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2012.08.22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0권]

 

 

  이 책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라 표기)>에 대한 11인의 심도 있는 비평을 담고 있다. 샌델의 논의들 중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부분들은 직접 인용한 저자가 많고, <정의>의 주요 논점들이 적절히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샌델의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의 경우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심도 있는 비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의 인내를 바란다. 이면지에 낙서를 해가며 하루를 꼬박 쏟아 부어 진득하게 읽긴 했지만, 리뷰를 적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지금 생각해보니 어딘가 체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한다는 <정의>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그처럼 쉬우면 쉽지 그보다 어렵진 않을 것이다.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다. 문제에 대한 공감의식이 대안모색의 첫걸음이다. 이 책은 ‘샌델’이라는 시대의 화두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 중요한 계기에 대한 시의적절한 탐색이므로 11인의 발언은 ‘샌델 다음’을 고민하려는 세대들에게 신기 좋은 운동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리뷰가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것도, 몇 안 되는 리뷰어들에게 미리 알려야겠다. 지면이 난삽하면 안 되니 이현우氏의 비평글까지만 고스란히 옮기고, 이어지는 비평문들은 모두 '접은 글'로 처리하고자 한다.

 

 

1. 정의 없는 사회는 왜 정의를 욕망하는가? (이택광氏)
  이택광氏가 대표로 포문을 연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샌델의 <정의>가 선진국 담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정치집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도 한 몫 한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크게 실망하고 있는 건 작금의 사실이다. 나는 언젠가 박가분氏의 ‘붉은 서재’에서 바디우에 관한 그의 입문서를 읽다가 (얄팍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바가 있어) 문득 지젝이 떠올라 그에게 대중운동의 단편성(이건 지젝의 진단)과 ‘사유의 힘(이건 바디우의 개념)’의 부족을 연관해 생각하던 중 “이 시대 대중운동들이 너무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라 힘을 못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절반만 동의한다면서 나머지 ‘절반’을 동의하지 못하는 까닭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봤다. 뭘 주장하든 의회를 통과해야 (내가 쉽게 이해한 바로는) ‘씨알’이 먹힌다는 뜻이다. 운동의 성공은 결국 ‘대의(代議)’의 문을 통과했느냐 못했느냐의 여부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는 그 후 오랜 동안 그의 생각대로 대의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경험도 했다. 투표가 극명한 예이다. 소위 “찍고 싶은 사람 없어도 차선으로 찍어야 하는”, 한 유명 드라마의 대사대로라면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골라내는 것이 투표”가 되는 현실은 아무래도 보다 면밀히 심문해볼 필요가 있는 죄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대안을 찾아보는 것이 나의 역량으로는 힘들었던 차에 마침 ‘환경윤리’라는 테마의 교양강의에서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대안(여러 의결주의들)들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래서 나는 기말평가 답안지에 그것들을 우리가 정말 실현할 ‘가능성’이 있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는 뉘앙스와 함께 약간의 희망을 적어냈다. 아무래도 ‘다양성’이라는 것이 이 면에서는 큰 장애물이었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택광氏는 “포기할 수 없는 개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표”인 정의, 그리고 “개인을 인내하게 만드는” 대의민주주의를 각각 진단한다. 둘 사이에는 겉보기에도 척력이 있다. 진정한 정의가 수용될 공간이 한국 사회에 마련되어 있기는 한 것일까? 그 상태에서 <정의>가 유행한 것일까? 그보다는 ‘정의없음’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택광氏의 주장이다.

 

 

 

2.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 (장정일氏)
  매우 간략하고 직접적인 글로 장정일氏는 정의를 법에 위탁한다는 것 자체로 <정의>는 반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에서 샌델이 설명한 것처럼 롤스의 <정의론>은 법의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정말 중립적인지는 - 나는 법 전공자가 아니므로 다른 이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는데 - 잘 모르겠으나, 장정일氏의 주장대로 법이 고착적, 집권적, 지배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에 비해 정의의 모습은 훨씬 동적이다. “정의가 움직일 때 법은 패퇴하게 되어 있다.”는 그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중요한 건 정의이다. 정의가 법에게 위탁되면 정의를 위해 법에 대항했던 지난 투쟁의 역사는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정의를 도덕적, 종교적 가치로 형성해야 한다는 샌델의 주장에도 장정일氏는 ‘태클’을 거는데, 부족한 식견이지만 나 역시 이 태클에 동참하고픈 생각이다. 여러 강의와 책들을 통해 접한 종교사회학을 비롯해 특히 르네 지라르의 진단은 종교적 가치로부터 윤리를 떼어놓아야 하는 정당성을 매한가지로 옹호하고 지지했었다. 자본주의가 한 오랜 작업도 그것이었다. 물론 윤리를 개인에게 귀착시킴과 동시에 개인을 자본의 권력관계 속에 넣은 것이 문제였지만. 여하튼 샌델의 논의를 정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 이면의 ‘종교적 가치의 폭력성’을 생각하지 못한 우를 범하게 된다. 그를 지지하면 “종교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3. 도덕적 사고의 변증법과 한국사회 (이현우氏)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로쟈’로 기억되는 이현우氏는 <정의>가 왜 유행했는지를 네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 이어 ‘옮음’과 ‘좋음’을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어떻게 저울질하는가를 샌델을 요약하면서 알려준다. 또한 샌델이 공동체주의(혹은 공화주의)를 도출하는 과정과 그의 ‘공공철학’이 무엇인지까지 설명해준다. 자세한 철학 이야기는 독자 각자가 정리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 게재할 거리는 되지 못하는 듯하다.


