “저 사람은 사이코패스이다.”, 이 두 문장의 정확한 차이를 알고 있는 이는 몇 안 될 것이다. 정신이상자는 분별력이 없다. 반면 “교도소나 구치소에 있는 사이코패스는 상당한 사교술을 발휘하여 판사가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도록 설득할 수 있다.(55쪽)” 그들도 이미지 관리를 한다.


  로버트는 65쪽을 빌어 사이코패스의 증상들을 열거해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중 일부는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는 하나쯤 속할 만한 것이다. 가령, “자기중심적이며 과장이 심하다.”라든가, “책임감이 없다.”라든가, 혹은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하다.”라든가, 등등. 다행이도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로버트와 같은 전문가들은 각 항목별 사이코패스의 특징과 일반적인 ‘우리’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예들은 3장에 길게 제시되어 있다.


  물론 로버트도 그가 제시한 진단법이 매우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일반인들에게 잘못 적용하면 자칫 성격이 단순히 모날 뿐인 누군가에게 ‘사이코패스’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고, 반대로 진짜 사이코패스의 교묘한 수법에 속아 그를 다시 사회로 돌려보낼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악당은 키스하면서도 당신의 이빨 개수를 세고 있다.(117쪽)”라는 유대인들의 소름끼치는 속담은 우리에게 사랑마저 의심할 것을 명심하도록 한다. 우리가 악당을 만날 확률은 (우스갯소리로)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 코난 일행이 있는 곳이라면 거의 매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확률보다는 적겠지마는.


  우리는 대체로 ‘괜찮은’ 사회화를 겪는다. 로버트는 사회화의 조건으로 합리적 판단, 철학·종교적 신념, 협력과 조화의 필요, 그리고 공감 능력을 든다. 사이코패스는 이들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다. 로버트는 이를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126쪽)”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우리가 사회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이코패스들은 대대적인 ‘마녀사냥’의 여파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구별해내기 힘들다. 게다가 오히려 사이코패스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일탈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이코패스가 일종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개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양상으로까지 보일 것이다.


  로버트는 정신분석학자 린드너가 1944년에 펴낸 <이유 없는 반항>의 구절을 소개하며 당시에도 사이코패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사회적 문제였다고 말한다. 강산이 수차례도 더 변했을 지금에도 그 증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영화가 나오면 비평가들은 영화의 재미를 분석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은 작중 인물을 실제 사례와 대비하여 진단하는데, 사실 대다수의 영화팬들은 그저 보고 즐긴다. 그것은 차라리 쾌감이다. 감정이입이 되기 힘든 그런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제 3자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잔상은 남겠지만 충격은 금방 잊힌다.


  영화 속의 사이코패스들이 그러한 것처럼 (물론 연출 때문에 가감한 것은 있겠지만 대체로 증언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범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할 수 있다. 로버트는 경찰들도 ‘정서적 플래시백 현상’, 즉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범인에게 총을 쏘고 난 후부터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고 말한다. 범인이 총에 맞는 충격적 상황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들은 너무 태연해서 그들의 증언을 듣는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상담전문가(147쪽)’들마저 기겁하게 만든다. 150쪽에 나온 한 사이코패스의 증언은 그 장면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하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들이 혹시 교화(敎化)될 수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하지만 전자에 대한 질문에 로버트는 긍정적인 답을 내놓지 않다. 한 여성은 35세에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고 엄청난 전과기록을 갖고 있었다. 42세에 석방되자, 그녀는 바른 삶을 살았다. 심리학 학사증도 받고, 좋은 일들도 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속임수와 거짓말에 능수능란하다. 그녀의 진심을 판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녀가 그저 잠시 법에 위배되지 않는 삶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녀의 사례는 1970년대 미국사회를 가히 엄청난 충격에 빠뜨렸던 존 게이시와 꼭 닮았다.


  ‘화이트칼라 범죄’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사람을 녹여버릴 듯한 미소를 띠고, 믿음직한 목소리로 먹잇감에 접근하며, 목에 그 어떤 방울도 달고 있지 않(169쪽)”은. 점잖은 신사나 숙녀가 사이코패스라면 우리는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이윽고 정신적 비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판단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멘붕(mental collapse, 물론 이런 영단어는 없다.)’을 유발한다. 그들의 수법과 언어사용, 혹은 발화(發話)시의 자세 등 로버트가 예로 든 특징들을 우리가 자세히 관찰한다고 해도 사실 사이코패스들은 우리의 약점은 잘 알고 있으니, 그들을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로버트로부터 두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듣진 못했다. 구별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은 그가 전문가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태도이지, 우리가 실제로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이코패스가 왜 만들어지는지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영향이 결합된(260쪽)” 것이 사이코패시적 태도와 행동이라고 결론짓지만 이는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것이라는 흔한 추론이다.


