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07.04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3권]

 


  미치오 카쿠 박사가 출연한 BBC 다큐멘터리


  그의 질문에 답한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우리의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기꺼이 마시겠다는 사람들은,
  “I’m happy right now. So yes, I guess I would drink this elixir of life.”
  “Sure, Absolutely. I like life and er, I’d be quite happy to live an awful lot more of it.”
  “I think it would be great. I think the problem is, humans die too soon.”
  이라고 대답했고, 마시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Too sad when all my loved ones pass, too sad when my world disappears. Already I’m sick of everything.”
  “It’d be so boring to live forever. It would just be awful I think.”
  “I’d rather die really. I think that what makes life so worthy is that at the end we die, we all go.”
  라고 대답했다.

  노년의 미치오 박사는 “Sure.”이라고 말한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굉장히 많은,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다지 밀착되지 못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Sure.”이라고 답할 때의 애티튜드와 그의 것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무엇을 바라든, 타인들이 회고할 ‘나의 마지막 순간’은 다가온다. 죽음은 우리에게 시간을 줬고, 시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의 여정을 알려준다. 톨킨이 불사의 ‘엘프’를 상상하고, 롤링이 ‘마법사의 돌’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도, 우리는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을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진정한 주제이다. 비장하면서도 서늘한 것.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원제 : The Dying Game)>는 그것을 다룬다. 얼마간 나의 새벽을 두렵게, 착잡하게, 때론 슬프게, 그리고 흥미롭게 만든 이 책을 덮어 서재에 꽂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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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죽음’과 관련해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진중권氏의 <춤추는 죽음(1997)>이다. 순전히 미술공부를 목적으로 산 그의 수많은 책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부보다는 감상이 앞서게 된 책이었다. 지금껏 기억하는 죽음의 에피소드들을 거칠게 펼쳐놓고 보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도상분석이나 문화적 지식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뭉크와 케테 콜비츠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조란 무직(1909~2005, ‘고통’의 대명사인 슬로베니아 출신 화가)과 펠릭스 누스바움(1904~1994,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계 화가)은 또 어떠한가. 그들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죽음은 나에게 있어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비극의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감상의 자세는 흐트러지고, 나는 그렇게도 괴로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 중 하나인 <명탐정 코난>이라든지, 최근 열풍 그 자체인 ‘미드 수사물’들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이다. 이들 픽션의 공통점은 죽음의 비극이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은 픽션의 모티프가 된다. 냉철한 판단이 죽음의 원인을 쫓아가고, 사람들은 죽음의 또 다른 형태를 목격하게 된다. 혹은 매력적인 픽션에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의 의미를 발견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유형을 분류하기에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체험’은 무척 다양하고, 인상적이며, 또한 순일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체로 기억하는 죽음은 죽음이 갖고 있는 수많은 의미들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멜라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시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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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왜 이 책의 제목을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로 했는지 모르겠으나(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의 원제는 ‘The Dying Game’이다. 그냥 ‘다잉 게임’이라고 써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멜라니는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진 않는다.), 공교롭게도 정작 멜라니는 무려 1장에서부터 6장까지를 ‘시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사례 언급에 할애했다. 상상력은 좋은데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의 독서에 다소 지장이 있을 사례들, 하지만 나름 자신이 담대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울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남아권의 영화(아마 태국이 아니었을까?)로 기억하는데, 한 여자가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있었다. 산 채로 매장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자고 일어났더니 관 속에 있게 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까 두려워한다. ‘조기매장 공포증’이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형태의 두려움은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를 양분으로 삼아 괴담의 탈을 쓰고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괴담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멜라니가 2장을 통해 “사망의 정확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의학의 허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진단으로 의학계에서 ‘사망 공식화’를 선언하는 순간은 시반(livor mortis)이라고 한다. 멜라니에 따르면 이는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 “눈과 혀는 튀어나오고 입술이 퉁퉁 부어오르며 가슴과 생식기도 부푸는(43쪽)”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애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땅 속에 묻힌 시신이라고 해서 늘 유족들의 바람대로 평온하게 있지는 못한다. 도굴과 이장(移葬)의 사례를 살펴보면 산 자들의 횡포가 때론 극악무도한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묻힌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시체”들에서 장기만 적출하여 밀거래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음모론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정권에서는 시위탄압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고문으로 숨진 이들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대량으로 넘기기도 했다.