  철학자들의 전차문제(Trolley Problem)가 샌델의 <정의>에서 언급되어 화제가 된 바, 이현우氏는 그 문제가 가진 공리주의적, 그리고 칸트주의적 함의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주의가 도덕적 죄의식의 기원에 따른 진화적 본성을 지녔다는 진화심리학의 학설을 피터 싱어의 인용문과 함께 곁들였다는 것이다. 싱어가 과학기술사회의 공리주의적 입장을 반영한다면 샌델은 그저 도덕 원칙만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샌델의 논의는 뒤이은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때론 가시적으로 공격받기도 하나, 이현우氏는 그러한 도덕판단의 공론화가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회의주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다.”고 해야 옳을 수도 있다. 그가 인용한 김용철 변호사의 저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구절은 회의론의 진수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그럼에도 이현우氏는 “나는 아직도 우리에겐 더 많은 도덕적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쪽에 걸고 싶다.”며 희망을 피력한다.

 

 

4. 공공철학의 여정 -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양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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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해설과 논쟁거리의 사고로 이뤄진 이양수氏의 이 글은 앞선 글들보다 훨씬 길고 더 자세하다. (뒤이은 두 편의 글도 모두 길다.) 부제대로 자유주의에서 공화주의로 이행되는 철학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표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권을 의미하는 듯하나, 실은 자유가 개인과 집단의 층위에서 모두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일이 일어난다. 근대의 작금이 그러하듯. 국가가 강조되고, 개인에게는 희생이 요구된다. 국가를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사고 중 하나이므로(혹은 ‘였으므로’) 우리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칸트주의자들이 도덕적 오류라고 반박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롤스의 <정의론>이 나왔다고 한다.

 


  이양수氏는 롤스의 <정의론>을 요약한 뒤, 샌델이 그것을 비판한 지점을 설명한다. 그 배경은 1960~90년대 미국이 ‘절차적 공화국’(나는 이걸 ‘기계적 공화국’이라 이해했는데, 크게 벗어난 이해는 아닌 듯하다.)으로 만든 여러 폐해들이다. 이론은 칸트인데, 실행은 롤스의 의무론으로 국가의 중립성과 ‘옳음(the right)’의 중립성을 준수한다. 전문가가 중시되고, 도덕논란의 회피되며, 시민들은 추상적 시민권을 갖는다. 공화주의는 여기서 출발하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민권은 법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열정’이다. 이 열정은 애국심과 다르지 않다.

 


  샌델이 직접 공화주의를 시대이념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그런 뉘앙스를 아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샌델의 말은 그렇게 해석된다. 여하튼 그가 강조한 바는 ‘적극적 선의 개입’이고, 이로써 시민들은 절차적 공화국으로부터 그들이 소유해야 마땅한 시민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양수氏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가 귀한 손님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도 자유주의를 비판한 (그것도 보수적인) 공화주의자의 논의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건 역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가 그다지 논의된 바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양수氏는 우리의 유교이념을 토대로 개혁적 성향과 권위주의적 성향을 공공철학의 주제로 삼자고 살며시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공공철학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밀려드는 서구 이론을 해석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유교 개혁자들이 생각했던 만큼 사회 기반을 흔들어놓을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바 없다. 체계적인 개혁의 부재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재현하려는 욕구로 분출된다. (pg.106)

 


  자유주의의 한계는 법적 인정이 자아정체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공평한 자아정체성은 ‘재단된 자아’라는 섬뜩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졌고, 공평한 수준 이상의 풍부함을 가졌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중립적 법이 아닌 현실참여만이 ‘나’의 가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샌델은 그래서 열정적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라 말한다. 그러나 이건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다. 배경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과 로마의 공화정 전통은 그들에게 ‘회귀’할 기점이라도 마련해주지, 우리는 아주 없다. 이 점이 샌델을 텍스트 자체로 파악하지 않았을 때, 즉 콘텍스트를 고려해서 봤을 때 우리가 그에게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자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공화주의로부터 배울 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의 전환이다. 이양수氏는 그것이 그동안 정의를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했던, 혹은 관심이 없었던 우리 사회에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독자)가 변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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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샌델 풍으로 한국사회 읽기 (김도균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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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정의담론이 갖춰야 하는 4요소(무엇을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누가 배분하는가?)를 설명한 김도균氏는 이어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적인 것의 배분’을 곁들여 무의미한 소음이 의미 있는 말이 되는, 즉 ‘담론화’되는 과정을 알려준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이 했던 작업과 비슷하게 샌델의 <정의>에 포함된 여러 ‘정의론’들을 포괄적으로 소개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론’에 언급된 절차, 배경, 결과의 공정성이, 즉 ‘정당한 불평등’이 과연 정의의 대원칙에 합치한가를 묻는다. 그보다는 롤스의 <정의론>이 훨씬 합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롤스는 재능은 공동자산이므로 노력한 만큼만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샌델은 이 점에서 롤스에게 감탄했다고 한다. 단, 비판도 한다. 그 예는 모병제에 대한 각 진영의 관점 차이와 샌델의 루소 인용(“공동선에 봉사하는 일이 시민의 으뜸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순간, 또 그것을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는 순간, 그 정치공동체의 몰락이 가까워진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은 직접 샌델을 정리해보며 그를 아주 단순하게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은 ‘공동선>공정성>시장가치’가 될 것이고.