  여하튼 이렇게 ‘형성’된, 혹은 ‘유발’된 사이코패스들은 심리치료로도 교화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심리에 만족한다. 그런 이들은 치료될 수 없다. 혹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시늉(305쪽)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이 책은 1993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나라에는 200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로버트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과학적 진단과 치료가 부재한 상황을 개탄하면서 결국 우리 자신이 사이코패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며 책을 마무리한다. 방법들은 대개 피상적이다.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이코패스, 아니, 우리가 흔히 ‘사이코’라 부르는 인물들에게 많은 관심이 쏟아지면서 사회 전반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향상된 듯도 하다. 그래도 우리가 그것을 사회의 문제요인이라 인식하기에는 피해 사례가 지극히 개별적(동시다발적이고 광범위한 환경문제도 등한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은가.)이라는 특징이 한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피해가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범죄적 발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이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더 확고해질 필요가 있다. 로버트의 이 책은 ‘행동과학’과 심리학이라는 난해한 분야의 충격적 사례를 알기 쉽게 풀어 썼다는 점에서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의 말처럼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는 연구자들의 주장과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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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 첫 책이 사이코패스라니ㅜㅜ 엉엉ㅜㅜ
물론 저도 좋아하는? 관심있는 분야고 리뷰는 여전히 멋지지만요.

11선 좀 공개해봐요, 탕기님.(저는 왜 이런 게 궁금할까요?)

탕기 2012-07-03 08:26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 전부터 '광기'에 관심 있는 건 아이리님도 알고 계셨잖아요.ㅎㅎ

지금은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멜라니 킹)>을 읽고 있어요. (아이리님도 좋아할 만한 책!)
11선 중 나머지 8권은 오늘 책 도착하는데로 '바이북' 페이퍼 쓸 때 같이 소개할게요.^^
읽고 싶은 책 중에 반값 할인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아서 마일리지 다 쏟아부었거든요.ㅎ
 
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2012.06.30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권]


  8시 30분. 버스에 오른다. 나와 같은 학생들이 타고, 서로 비슷해 보이는 회사원들이 타고, 이따금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타고, 버스는 자유로에 진입한다. 그 쯤 되면, 나는 이미 한 시간 이상을 버스에 있었으므로, 졸기 시작한다. 버스는 가양대교 북단 즈음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가끔 미동만 할 뿐인 버스 속의 불편한 고요함을 말없이 견디기 시작한다.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교통사고가 있는 날은 한 시간. 그래야 버스는 사람들을 내려주기 위해 합정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내린다. 종점까지 15분은 더 가야 하는 나를 남겨두고 줄줄이 내린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는 채 떠나지 못한 ‘그것’들이 등받이처럼 붙어 있다. 떨어지지 않은 ‘그것’들이 이따금 나를 노려보는 것도 같다. 나는 하품으로 응수한다. ‘그것’들에게는 하품이 최적의 무기라는 설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들이 하품을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그 버스를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도록 만든다. 뭔가를 너무 많이 먹은 느낌이다. 포만감이 극에 이르면 토가 나온다. 그래, 사르트르의 ‘구토’가 나온다. 바로 라르스 스벤젠의 “과잉에 의한” ‘그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태’이다. 지루한 가뭄이다. 혹은 한 음만 반복되는 4분짜리 곡 12트랙의 앨범이다.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울지 않던가. 자연의 이치가 ‘변화’에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데, 왜 우리의 일상은 마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구두 한 켤레처럼 그토록 ‘어김없는’ 것일까? 그 구두를 신고 우리는 현관문 바깥을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이 노골적인 제목의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었다. 피터 투이의 <권태(Boredom)>이다.