  시신은 정치적 목적으로도 이용된다. 5장 ‘발전하는 미라 제작술’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레닌의 시신을 40일 더 보존할 수 있게 요청(123쪽)한 스탈린의 일화였다. 이는 마오쩌둥, 김일성, 그리고 최근의 김정일에게도 해당된다. 사람은 죽은 후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28시간 내에 부풀어 오른다. 박테리아가 만든 가스 때문이다. 사회주의 정권들의 ‘인민’들은 그들이 우상화했던 지도자의 시신에 의사들이 엄청난 양의 화학물질을 투여해 인위적으로, 마치 ‘살아 있는 시신’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얼마 전 전공세미나 강의의 과제로 <변강쇠가>와 관련된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변강쇠의 아내가 되는 옹녀는 열다섯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매해 서방을 잃어(이를 ‘청상살’이라고 부른다.) 내쫓긴 신세가 된다. 변강쇠와는 길가에서 만난 사이이다. 이미 이 대목에서 옛 사람들은 “변강쇠, 저 놈도 죽을 목숨이구만.” 했을 것이다. 물론 변강쇠는 진짜 죽는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오늘날 학자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그 다음인데, 바로 옹녀의 치상(治喪)이다. 옹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여인이 아니다. 변강쇠의 상만 치를 수 있다면 어떤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다는 심보로 거리에 나앉아 온갖 교태를 부리며 애긍히도 운다. 결국 걸려든 남자들은 다 죽는다. 서양의 팜므파탈보다 가히 더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옹녀처럼 발칙한 치상하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나, 추모의 정도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 예전보다 크게 감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의 인권 신장,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의 폭발적인 증가, 바빠진 현대사회의 일상,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유행 등이 여러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별난 추모들도 있다. 타지마할이나 진시황릉의 경우처럼 절대 권력자들이나 소유할 수 있었을 규모의 추모 공간을 요즘의 신흥자본가들이 모방하는 사례가 있다. 멜라니는 그 중 ‘니콜라스 반 후그스트라텐’이라는 한 실업가를 소개했는데, 그는 엄청난 규모의 영묘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이룩한 것은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모두 가져갈 것입니다.(185쪽)


  전 세계적으로 내세를 믿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서구식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이 세계가 끝이 아닐 것이다.”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다음 생애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은 무병장수의 기원과 사실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내세가 있으니, 사람들 중에는 이베이를 통해 영혼을 팔겠다는 이도 있고, 고인들에게 기원하는 이들도 있다. 대사부(흔히 말하는 ‘면죄부’의 가톨릭 용어)를 비싼 돈 주고 사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던 유럽인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지난 주, 연대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에 교문 쪽을 바라봤는데, “불신지옥!”을 크게 붙여놓은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공자의 말, “未能事人, 焉能事鬼(사람을 섬길 줄 모르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세의 매력은 세속적이기까지 하다.


  9장과 10장은 현대적 의미의 죽음을 다룬다. 수사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볼 수 있는 사례들이 많고, 10장에서는 ‘죽음의 시작’을 찾아내려는 현대의학의 노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고 알고 있지만 심폐소생술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현대 의학은 “심폐 기능보다는 신경학적 기능을 기준으로 사망을 판정(257쪽)”한다. 아마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안락사의 윤리적 문제와 같은 난제와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소극적 안락사만이 법원의 사례별 판단(일명 ‘김 할머니’사건, 기억날 것이다.)에 따라 허용될 뿐, 안락사를 입법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죄가 적용된다.


  이처럼 의학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영생에의 욕망’이 거의 달성될 것처럼 보인다면 인간은 더 심각한 윤리적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장이 지구의 동력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경제관에 따르자면 우리는 인위적으로 무병장수하게 되고, 때때로는 복제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다볼 수 없는, 불명확한 미래에 대해 우리가 갖는 공포 그 자체이진 않을까? 죽음은 어쩌면 인간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공을, 중력이 지배하는 것처럼 우리를 지배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죽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고쳐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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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할 만한 책이군요. 예전에도 인문책 리뷰어분 리뷰를 여기말고 다른 블로그에서 읽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는데..그나저나 저는 인문학책은 사놓고도 거의 읽지도 않으면서 >.<

열한 권은 모르겠고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의도적으로)읽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늘 자극이 돼요, 탕기님은.
비가 남부지방으로 내려왔네요, 시원해서 좋긴 한데, 뭐든 지나칠까봐 걱정이에요. :)

탕기 2012-07-07 00:37   좋아요 0 | URL
죽음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덜 상기시킨다는 점에서는, 가벼운 책이기도 해요.
일단 멜라니가 소개해주는 많은 사례들이 충분히 흥미로워요.

음. 인문학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들이 평소에는 좋고,
방학이면 집중할 시간이 있으니까 어려운 책도 좋은 것 같아요.
파농 읽겠다고 한 것도 그런 때문이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