 


  또 하나 샌델의 개념 중 중요한 것은 바로 ‘텔로스’이다. 대체로 “적격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캘리의 사례(pg.150~151)’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로렌스 대 텍사스 판결’은 샌델이 도덕 판단이 결여된 판례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부작용(오해와 편견)을 야기하는지 날카롭게 판단한 사례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서 말한 ‘절차적 공화국’이 비판되고, 실질적 도덕 판단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과연 우리의 사례는 어떨까? 김도균氏의 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네 가지 판결 사례는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 사례, 양심적 병역거부, 군대 내 불온서적 소지 금지 등의 사례가 어떻게 정정되거나 고수되는지는 도덕 판단의 중요성을 우리의 사례로 직접 파악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도균氏는 이러한 장점 외에 샌델의 단점 역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한다며 글을 마친다. 그에 따르면 샌델의 공화주의로는 재화분배, 국제인권, 복지론 등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공동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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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비판 (최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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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앞선 김도균氏의 글, 그리고 후에 언급할 박가분氏의 글과 함께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은 다른 것들에 비해 길지만 요는 “샌델은 그리스적 정의관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샌델이 공동선을 도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갔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들에게는 샌델 고유의 한계이자 지적되어야 할 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쿠스의 설전이 실린 플라톤의 <국가> 1권을 예로 들며 최원氏는 고대 그리스의 정의관이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를 극복하며 등장했다면서 샌델이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호메로스의 관점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호메로스의 ‘영웅사회’라는 관점이 잘못된 점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샌델의 공동선 추구와 고대 그리스의 정의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주장에 흠집을 내진 않는다.) 최원氏의 첫 번째 지적으로 이미 샌델의 주장은 설득력을 조금 잃어버린다.


  그의 두 번째 지적은 샌델이 <정의>에 언급한 도덕적 딜레마의 사례, 앞서 말한 ‘전차문제’이다. 편리를 위해 임의로 나는 선로변경기가 있는 사례를 A라 부르고, 소위 ‘뚱뚱보’가 있는 사례를 B라 부르겠는데, 최원氏는 두 사례 사이에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A는 상황이 강제되어 있으므로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B는 ‘뚱뚱보’가 알아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나’는 보다 능동적이다. 샌델은 수단이 도구(선로변경기)이냐 사람(뚱뚱보)이냐의 차이를 강조했지만 최원氏는 그건 주된 차이가 아니며, 오히려 A와 B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샌델이 주권자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가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차문제의 또 다른 층위에는 ‘대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건 정치형태와도 연결되므로 중요한 문제인데, 최원氏는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과두정과 민주정의 사이, 그러나 민주정에 더 가까운 형태의 통치)와 플라톤(철학왕의 통치)의 차이를 소개하기 위해 긴 설명을 시작한다. (두 철학자가 각각 상이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플라톤은 “누가 지배하는가?”를 중시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화두로 삼았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나, 두 철학자 모두 당대의 ‘계급투쟁’의 문제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꼭 필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는 샌델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고대 그리스에 ‘꽃피었었다는’ 환상을 깨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샌델의 논의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해 ‘동일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는 점에서 이 사회의 다양성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혹은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약점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샌델의 주장은 민족국가가 강성했을 때 등장했으니, 대안 공동체(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운명공동체’를 예로 들었으나, 자세히는 모르겠다.)를 생각할 기회는 되겠으나 그 자체를 정답이라 여기면 곤란하다는 것이 최원氏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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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의가 돈이라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한국사회 (박홍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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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글이다. 그는 왜 현대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주 모시듯”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다가 강력한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점들을 하나 둘 공개한다. 비시민계급과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에서 그리스의 자유 포기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결국 그리스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며, 비시민을 제외한 정의는 전체적, 부분적, 또한 분배적 정의일 수도 없으며, 부분적 정의 속에 있는 시정, 분배, 교환 등의 개념에는 모두 ‘등가교환’이 있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고자 한 말은 “돈이 정의이다.”, 즉 ‘화폐만능론’이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 담은 골자들이다.


  얼마나 공격적인지는 이 대목을 옮겨놓으면 될 듯하다.
  “출판 대국이니, 전국민 대졸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느니, 대부분 대학에 철학과가 있다느니 하는데도 그 유명한 디오게네스를 알 수 있는 책 한 권 없다니 너무 디오게네스하다. 너무 개같다. 개판이다.(pg.267)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편에 선 디오게네스와 그를 둘러싼 얄팍한 역사에 대한 아쉬움으로 그는 플라톤의 제자에 대한 독설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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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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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태氏는 샌델의 ‘공동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는 ‘타자(他者)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며, 그 해결은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의>를 읽으면서 윤리적 딜레마를 즐기는 잔인한 행태(초법적 주권자가 되어보는 짜릿함이라고 할까?)를 꼬집는다.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pg.277)


  내가 괄호 속에 ‘초법적 주권자’라 적은 것은 노정태氏의 지적인데, 그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인용문을 부득이하게 적어놓아야 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pg.282)


  이 말인즉, 우리는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정의의 딜레마를 보는데, 샌델이 그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든 ‘아프간 사례’에서는 미군의 눈이 중심이 되면 소년을 죽이는 것 ‘따위’는 전혀 딜레마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행위주체가 초법적 주권자로 한정된 샌델의 토론은 노정태氏의 표현대로라면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하는 선택과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이 샌델의 사례실험이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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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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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글은 나에게 상당히 어려워서 두 번에 걸쳐 읽고 이면지에 정리했으나, 위의 글들에 대한 리뷰처럼 나의 생각을 보태 정리할 능력이 나에게 없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내가 그의 글에서 얻은 여러 정보들 중 자의적 판단으로나마 중요하다 여긴 것들을 나름의 생각으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을 갖고 태어난다. 비판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말마따나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pg.292)”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의 관계를 보자는 것이다.


  먼저 자유주의는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놓았다. 이걸 도운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종교에서 윤리를 떨어뜨려놓고, 개인에게 위치시켰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주권적이면서도 억압적이다. 서동진氏는 윤리가 바로 저 차이의 협곡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사실 이 형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그의 글에 없다.) 이렇게 형성된 정의의 윤리는 자유주의가 물질화시킨다. 자유주의자들은 논증을 통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궁극적인 낙관주의를 모토로 활동했다. 이어진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리콜’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 ‘리콜’될 수 있을까? 서동진氏가 윤리적 규범의 실현이라는 ‘리콜’로 예로 든 대표적인 것은 ‘감사(audit)’이다. 회계감사할 때의 그 감사. 이것이 전지구적 규범이 되어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는 회사이든 정부이든 NGO이든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일반적 원리’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바로 이 ‘감사’가 갖고 있는 투명성에 있다. 난공불락처럼 보인다.