 

 

*     *     *

 

  사람마다 다르겠다. 나는 ‘권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Olafur Arnalds이다. 그는 순전히 Sigur Ros와 Bjork 때문에 알게 된 아이슬란드의 뮤지션이다. 책상에 앉아 인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노라면 나는 대체로, 의자에 걸터앉아 축 늘어진 베케트와 담배를 문 카뮈 사이의 어느 즈음 정도 되는 자세와 잔뜩 찌푸린 인상을 하곤 한다. 주제들이 가볍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별로 재미없는 사람인 나의 천성인 듯도 하다. Olafur의 음악은 그런 나에게 제격이다. <권태>를 읽을 때, 나는 그의 음악 를 수 백 번 반복해서 들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단조가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3분 5초 동안 계속된다.


  한창 미술공부에 열을 올릴 무렵에는 뒤러의 <멜랑콜리아 Ⅰ>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을 뜯어본 까닭은 당시 파노프스키의 <뒤러>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작품 속 여인은 뒤러의 은유이고, 뒤러의 ‘권태’는 화가를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그의 도전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나에게 이 역설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자신을 초상화 속 예수로까지 묘사했던 북유럽의 자존심이 느낀 권태. 권태는 참으로 인간적인 쇠사슬이 아닌가 말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판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 에우스타키우스>(1501년경 동판화)이다. 동물 묘사의 극치라 여긴다. 어쨌든, 이제 미술 이야기는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권태는 늘 역사적인 주제였다. 가볍고 간헐적인 권태는 불현듯 일상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예술이 그곳에서 탄생한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진지하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막연함. 그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권태는 우리가 표현하도록 하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일까? 피터는 책의 부제를 “창조적인 역사(Lively History)”라고 달아뒀다.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권태를 줬다.” 이런 주장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아, 이것도 일종의 권태인가? ‘명제에 대한 권태’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고등학생들은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 즉 한 분야나 주제를 통시적으로 훑는 과목에서 거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모더니즘의 특징을 (고등학생 때보다는 조금 더 심도 있게)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가 왜 권위와 전통, 혹은 절대적 진리들을 이따금 적대시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역(役)현상도 재미삼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모더니즘이 유발한 ‘시대적 권태’에서 도망칠 수 있는 비밀통로나 첩경 따위는 찾기 힘들다. 피터의 책에서 권태는 차라리 ‘사회적 권태’의 약칭이다. 멜랑콜리와의 차이라고 할까. 그러나 우리에게 둘의 경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권태, 멜랑콜리, 우울함은 시각적으로 같은 모습이다.(59쪽)
  그것은 강렬하지만 너비와 높이를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카뮈의 <이방인(L'Etranger)>을 읽다 돌연 손가락으로 방아쇠 당기는 흉내 내본 이라면 안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이것만 하면 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별로 시원하지 않은 하품을 하는 것 말이다. 가져다 대면 살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정도의 고열을 방출하며 총탄이 총구로부터 음속에 필적하는 속도로 날아간다. 그래도 지루하다면 팔꿈치로 턱을 괴면 된다. 이 행동들의 순서를 뒤죽박죽 바꿔놔도 별 상관은 없다.


  바이런의 말이 맞다. 권태는 “잠으로도 가시게 할 수 없는 지독한 하품(57쪽)”이다. 무료한 우리의 일상에 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없지 않은가. 혹 그런 까닭에, 결말이 훤히 보이는 드라마, 예컨대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이 사실 남자주인공의 배다른 동생이었다던가, 여자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남자주인공이 목숨을 담보로 장기기증을 해서 살아난다던가, 대충 그런 드라마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막장드라마들도 시청률은 대체로 높다.


  피터는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는 여러 이론들을 문학과 미술 등의 다채로운 사례로 입증하거나, 혹은 이론이 문학과 미술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글을 엮어간다. 하지만 권태에 대한 그 특유의 (그는 서문의 마무리에 “고백하건대 나 역시 살면서 권태를 자주 느꼈다.”고 썼다.) 낭만적인 시각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읽는 이들은 아마 수시로 독서를 멈추게 될 것이다. 공감 때문이다. 권태는 그 정체가 애매모호한데도 이상하리만치 공감되는 무엇이다. 그렇다고 호들갑떨면서 무릎을 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의 권태면 다행이다. <권태>의 2장에 실려 있는 소위 ‘만성적 권태’는 위험하다. 이 권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면 ‘환자’가 된다. 사람의 성격유형을 구분하는 여러 유명한 이론들이 있다. 심리테스트 좋아하는 현대인들 중 몇몇은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자신에게 실제 적용하기 위해 비싼 돈 주고 전문가에게 검사를 의뢰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형검사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심각한 수준의 권태 ‘환자’들도 있다.


