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테러 -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성찰
브루스 링컨 지음, 김윤성 옮김 / 돌베개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2012.06.27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유난히 까무잡잡한 친구를 ‘오사마’나 ‘빈 라덴’이라 부르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덩치 큰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뉴스 속보를 봤었다.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새벽 4시가 넘도록 ‘Breaking News’를 보다가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두 채의 빌딩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중 3이었다.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우리나라 63빌딩도 무너질 것이라, 미국이 패망할 것이라고 나돌던, 일명 “카더라.” 통신의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도, 무너지지도, 패망하지도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그나마 책과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그것도 겨우 곁가지를 잡는 수준이겠지만) 서구 對 아랍의 대결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슬람의 연이은 혁명들도 이슬람 스스로의 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명을 달리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기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테러의 공포를 줬다. 미국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이냐를 두고 對 이슬람 정책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롬니는 전형적인 우파. 이스라엘의 지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가 당선된다면 이슬람과의 대치는 심화될 것이다. 반면, 오바마는 아랍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등 중동 관계에 있어 개방적이다. 또한 종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견지한다. 아마 젊은 시절 체험한 인문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최근 나는 찰스 타운센드의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한겨레출판)>을 읽고 있다. 때문에 9.11을 두고 ‘테러’가 아닌 ‘사건’이라 부르고자 한다. ‘종교, 폭력, 평화’라는 강의를 통해 내게 종교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김명희 교수께서도 9.11을 두고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서구적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두고 反美라고 하면 곤란하다.) 브루스 링컨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책 <거룩한 테러>의 부제도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대한 성찰”이다. 역자 김윤성氏도 ‘9.11 공격’이라는 표현을 쓴다.


  종교갈등이나 종교현상에 관해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의 특징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또 하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을 모아 보면 <거룩한 테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엘리아데에게서 지도를 받은 브루스가 9.11 사건을 상징체계들의 충돌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9.11 사건을 음모론으로만 흔히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알려주는 또 다른 의미는 현재 서구 대 아랍의 대치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여러 종교들의 갈등 양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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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적 분석으로 시작하는 초반부(서문도 상당히 중요하다.)에서 브루스는 종교를 담론, 실천, 공동체, 그리고 제도로 나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모하메드 아타(‘모하메드 엘아미르 아와드 엘사예드’라고도 불린다. 9.11 사건 당시 비행기에서 공격을 주도한 인물이다.)의 지령서를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소위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공격하는데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브루스는 이를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의문”에 부치는 상징으로 봤고, 찰스 타운센드는 그의 (앞서 언급한)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을 통해 그것이 테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테러는 전쟁과는 달리 물리에 호소하는 바보다는 심리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분명 담론의 힘이다. 모하메드 아타의 지령서 배후에는 ‘쿠란의 담론’이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힐리야(‘무지(無知)’라는 뜻으로, 알라를 따르지 않는 시대를 의미한다.)와 대립되었던 것과, 9.11 사건의 오늘날에 알카에다를 비롯한 여러 반미 계열의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들과 일부 이슬람주의자(이는 브루스의 용어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이다.)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자힐리야’와 대립하고 있는 유사한 구도를 도출할 수 있다.


  9.11 사건의 물리적 힘이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TV 모니터나 컴퓨터 스크린으로 수도 없이 봤고(혹은 노출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상기할 수 있는 그 시각적 충격은 기본적으로는 물리적 힘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충격은 대치하고 있는 나라의 당사자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브루스의 용어대로라면 ‘기호 가치(sign value)’로 여겨지지 않을 확률이 크다. 9.11 사건의 위협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극소수의 음모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위협은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나라 개신교의 무리한 아랍 선교로 몇 차례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9.11 사건과 관련된 보복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9.11 사건의 기호가치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브루스가 2장을 통틀어 비교한 부시와 빈 라덴의 연설 차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자타(自他)의 구분을 통해 (그들)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권력 간 카르텔 형성은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은 지하드(聖戰)의 개념(실제 ‘지하드’의 개념은 여러 층위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서는 ‘칼의 지하드’를, 즉 ‘정벌’ 개념의 지하드를 의미한다.)을 통해 이슬람 방식의 ‘평화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만의 사정이 아니다.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 시도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들의 문명을 전 세계에 심어주고자 했다.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성격의 폭주기관차이기도 하다.