  역사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회국가(복지국가)가 주권적 개인의 집단인 ‘연대’의 윤리를 통해 자유주의를 재구성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공격했고, 이번에는 신자유주의가 앞서 말한 ‘감사’를 새로운 윤리의 카드로 내세운다. (이 ‘감사’에는 ‘책무성’의 척도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회계와 밀접하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정의의 윤리를 넘어서려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밖에 없다고 서동진氏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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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주주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단호하게 정의의 편에 설 것인가! (박가분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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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밝혔듯이 나는 이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지적한 유일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중립적이기에 누구의 정의도 될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로 무력(알랭 바디우의 주장, 참고로 박가분氏는 그의 블로그에 적은 바처럼 바디우를 가장 존경한다.)하다는 것, 제도가 아니라는 것, 근대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 재차 강조된다. 그리고 결정타, “대중을 분노케 하지 않는 정치”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스피노자의 인용문에서 독자들은 ‘민주주의’라는 풍선을 펑 터뜨리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자본주의와의 연동인데, 사실 연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 그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등장과 함께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가분氏는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지역은 민주주의를 재난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종합해보면 반(反)민주주의적 정서는 반(反)화폐경제의 정서와 맥락이 같다.


  이 지점에서 박가분氏는 계급에 대해 묻는데, 그 근거는 근대정치의 두 기본틀이 민주주의와 계급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매우 신선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의 대신 민주주의를 물어봤던 것은 계급을 말하거나 사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지난 우리 사회의 아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혹 정의가 질문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 수준은 ‘고상한 담론’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급적 조건 속에서야말로 ‘정의’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물음들이 비로소 그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p.326)


  박가분氏는 정의가 플라톤의 말마따나 때론 ‘문답무용(問答無用)’의 강력한 특징을 지닌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정의 자신을 둘러싼 논쟁들에게 붙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정의는 민주주의와 ‘경쟁’해야 할 처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선택지를 눈앞에 둔 셈이다. 민주주의와 정의 중 ‘알맞은 것’을 선택하시오.


  샌델은 민주주의를 <정의>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에게 신선했던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정의만을 말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그러나 <정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정의가 실체(그는 그것을 ‘날것’이라 표현했는데)를 드러내면 그것은 계급적 분노와 테러리즘의 형태일 것이며, 공동체는 그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박가분氏는 조심스럽게 샌델의 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 살짝 불러보며 글을 마친다.

펼친 부분 접기 ▲

 

 

 

마치며
  이상의 논의들을 하루 만에 소화하는 것은 벅찬 일이었고, 사실 이 리뷰도 순전한 나의 공부를 목적으로, 그리고 소화제 역할을 하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쓴 것이었다. <정의>를 둘러싼 텍스트들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비평계의 기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조만간 여러 책들을 곁들여 읽을 생각에 급한 대로 리뷰와 그에 대한 나의 짤막한 생각들을 적어봤다.


  마지막 글로 이권우氏의 독서문화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 앞선 글들과는 다르며, 마무리하는 글로 적당한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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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김대행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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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9권]

 

 

  지금은 웃고 지나갈 추억이나, 나는 중학생 때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는 꿈을 꿨었다. 무엇이 문학을 그리도 쉽게 보게 했는지, 혹 문학을 일상처럼 여기게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나는 글을 퍽 많이 쓰고 지웠다. 문학비평이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려운 기법 같은 것을 공부하지도 않은 채, 나는 글로 일상을 실험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접하고 배울수록 나는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

 

  벽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벽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없다.”고 선언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시를 마지막으로 쓴 날은 입대 이틀 전이었다. 벌써 7년 전이다.


  국문학과는 고등학교 시절의 꿈 때문에 지원했었다. 주변에서 ‘문학소년’이라 불러주는 것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이 길이 아니다.”라고 단언해버렸는데, 내가 음미하던 문학의 묘미를 학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건 카뮈의 <이방인>이나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단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이라는 까닭에 사들어 - 고등학생의 어린 머리와 부족한 경험, 방어적인 감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 문학의 벽을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상처를 줬다. 그 길을 4년이나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거의 자폐적 방황의 길로 빠뜨렸다.


  시간이 지나니까 내성은 생기더라.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참을성’도, 물론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조금씩 생긴다. 학기 내내 부모님께 “다시 태어나면 국문과 절대 안 갈 거예요.”라고 투정을 하면서도, 국어교사이신 두 분의 여러 조언을 받아가며 정말 ‘꾸역꾸역’ 공부했고 다행이도 성과는 좋았다. 그래도 여전한 시각(혹은 편견)은 남아 있다. 비평은 문학의 양파껍질을 한 꺼풀 벗기는 작업이 아니라, 문학을 양파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어려운 이론을 공부할 때는 쉬운 책을 곁들여 줘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쉬운’이라는 형용사가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까운’이라는 형용사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기회를 김대행氏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   *   *

 


  이 책이 유명한지는 모르겠다. (물론 국문학계에서 저자의 명성은 높다. 수능 총감독을 한 적도 있는데, 사실 그보다는 시조 연구가 유명하다.) 약간 촌스러운 겉표지에, 역시 약간 촌스러운 폰트. “재미있고 쉽게 풀이한 교양강좌”라는 노골적인 선전문구도 그렇고, 약간 누렇게 바란 속지들을 보니, …, 그런데 이 책은 대체 언제부터 내 방에 있었던 것일까. 펼쳐보니 군데군데 얼핏 기억나는 구절들도 있다. 위로받은 흔적들이다.