  만성적 권태가 해당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의학적 근거는 도파민 수치이다. 도파민은 소위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 그것이 평소 낮은 사람들, 즉 늘 권태로운 사람들은 자극을 찾게 된다. 여기서 ‘자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권태와 분노의 상관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된다. 여행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를 ‘배회증(흔히 말하는 방랑벽)’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행이도 만성적 권태는 대체로 가볍다.


  다음 장에서 피터는 동물과 권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동물을 여전히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일부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라면 동물 중 일부 종이 권태를 느낄 수 있다는 의학적 주장을 별다른 근거 없이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동물도 권태를 느낀다는 것을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 중 하나는 집에 아무도 없으면 간혹 자신의 대변을 먹는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 하나는 소변을 머리에 묻히곤 했다. (우리 가족은 그녀의 바짝 세워진 털을 보고 ‘베컴 머리(닭벼슬 머리)’라고 불렀다.) 이는 한 박사의 관찰(125쪽)과 꼭 닮았다. 격리와 감금은 동물에게 공포, 동요, 또는 우울을 유발한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단 동물의 경우만 그러할까. 감옥, 그것이 실제 감옥이든 은유의 대상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를 철창 속의 새처럼 만든다. 새는 날아야 한다. 본능이다. 우리는 박탈된 권리로부터 권태를 느끼게 된다.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서 앤디(팀 로빈스氏)는 지루한 감옥생활을 잊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한 일은 교도소 주변의 돌을 모아 체스 말을 만드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수용소 안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는 죄수들이 그려져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도 방 안의 모든 물건들, 그리고 그 물건들의 흠집까지 기억해내는 방법으로 (카뮈의 표현대로라면) ‘추억거리’를 만들어 권태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이 있다.


  고행자들에게는 권태가 피하지 못할, 넘지 못할, 막지 못할, 대체로 그런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행자들에게 그것은 악마였을 것이다. 피터는 에바그리우스(초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가로, 이집트 사람이고, 흔히 ‘폰티쿠스’라고 부른다.)의 ‘한낮의 악마’, 즉 아케디아를 그 예로 든다. 그것은 실존적 권태이다. 거듭 예로 들게 되는데 <이방인>의 뫼르소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를 이해하긴 힘들어도 우리의 대부분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많든 적든 (우리들의 대부분이 더 이상 권태를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뫼르소적”이다. 원색적 욕망만을 탐닉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침묵은 있지 않은가. 여지없이 권태가 침투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얼마 전 두 편의 레포트를 한꺼번에 마무리하느라 심각한 권태를 느꼈다. 뒤러가 <멜랑콜리아 Ⅰ>으로 호소한 ‘지성인의 권태’에 조금이나마 근접했던 때였다.


  실존이 권태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면, 아니, 당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차라리 ‘공격’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그 해괴망측한 상황에 빠진다면 차라리 결정된 상황 속에서 뭔가 해결책을 찾고자 머리를 쥐어짤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그런 상황은 애당초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편안한 상상을 할 것이다. 우리의 혐오는 ‘있을 법한 것에 기초’를 둔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리얼리즘에 기초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한 마디처럼 우리가 경계를 잃게 되면, 그리하여 “나는 <변신> 속의 해충이고, <변신> 속의 해충은 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 ‘환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혹은 호퍼의 <바다 옆의 방>(1951년 유화)처럼 그 모든 것이 단조롭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 답답함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피터는 실존적 권태를 “키메라 같은 존재(182쪽)”라고 묘사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여러 개의 머리가 있다. 그런데 실존적 권태는 “정서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189쪽)”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러 개의 머리’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된다. 무슨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잉여가 된다.


  5장은 권태의 역사에 관한 공간이다. 그리스인들이 두려움을 신중함으로 여겼다면, 그리고 로마인들이 그것을 타인에 대한 지배와 연관 지었다면(201쪽), 권태도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다. 18세기부터 차곡차곡 누적된 근대의 산물들 속에 권태를 집어넣는 학자들의 의견도 있다. 우리가 ‘권태’하면 떠올리는 감정이 ‘권태’라는 언어 자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boredom’이라는 명사가 처음 등장한 때가 1864년이라 권태의 시작은 엄밀히 말해 그 때부터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이전에도 boredom에 충분히 상응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머리가 멍해진다.(209쪽)”라든지.)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느끼는 권태의 조건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권태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병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겠다. 권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사례(212쪽)도 있다. 문자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사고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보통의 이해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가깝게 와 닿지는 못한다.