  흔히 기독교를 일컬어 ‘역사의 종교’라 말한다. 역사적인 종교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를 종교로 해석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라는 뜻이다. 가령 심각한 가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심이 약해졌거나, 종교적으로 비도덕적인 일을 일삼았거나, 혹은 십계명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위 “유치한 생각”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주요 종교인 미국에서는 9.11 사건을 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7~80년대 TV 선교를 통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팔웰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사용한 방식이 바로 저러한 해석 체계였다. 브루스도 그것을 분석틀에 넣어 살펴본다.

 

  만약 종교로 작금의 고난이나, 혹은 일부 ‘승리’라 일컬어지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종교의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표현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영향력과 관련해서 브루스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하나의 장(章)을 할애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가 이 장에서 제시하는 개념은 최소주의-최대주의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의 개념 정리가 아니다. 바로 후기식민사회에서 최소주의가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서구 열강들은 최소주의(이것을 신자유주의와 이음동의어도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것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를 통해 소위 ‘근대화’나 ‘서구화’와 같은 가치들을 해당 사회에 심어준다. 브루스의 표현대로 그것은 곧 번영과 성취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적 경향들이 그 사회를 움직이게 한다. “미적 취향과 윤리적 선호가 여전히 종교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 있는 경우, 가령 이슬람의 교세가 매우 강한 지역을 우리는 예로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안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내적인 응집력을 요구받으며, 사람들은 기꺼이 그러한 요구를 수행할 자세와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일부 유대교나 이슬람교 지역에서 맥도날드를 안 먹고, 메이저리그를 보지 않는 관행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세속화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는 사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기도 하다. (아마 이 점에서 브루스가 연구의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에게 물론 ‘신화’는 있다. 역사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영광의 시대’ 즈음으로 생각해본다면 정벌과 승전(勝戰)의 상징들인 역대 왕, 혹은 장군들의 이름이 군함에 붙여져 있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시대적 저항을 상기시키진 못한다. 근대 이후 식민화의 과정에 저항을 했던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가 북한에서는 제 1종교로 대접을 받으나, 우리나라에서는 4대 종단 안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세속화의 진행과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서일 것이다. 그나마 있는 그 정서도 오늘날에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브루스의 사례들에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는 것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다종교성 풍토를 대비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브루스는 ‘현상 유지 종교’와 ‘저항 종교’들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지와 저항’에서 보더라도 그는 긴 논의의 마무리로 종교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종교가 작용하는 것과 맞물려 있고, 제목 <거룩한 테러>에도 잘 어울린다. 그는 갈등주의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채택하여 종교의 저항운동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혁명운동과 반혁명운동(이는 17세기 서구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으로 살펴볼 수 있다.)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본다. 사례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190쪽의 한 구절이다.


  “역설적이게도, 성공이나 실패 어떤 쪽도 혁명 종교에게 종말을 고한다. 봉기에 실패하면, 혁명 종교는 다시 저항 종교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성공하면, 혁명 종교는 권력 장악에 도움을 준 집단에게 봉사하는 새로운 현상 유지 종교가 된다.


  회의론자들은 종교의 한계로 위의 메커니즘을 든다. (물론 그들이 드는 한계란 종교의 신이 제각각 다르고, 배타적이며, 때론 지나치게 권위적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각종 비난을 아우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이 표현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론 개인적 편견을 위한 관례적 근거일 때가 있다.) 결국 이익 싸움이라는 것이다. 브루스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고 수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결과가 바뀌지 않을 진단인 것처럼도 보인다. 종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는 여러 비판이 붙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의 삶을 고양시키는 정도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이를 피터 버거는 ‘종교의 사사화’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외려 종교가 강화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이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근본주의’와 분리주의에 종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경우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종교의 객관적 분석과 현상의 판단은 그 때문에 더욱 요구된다. 비록 우리가 브루스의 책에 오를 정도의 심각한 갈등을 겪진 않았지만 종파 간 갈등이 산재해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사례들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깊이 배울 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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