  “중뿔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뭐니 하는 난삽한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것도 실상에 어긋난다. 우리는 농부의 모내기 소리도 문학이라고 하고, 자손에게 전한 집안 어른의 내력을 적은 것도 문학이라고 했는데, 요즘에 와서 조금 선을 긋고 칸을 지어서 구분하려고 한다고 이해하면 그만이다.(p.226)


  이런 말도 있다. 문학이 ‘거짓말’이라는 이론의 설명이다.


  “문학의 이런 성격을 두고 의사진술(pseudo-statement)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유명해진 이가 리처즈(I. A. Richards)라는 사람이고, 문학 용어를 풀이하는 책을 보면 이 용어에 대해 자세히 설명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런 일로 밥을 먹는 평론가나 학자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의사진술이라는 말은 결국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문학은 거짓말이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p.115)


  그가 쓴 논문이, 아마 읽어볼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국문학도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와 같이 쉽진 않다. 그러나 이따금 비평이라고 해서 인터넷에 돌아다니거나 책으로 나온 것들 - 그것도 “쉽다.”는 것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가 광고로 들어가 있는 것들 - 을 보면 소위 ‘대중서’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저자 개인이나 저자가 속한 집단, 혹은 학계의 지적수준을 뽐내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어려운 말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아예’ 안 썼다. 이런 종류의 책들을 문학팬들은 마땅히 반겨야 할 것이지만 많이 읽은 이들일수록 어려운 비평에 유혹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상위 독자’와 ‘그렇고 그런 독자’의 층위를 나눈다. 어느새 우리나라의 비뚤어진 ‘문학 문화’는 롤랑 바르트, 라캉, 고진 등을 알아야 문학에 대한 글을 번듯이 내놓을 수 있는 풍경을 만들었다.


  물론 누구나 작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작가가 발표한 작품들 중에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든지 어린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수준의 것이 간혹 있기도 하다.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러나 창작과 소통이 다소 제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수용’은 그보다 훨씬 넓은 운신의 폭을 갖는다. 나에게 어렵다면 그것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거나 지식을 갖춘 후에 다시 읽으면 되는 것이고, 나에게 알맞다면 그것이 별 인기가 없는 작품이거나 혹 ‘유아용 책’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비평들이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문학은 목소리를 가질 기회를 번번이 잃고 있다.


  “우리 살아가는 확인이 문학으로 가능하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밤새 안녕’을 묻듯이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사하리라.(p.237)


  문학은 생각보다 간단한 기능을 갖고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건 거의 구분이 없는 거대한 물질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장르구분이나 ‘작가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시인이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시를 쓰면 ‘시인이며 소설가’, 혹은 ‘소설가이며 시인’인데, 둘은 전혀 다르지 않고, 여기에 그들이 문학비평까지 한다면 ‘시인이며 소설가, 그리고 비평가’인데 말이 너무 길어서 ‘작가이며 비평가’라고 한다. ‘시인이며 소설가’가 곧 ‘작가’인 셈이다. 하지만 김대행氏의 말마따나 일기도 문학이니, 이건 정말 복잡한 일이 된다. 이러한 ‘구분 없음’이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저자는 그것이 옳다고 말한다. 미술로 예를 들자면 중세시대에는 수도승들이 필사(筆寫)도 했고, 그림도 그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수도승이며 필사가이고, 또한 화가”라고 하진 않는다. 그땐 거의 다 그랬으니까.


  더군다나 문학이 ‘자기표현의 길’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학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있는 셈이다. 나는 미술블로그를 할 적에 몇몇 주변 분들과의 추억을 만들려고 “여러분이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메일로 보내주세요.”라는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웃분들이 메일에 “글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서…”라는 겸손의 추신을 달아주셨다. 그 말이 사실일수도 있다. 바쁜 중에 정말로 글을 별로 써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이라는 것에 대한 왜곡된 정의가 있다. 뭔가 갖춰야 할 것 같은.


  김대행氏는 작가의 모습을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엉덩이의 수술 자국”이라 말한다. 글은 치부를 드러낸다. (혹 그것이 보통 용기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결정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창피한 일일수도 있다. 글에는 허점투성이가 많아 굳이 분석해 따지려는 이가 있으면 우리의 대부분은 언제든지 약점을 잡힐 수가 있다.


  그러나 글쓰기란 원래 그런 작업이다. 다 보여주는 것, 혹은 일부라도 보여주는 것. 그건 문을 여는 행위이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놓은’ 상태이다. 공감과 형상화의 언어로 되어 있는 그 방, 혹은 건물의 바깥은 우리가 체험할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을 저마다의 눈으로 보는 연습이 저 어려운 이론을 섭렵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어울리는 일이 될 것이다. 어려운 건 나중에 해도 된다.


  “문학을 우리 일상 속으로 가져오는 데 주저가 없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 학자의 삶을 산 저자의 이 마지막 문장에는 어떤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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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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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깊이에의 강요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줄곧 가져왔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일까?” 아니, 더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나는 과연 작가들의 작품에 별점이나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소위 ‘Old Masters’라고, 19세기 이전의 위대한 화가들의 명부가 마치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올라오는 리스트처럼 작성된 것이 있다. 미술을 잘 몰라도 일단 들어보면 다들 기억해낼 수 있는 이름들이 그 위에 적혀 있다.