  6장은 “어떻게 하면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얻고자 이 책을 펼쳐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피터가 들려주는 것들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는 답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여가시간은 실용이나 도덕과는 무관하게 보내야 한다. 잔뜩 긴장한 몸을 쭉 이완시키는 것처럼. 이 모든 답들이 이 책에서는 의학적 근거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한편, 극복할 만한 권태는 우리에게 (이 책의 부제처럼) 창조의 통로로 이어지는 놀라운 문이 되기도 한다. 브로드스키는 권태가 진정한 ‘나’를 만든다고 했다(252쪽).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을 아울러, 사실 길지 않은 책이긴 하지만, 피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맨 마지막 한 문장에서 집약된다. 이것이 명제이다.
  “권태는 그저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일 뿐이다.(257쪽)

 

 

*     *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그 왼편 차창들 밖으로 노을 질 무렵의 한강이 황금빛처럼 빛난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Olafur Arnalds의 잔잔한 를 듣기 위해 음량을 되도록 크게 올려놓고.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하루의 고단함을 등받이에 이리저리 묻혀가며 졸고 있다. 아니, 잠을 쫓고 있다. 나처럼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사람이 아닌 경우라면 잠은 ‘버스타기’의 최대 적이니까. 그의 혈투가 못내 안쓰럽다. 차라리 “내리는 곳 알려주시면 제가 깨워드릴게요.”라고 말을 건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잠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더 걸리니, 선잠 잘 시간은 충분하다. 의식이 몽롱해지다 결국 나는 차창으로 머리를 살짝 가져다댄다. 온몸이 차창으로부터, 의자로부터, 바닥으로부터 튀어 올라도, 나는 참 잘 잔다.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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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테러 -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성찰
브루스 링컨 지음, 김윤성 옮김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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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유난히 까무잡잡한 친구를 ‘오사마’나 ‘빈 라덴’이라 부르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덩치 큰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뉴스 속보를 봤었다.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새벽 4시가 넘도록 ‘Breaking News’를 보다가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두 채의 빌딩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중 3이었다.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우리나라 63빌딩도 무너질 것이라, 미국이 패망할 것이라고 나돌던, 일명 “카더라.” 통신의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도, 무너지지도, 패망하지도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그나마 책과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그것도 겨우 곁가지를 잡는 수준이겠지만) 서구 對 아랍의 대결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슬람의 연이은 혁명들도 이슬람 스스로의 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명을 달리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기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테러의 공포를 줬다. 미국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이냐를 두고 對 이슬람 정책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롬니는 전형적인 우파. 이스라엘의 지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가 당선된다면 이슬람과의 대치는 심화될 것이다. 반면, 오바마는 아랍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등 중동 관계에 있어 개방적이다. 또한 종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견지한다. 아마 젊은 시절 체험한 인문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최근 나는 찰스 타운센드의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한겨레출판)>을 읽고 있다. 때문에 9.11을 두고 ‘테러’가 아닌 ‘사건’이라 부르고자 한다. ‘종교, 폭력, 평화’라는 강의를 통해 내게 종교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김명희 교수께서도 9.11을 두고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서구적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두고 反美라고 하면 곤란하다.) 브루스 링컨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책 <거룩한 테러>의 부제도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대한 성찰”이다. 역자 김윤성氏도 ‘9.11 공격’이라는 표현을 쓴다.


  종교갈등이나 종교현상에 관해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의 특징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또 하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을 모아 보면 <거룩한 테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엘리아데에게서 지도를 받은 브루스가 9.11 사건을 상징체계들의 충돌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9.11 사건을 음모론으로만 흔히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알려주는 또 다른 의미는 현재 서구 대 아랍의 대치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여러 종교들의 갈등 양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   *   *

 

 