  이런 질문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피카소의 (이 점이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이 마티스의 (이 점 또한 중요하다.) “알아보기 힘든” 작품들에 비해 높거나 낮은 평가를 받을 근거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예술의 가치는 뒤샹의 놀라운 시도(변기)로 붕괴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담겨져 있는 내용이나 창작과정의 기발함이 중요하다면 이제 형태는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고, 색감이나 선 따위, 그러니까 보수적인 미술사가들이 지금까지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미술의 기본요소들은 ‘기본’에서 ‘부차’적 요소로 강등당한 상태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이 우리에게 ‘다른 눈’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박탈감을 느끼면서라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론 그들도 이미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피카소도, 마티스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알게 된 것들 중, 이건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데, ‘가치의 해체’ 혹은 ‘역전’은 오히려 우리가 미술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이러니이다. 미술은 분명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기성의 가치를 해체시킨 것이라면 누구나 한 작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 (혹은 발견해내야만 한다.) 따라서 ‘평가’라는 것은 판단기준 중 하나, 즉 기껏해야 참고자료 정도일 뿐, 개인판단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지금까지 현대미술이 해온 작업이 바로 그거다.


  그런데 ‘깊이에의 강요’라니! 나는 쥐스킨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그 신선함에 놀라곤 하나, 이번에는 그 사건의 ‘생생함’에 놀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신선한 소재라고 하면 <향수>에 버금갈 만한 것은 없을 테니까. 아, 이 단편집의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도 독특한 소재를 갖고 있다.)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특정한 비평이 나의 가슴을 걸레 짜듯 비틀어버렸다.


  저와 같은 비평은 비평 속에 개인적 취향이 굳게 자리 잡아 있거나, 때론 말 못할 지적 권력이라든지 실제 미술계에 뿌리내린 관행의 권력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을 때에 더욱 확고해지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웬만한 양심적인 비평가들은 그들이 작품을 판단할 미적 가치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자살케 했던 비평가와 같은 적나라한 글은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마지막 비평을 읽고 못내 분개한 까닭은 “더 많이 안다.”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뻔뻔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욕설 있는 악플이 좋다. 반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틀을 갖춘 듯 하고 호사한 언변으로 치장된 ‘악평’은, 만약 피해자가 그보다 나은 합리와 논리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면(그리고 대부분이 그런 경우인데), 피해자를 단순한 좌절이 아닌 ‘그녀의 선택(자살)’을 스스로가 계획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승리
  누구나 공격적인 삶을 한 번은 꿈꿔볼 것이다. 고리타분한 것에 대항해서 “당신은 별로 재미가 없어!”라고 소리치고도 싶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소시민들이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나, 정의로운 영웅들이 나오는 히어로 무비들을 보면서 뭔가 대단한 것을 얻은 양 잰 채 해보기도 하고,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오히려 그것이 희열을 배가시키는데) 쥐스킨트의 <승리>에 나오는 구경꾼들처럼 젊은이가 무모한 체스를 두는 것을 감동적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저 늙은 체스꾼이 더 이상 체스를 두지 않기로 한 것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저 구경꾼들이 결국 젊은이의 패배로 끝난 이 체스판을 등지고 각자 저녁을 먹으러 돌아갔다는 것이다. 영웅이 죽어도, 혹은 우리가 영웅이라 여겼는데 실제 영웅은 아니었던 이가 죽어도, 일상은 남아 있다. 언제나 드라마이고, 언제나 혁명인 삶은 없다. 이 점이 우리가 ‘승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다.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
  이 단편은 <향수>의 느낌을 줬다.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기발한 착상에 거의 속아버릴 뻔 했을 즈음에 쥐스킨트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우리 몸이 늙을수록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이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조언들이 어느덧 나에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상한 세계를 보여줬다. 전 세계의 하늘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전 세계의 하늘을 관찰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자신이, 그러니까 장인 뮈사르가 여태껏 파온 땅에서 모두 조개화석이 나왔기에 전 지구가 조개화석으로 이뤄져 있다는 (이상한) 논리는 정말이지 사실인 것만 같았다.


 “진실의 얼굴은 소름 끼치고, 메두사의 머리처럼 그것을 본 사람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이든 끊임없는 탐구의 결과이든 일단 그것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사람은, 휴식과 위로가 없어도, 아무도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사실 누구나 알겠지만 이건 궤변이다. 저런 말은 지구가 조개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을 유일무이의 진리로 선언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 번은, 아니 적어도 두 세 번은 정말로 뮈사르의 말에 설득 당했다는 까닭에 나는 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과연 선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대학에서 조금 배웠으므로 세상의 진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대강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뉴턴에서 양자역학까지는 적어도 조금이나마 생생한 편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비록 중요하긴 하더라도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관절 나는 무슨 이유로 그것들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 내가 이런 지식들을 쌓아가는 동안 뇌의 반대편에는 지혜가 쌓여갔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란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선언이라 해도 좋다. 진리를 입증하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세상이고, 아예 입증하지 않고도 뭔가를 진리라 맹신하는 이들이 그보다 훨씬 많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소위 “되도 않는” 말 따위로 여겨진다면 뮈사르의 주장이 순도 100%의 거짓말일 가능성을 그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 “세상은 불로 이뤄져 있다.”라든지 “세상은 숫자로 이뤄져 있다.”라는, 철학사상 대단히 중요한 발견 중 몇 가지로 치부되는 선언의 ‘진리형상화’와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따라서 진지한 독자라면 모두 뮈사르의 말에 (이 단편은 정말 짧으므로) 잠시나마 주목하면서 솔깃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현명해서이다.