  학문적 분석으로 시작하는 초반부(서문도 상당히 중요하다.)에서 브루스는 종교를 담론, 실천, 공동체, 그리고 제도로 나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모하메드 아타(‘모하메드 엘아미르 아와드 엘사예드’라고도 불린다. 9.11 사건 당시 비행기에서 공격을 주도한 인물이다.)의 지령서를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소위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공격하는데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브루스는 이를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의문”에 부치는 상징으로 봤고, 찰스 타운센드는 그의 (앞서 언급한)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을 통해 그것이 테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테러는 전쟁과는 달리 물리에 호소하는 바보다는 심리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분명 담론의 힘이다. 모하메드 아타의 지령서 배후에는 ‘쿠란의 담론’이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힐리야(‘무지(無知)’라는 뜻으로, 알라를 따르지 않는 시대를 의미한다.)와 대립되었던 것과, 9.11 사건의 오늘날에 알카에다를 비롯한 여러 반미 계열의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들과 일부 이슬람주의자(이는 브루스의 용어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이다.)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자힐리야’와 대립하고 있는 유사한 구도를 도출할 수 있다.


  9.11 사건의 물리적 힘이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TV 모니터나 컴퓨터 스크린으로 수도 없이 봤고(혹은 노출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상기할 수 있는 그 시각적 충격은 기본적으로는 물리적 힘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충격은 대치하고 있는 나라의 당사자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브루스의 용어대로라면 ‘기호 가치(sign value)’로 여겨지지 않을 확률이 크다. 9.11 사건의 위협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극소수의 음모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위협은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나라 개신교의 무리한 아랍 선교로 몇 차례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9.11 사건과 관련된 보복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9.11 사건의 기호가치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브루스가 2장을 통틀어 비교한 부시와 빈 라덴의 연설 차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자타(自他)의 구분을 통해 (그들)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권력 간 카르텔 형성은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은 지하드(聖戰)의 개념(실제 ‘지하드’의 개념은 여러 층위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서는 ‘칼의 지하드’를, 즉 ‘정벌’ 개념의 지하드를 의미한다.)을 통해 이슬람 방식의 ‘평화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만의 사정이 아니다.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 시도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들의 문명을 전 세계에 심어주고자 했다.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성격의 폭주기관차이기도 하다.


  흔히 기독교를 일컬어 ‘역사의 종교’라 말한다. 역사적인 종교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를 종교로 해석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라는 뜻이다. 가령 심각한 가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심이 약해졌거나, 종교적으로 비도덕적인 일을 일삼았거나, 혹은 십계명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위 “유치한 생각”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주요 종교인 미국에서는 9.11 사건을 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7~80년대 TV 선교를 통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팔웰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사용한 방식이 바로 저러한 해석 체계였다. 브루스도 그것을 분석틀에 넣어 살펴본다.

 

  만약 종교로 작금의 고난이나, 혹은 일부 ‘승리’라 일컬어지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종교의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표현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영향력과 관련해서 브루스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하나의 장(章)을 할애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가 이 장에서 제시하는 개념은 최소주의-최대주의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의 개념 정리가 아니다. 바로 후기식민사회에서 최소주의가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서구 열강들은 최소주의(이것을 신자유주의와 이음동의어도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것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를 통해 소위 ‘근대화’나 ‘서구화’와 같은 가치들을 해당 사회에 심어준다. 브루스의 표현대로 그것은 곧 번영과 성취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적 경향들이 그 사회를 움직이게 한다. “미적 취향과 윤리적 선호가 여전히 종교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 있는 경우, 가령 이슬람의 교세가 매우 강한 지역을 우리는 예로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안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내적인 응집력을 요구받으며, 사람들은 기꺼이 그러한 요구를 수행할 자세와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일부 유대교나 이슬람교 지역에서 맥도날드를 안 먹고, 메이저리그를 보지 않는 관행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세속화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는 사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기도 하다. (아마 이 점에서 브루스가 연구의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에게 물론 ‘신화’는 있다. 역사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영광의 시대’ 즈음으로 생각해본다면 정벌과 승전(勝戰)의 상징들인 역대 왕, 혹은 장군들의 이름이 군함에 붙여져 있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시대적 저항을 상기시키진 못한다. 근대 이후 식민화의 과정에 저항을 했던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가 북한에서는 제 1종교로 대접을 받으나, 우리나라에서는 4대 종단 안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세속화의 진행과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서일 것이다. 그나마 있는 그 정서도 오늘날에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브루스의 사례들에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는 것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다종교성 풍토를 대비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브루스는 ‘현상 유지 종교’와 ‘저항 종교’들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지와 저항’에서 보더라도 그는 긴 논의의 마무리로 종교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종교가 작용하는 것과 맞물려 있고, 제목 <거룩한 테러>에도 잘 어울린다. 그는 갈등주의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채택하여 종교의 저항운동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혁명운동과 반혁명운동(이는 17세기 서구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으로 살펴볼 수 있다.)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본다. 사례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190쪽의 한 구절이다.