 

 

 

[에세이] 문학적 건망증
  지금껏 읽은 에세이 중에서 가장 시원한 글. 나는 분명 졸문인 이 리뷰를 얼마 안 가서 잊고 말 것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 서재에 꽂혀, 더러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내용을 짐작이라도 하느냐고 나를 쳐다보는데, 문제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음악의 멜로디나 회화의 색감은 얼마나 잘 기억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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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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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8권]

 

 

  문장들은 확신에 차 있었고, 나는 읽는 내내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한 세기도 전에 계획한 감시체계의 일부가 지금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어 그에게서 예언자와 같은 느낌을 아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초상화 속 인상을 꼭 닮은 강한 글이 <파놉티콘>이라는 짧은 책 속에 압축되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도 파놉티콘 건설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두 뺨으로 눈물을 흘렸다. 평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그를 아는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탈감도 대단히 컸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엄격했던 그는 ‘교화가 가능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감옥을 통해 영국 사회에 큰 이득을 주려고 했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은 역으로 당시 사회가 변변치 못한 형벌개혁에 못마땅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벤담은 수감자들의 신체형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들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수감자들은 신체의 고통은 적은 엄격한 삶을 통해 교육받을 것이고, 감옥은 사회적 이득의 원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프랑스에서는 왕정복고로 인해, 영국에서는 사업실패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후 파놉티콘은 조금씩 변형되었고, 오늘날 우리는 숫자와 코드로만 이뤄져 있는 개개인의 인터넷 정보들이 거대회사나 정부에게 감시당하는 이른바 ‘수퍼파놉티콘’ 사회에 살고 있다.


  신건수氏가 옮긴 이 책 <파놉티콘>은 뒤몽의 도움으로 프랑스 국회에 제출된 것, 즉 벤담의 ‘프로포설’이기 때문에 자세한 계획보다는 파놉티콘의 효과와 기능, 그리고 벤담의 설득이 주를 이룬다. 반면 영국판에는 세부적인 내용들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판은 직설적인 어투로 이뤄져 있다. B6용지 약 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설득력은 대단히 높다.


  이 책의 구성은 대략 ‘파놉티콘의 장점’, ‘감옥의 3원칙’, ‘파놉티콘 관리의 10원칙’으로 나눠볼 수 있다. 신건수氏의 해제 <파놉티콘과 근대 유토피아>는 이 책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후대의 평가를 담고 있으므로 일독해야 하는 부분이다.

 

 

 

*    *    *

 

 

  파놉티콘 최고의 장점은 ‘감시’라는 통제에 있다. 감시는 직접적으로 신체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다. 대신 “범죄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책임자는 간수와 죄수를 감시하고, 간수는 죄수를 감시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수도 죄수를 감시해야 한다. “악을 고발하거나 공범자가 되어 고통을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벤담은 우리가 말하는 소위 ‘방관죄’나 ‘연좌제’ 등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그 어떤 죄악이 이를 피해갈 수 있겠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은 ‘도덕극장’이다. 어떻게 감옥이 도덕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벤담은 신체형이 적은 대신 생활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효율적인 감옥을 계획한다. 고통은 완화되고, 위안과 쾌락에 기초한 노동일과가 있으며, “감옥은 하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벤담의 ‘교육론’에 따라 독서, 글쓰기, 산수, 음악, 그림그리기 등이 실시되는데, 특히 산수는 노동에 이로운 교육이라 여겨졌다.


  중요한 것은 벤담이 이러한 감옥을 정부가 아닌 기업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공리주의자이다. 경제적인 효율을 중시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의 적(敵)은 공금횡령과 태만인데, 이는 사립·사설기업과의 계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공적정신은 느슨해진다.”라는 대목에서 그의 자유방임주의적 입장이 드러난다.

 

  “계획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관리자들이 늘어나면 여러 조치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하고 의견 불일치를 가져오며 관계자 사이의 길고 힘든 전투 후에 가장 강하고 고집불통인 사람만이 전장의 승리자로 남게 된다.”


  이렇듯 감옥이 계약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 1 관리원칙이다. (2원칙은 ‘성별격리’이고) 세 번째 원칙은 ‘격리’이다. “반만 썩은 것이 완전히 썩은 것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마 죄수들을 개개인별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담은 완전고립을 통해 반성이나 회개를 이룰 수 있느냐는 질문에 회의를 느꼈고, 그보다는 오히려 고립이 절망과 광기를 불러올 수 있음을 강조했다.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영화 <쇼생크 탈출> 등 작중 인물들이 ‘독방’에 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벤담은 이 점을 이용, 아홉 번째 원칙에서는 ‘고립의 벌’로 악질의 죄수들을 공동체에서 잠시 격리시키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네 번째 원칙은 노동에 관한 것으로 노동이 위안과 쾌락을 준다는 점을 활용한 대목이고, 다섯 번째의 것은 조금 독특하다. 죄수들이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음식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음식의 질은 위에서 말한 ‘엄격성’의 원칙에 따라 빈민계층 이상의 수준이 되진 못한다. 여섯 번째는 의복에 관한 원칙인데, 새삼 기발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죄수들이 탈옥했을 때 “나는 죄수가 아닙니다.”라고 발뺌할 수 없도록 소매 길이가 각각 다른 옷을 입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른팔과 왼팔이 각각 뙤약볕에 탄 길이가 다를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생과 건강에 관련된 일곱 번째 원칙은 “청결에 대한 세심한 정성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벤담의 생각에 기초한다. 야외운동기구로 오늘날 런닝머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트레밀’이 응용된 점이 흥미롭다. 한편 벤담은 수감자들의 취침시간을 7~8시간 이내로 고정해야 게으름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덟 번째 원칙은 교육과 주말의 활용에 관한 것으로 그가 교육방식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홉 번째 원칙은 징벌. 앞서 말한 ‘독방’이나 ‘연좌제’가 이에 해당한다. 연좌제는 만약 열 명이 있다면 “한 명이 나머지 아홉 명에 대응되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매우 훌륭한 감시체계라고 생각했다. 석방준비와 관련된 열 번째 원칙에서 그는 교화된 죄수를 육·해군에 복무시키고 식민지로 이주할 기회를 주는 방법, 석방된 수감자를 책임질 보증인을 구하는 방법 등을 제시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석방대상자는 처벌기간을 연장해 거의 수도원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보조시설에 수용하는 방법도 있다.