  “역설적이게도, 성공이나 실패 어떤 쪽도 혁명 종교에게 종말을 고한다. 봉기에 실패하면, 혁명 종교는 다시 저항 종교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성공하면, 혁명 종교는 권력 장악에 도움을 준 집단에게 봉사하는 새로운 현상 유지 종교가 된다.


  회의론자들은 종교의 한계로 위의 메커니즘을 든다. (물론 그들이 드는 한계란 종교의 신이 제각각 다르고, 배타적이며, 때론 지나치게 권위적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각종 비난을 아우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이 표현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론 개인적 편견을 위한 관례적 근거일 때가 있다.) 결국 이익 싸움이라는 것이다. 브루스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고 수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결과가 바뀌지 않을 진단인 것처럼도 보인다. 종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는 여러 비판이 붙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의 삶을 고양시키는 정도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이를 피터 버거는 ‘종교의 사사화’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외려 종교가 강화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이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근본주의’와 분리주의에 종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경우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종교의 객관적 분석과 현상의 판단은 그 때문에 더욱 요구된다. 비록 우리가 브루스의 책에 오를 정도의 심각한 갈등을 겪진 않았지만 종파 간 갈등이 산재해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사례들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깊이 배울 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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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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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읽기 힘든 책이다. “힘들다.”가 마냥 부정적으로 들리는 요즘 풍토에 저런 표현으로 리뷰를 여는 것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봤으나, 정직하게 말해 이 책은 정말 읽기 힘들다. 뜻이 난해해 독서를 중단하게 되는 부류의 책은 아니다. 윤상욱氏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로 아프리카의 심장을 관통한 저자이다. 사려 깊다. 그만큼 독자의 부담은 줄어든다. 그러나 책은 그저 읽고 그치는 수준의 단순한 ‘앎의 벗’이 아니다. 좋든 싫든 책은 우리에게 아픔과 상흔을 남긴다. 그것은 앎 이상의 것이다. 동기가 되고, 그로부터 어떤 행동을 유발하며, 그 행동이 한 사람의 평균적인 몫보다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길 수도 있다.


  이런 역할은 대개 ‘문제작’이라 불리는 책들이 도맡아했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비판적으로 동참하게 되고, 독서의 순간만큼은 너도 나도 미간을 찡그리며 마음의 무게를 버텨본다. 하나라도 피해간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겁쟁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고 해서 뿌듯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책들은 자신을 다 읽고 덮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어떤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지난주까지 연속되는 발표, 시험, 리포트 따위에 시달린 까닭도 있겠으나, 나의 리뷰가 늦어진 까닭(거의 한 달을 이 책만 붙잡고 있었으니)은 무거워진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는 소심한 핑계를 슬쩍 글에 얹어본다.


  어떤 바이러스가 있다. 병증이 다양한 ‘사회적 바이러스’라고 부르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이형(異形)과 변종을 통해 아프리카 각 지역들에 숱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발병의 빈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문가들의 통계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보도되는 중동 어느 곳의 폭탄테러사건을 볼 때마다 “중동은 왜 만날 저 모양이야?”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혀를 차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에게도 비슷한 시선을 보낸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몇몇 부정적 대명사들이 선명하다. 제 3자에게 아프리카 긍정론을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땅은 드넓지만 대개 농경에 부적합한 사막과 정글로 이뤄져 있고, 지하자원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지만 그것은 곧 검은 돈을 낳으며, 점차 민주화되어가는 추세라지만 그곳의 ‘더위’는 미풍(微風)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팬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각한 것은 그 중 대다수의 문제들이 아무리 을러도 숨통을 죄어오는 맹수를 앞에 둔 상황처럼 곧장 생사를 가를 급박함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윤상욱氏는 그 문제들이 언제 어디서부터 야기되었는지, 왜 지금도 그 문제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지 역사적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고자 여러 장(場)에 걸쳐 반복과 강조를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1장에서는 그의 표현대로 ‘미아(迷兒)’나 다름없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뭉뚱그려나마 파악해보고, 2장과 3장에서는 빈곤과 독재를, 4장에서는 폭력을 야기하는 두 거대 종교를 고발한다. 문제는 이것들이 다 “따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유기적이라는 진리가 이런 때에는 참 잔인한 말 같다. 5장에서 약간의 긍정론을 내비치지만 단정 짓기 좋아하는 몇몇 독자들은 (속된 표현으로) “뭐 이런 망해가는 집구석이 다 있나?”라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관론은 사치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는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면 된다. 필요하다면 검색하는 것도 좋다. 때문에 굳이 이 자리를 구실 삼아 “나 이만큼 읽고 알았다.”고 자랑할 거리가 되진 못한다. 한편으로 나는 그들의 문제를 알고, 고통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함께 모색하는 것이 세계인의 자세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자세에는 공허함이 있다. 우리가 도심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화려한 부품’처럼 생활하는 중 지구 반대편의 어느 곳에서는 집단테러, 강간, 방화, 소년병 양성, 말도 안 되는 종교전쟁, 나라의 예산을 횡령한 ‘왕’ 같은 대통령이 판을 친다고 해서 나에게 저 사막의 뜨거움이 체감되진 않는다.


  ‘검은 대륙’의 빈곤과 기아를 위해 모금과 봉사활동을 하자는 홍보 요원들의 미소와 손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곧 도착할 버스들의 번호를 확인한다. 다반사이다. 지적 태만을 책을 통해 해소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未)행동’의 죄목을 가진 우리에 대한 판결을 유예시킬 만한 긍정적 요인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케케묵은 이런 표현으로 늘 반성만 하고 마는 내가 과연 이 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첫 삽을 뜰 때부터 나는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리뷰가 거짓말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시리아에서는 또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 중 나는 나이지리아의 난사테러를 전해 들었다. 한 쪽은 독재자를 몰아내려는 재스민 혁명의 후발 사태가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고, 다른 한 쪽은 너무나도 빈번했던 두 거대 종교 간의 무력 싸움이다. 이들 국가에는 못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권력자의 힘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크고, 에리히 프롬의 말마따나 ‘전제형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은 인간에게 신이 아닌 죽음을 남겨놓고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사자인 양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이 국민을 위한 국가인가? 무엇이 인간을 위한 종교인가? 민주화와 세속화라면 세계적으로 손에 꼽힐 정도로 빠르게 달성(물론 그 후속 진통을 묵과할 수는 없겠지만)한 우리나라에서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그럴 역량이 없다. 이를 두고 “아프리카인들은 멍청하니까.”라며 구시대적 ‘악플’을 다는 몇몇 몰상식한 사람들에게 윤상욱氏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요목조목 설명해준다. 그 부분에서 독자들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것이다. 그들이 자력으로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생명권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날은 적어도 반세기 내에는 찾아오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론이 그들의 서술형 답안지를 가득 채울 것이다. 부실한 국가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아프리카의 막대한 자원을 수입할 수 있는 강대국들의 전략적 외교가 이 비관론을 현실적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낡은 아프리카식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며 언젠가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낙관론을 조심스럽게 꺼내든다. 내전이 줄어 그들이 남긴 자해(自害)의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물 것이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현실감각들로 대체되기 시작할 것이다. 혁명의 여파로 독재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고, 교육의 기회와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들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할 것이며, 그로부터 국민들의 갈라진 정체성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정당한 정치인이 선출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지위가 상승하면 그들이 달고 있던 꼬리표는 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긍정적 역사의 흐름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저자의 작업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가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책날개에는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모순과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해결책이 없다. 9할이 문제에 대한 지적이고, 1할이 그나마 몇몇 긍정론의 사례 언급이다. 미미한 수준의 변화로부터 희망의 불씨를 목도하려면 약간의 관심만 가지고 뉴스 기사 몇 개만 시간의 흐름별로 분석해보면 된다. 그런데 그 불씨의 무게가 무거운 비관을 한 쪽 팔에 얹고 있는, 아니 무거운 비관에 한 쪽 팔이 짓눌린 저울의 평형을 되찾을 수 있을 만한 것인가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저자는 그것에 답하지 못한다. 실전에서 활약 중인 국제단체의 수뇌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저자가 거둔 절반의 성공이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책의 의미를 높이 사야 한다. 바로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감정은 추상적이고 감성적 차원의 동정심에 머무르고” 마는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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