 

 

 

*   *   *

 


  벤담 이전의 형벌체계는 주먹구구식이었다. 국내 감옥들이 수용한계에 시달리면 정부는 죄수들을 식민지로 보냈다.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 이송된 죄수들은 사실 그 나라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일파만파 전염되는 악영향이 있었다. 호주의 경우에는 80여 년간 이송된 죄수의 수만 해도 13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를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봐서 “왜 감옥들에 죄수가 많아졌는가?”를 물어볼 수도 있다. 이 책의 해제에는 그 배경이 소개되어 있다. 간략히 말해,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예전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행위들이 ‘경범죄’라는 죄목 하에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용되면 간수들이 교육해야 하는 것은 노동의 가치나 경제질서 같은 것이었으며, 엄밀히 말해 중범죄자들에게 부여되는 ‘도덕함양의 의무’ 같은 것은 해당되는 사례가 드물었다. 이 점이 바로 벤담이 말한 ‘감옥의 학교화’에 해당할 것이다.


  신건수氏의 해제에는 푸코의 파놉티콘 분석이 있어 더불어 읽어보기 좋다. 푸코의 사상을 알거나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를 읽어본 이라면 벤담의 파놉티콘 속에 들어 있는 근대권력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작용’되고 ‘생산’되는 것이라는 구절은, 푸코를 모르는 이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소설 <1984>, 학교의 운동장, CCTV. 우리는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통제의 사회’에 살고 있다. “Sees all.”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과 같은 중앙감시자, 혹은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와 같은 존재가 없는 대신, 감시의 그물망이 분산되어 있는 현대사회. 우리는 사실 감시되길 원치 않으나, 정보를 제공하면 혜택을 주겠다는 여러 기업들의 상술에 기꺼이 “넘어가며”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는 역설적인 현대인. 하지만 역으로 다수가 1인을 감시할 수 있어 권력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이른바 ‘시놉티콘’이라는 현대정치의 형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고전(古典)으로 치부되는 <파놉티콘>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파놉티콘’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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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 생체 리듬을 무시하고 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
틸 뢰네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8.16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7권]

 

 

  저번 학기, 아직 추위가 제법 있던 어느 날에 나는 아침부터 K문고로 가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는 시집을 하나 사들고 학교로 갔다. 두고두고 읽었는데, 마지막 시가 유독 울림이 컸다. <아직>이라는 시이다. 시의 긴 부제로 놓고 보면 이 시는 ‘사랑 때문에 죽는 이’가 없는 세상을 향한 슬픈 탄식이다.


  그런데 내게 울림을 준 구절은 따로 있었다. “여러 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쉼보르스카가 떠올랐다. 새삼 나는 “왜 나는 벤자민 버튼처럼 거꾸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라는 아쉬운 생각을 했다. 미치오 카쿠 박사가 출연한 BBC 다큐멘터리


  그러나 만족스러운 적은 없었다. 미련이 있었다. 시간에 대해 미련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미련이 남을 잘못을 일정 수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개운하게 일어나고, 나에게 맞는 시간대로 활동하고, 조금씩 무언가를 거둬드리고, 어두워지면 가벼운 피곤함을 거부하지 않으며 잠이 드는 하루라면, 그렇다, 시간에의 미련은 애당초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리드미컬한 삶이 건강하다는 건 당연지사. 나의 생활은 아무런 조(調)도 없고, 아무런 박(拍)도 없는 실험적 음악과 비슷하다.


  틸 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원제 : Wie Wir Ticken)>은 정확히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책이 나에게 반성과 자책, 그리고 위로를 줄 것은 제목에서부터 짐작했다. 이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뢰네베르크는 대뜸 시간 앞에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위로부터 한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예찬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새벽 4~5시에 기상하는 심한 종달새들은 극소수인 데 반해 그 시간까지 잠들지 않는 올빼미들은 그보다 더 많다. 그리하여 일찍 일어난 종달새들이 숲에 나타나기 전에 아직 잠들지 않은 올빼미들이 버섯을 모두 가로채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조금 극단적인 듯하나, 다시 말해 ‘새벽잠 없는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빗댄 것이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은 시간에 순서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시간에 순서가 있을까? 새벽 1시와 밤 11시 사이에는 과연 어떤 ‘순서’가 있을까? 시간은 순환한다. 따라서 순서는 없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저자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는 서로 다른 관념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설명으로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예찬’을 거부한다.


  이어지는 여러 실험들은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생소한 용어들을 차치한다면 뢰네베르크의 설명은 쉽고 친절한 편이다. 각 장마다 반복되는 설명들도 있어 그의 말마따나 이 책을 중간 정도까지 읽으면 이미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흥미로운 사례들도 이 책의 무게를 한층 덜어준다.


  수면박탈, 수면금지구역(각성유지구역), 동시진행, 체내시계, SCN, 서캐디안 리듬체계, 동조의 원칙 등의 용어들을 통해 “무엇이 우리를 잠들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독자들은 이어지는 글에서 현대산업사회의 ‘사회적 시차증’ 문제를 접해야 한다. 이 개념은 현대인의 대다수가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부분이라 우리에게 마치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중부유럽인의 40%가 약 2시간 정도의 사회적 시차증을 갖고 있으며, 이는 체내시간과 외부시간 간 3시간 정도의 차이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중부유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간 체계에 따라 사는 동안 동쪽으로 2~3시간 떨어져 있는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하는 ‘무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대표적인 것이 흡연)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간도 동물과 같아서 체내시계가 태양에 맞춰져 있다. 뢰네베르크는 “태양이 문화에 선행한다.”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양을 따라 살지 않는다. 동물은 분명 빛과 어둠이 체내시계의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반면 인간은 자명종이 체내시계를 대신한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때에 일어나고, 자야 할 때에 깨어 있다. 동물들 중 대부분이 간헐적으로 잠을 자며, 특히 태양이 높게 떠 땅이 뜨거워졌을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잠을 잔다. 뇌가 뜨거우면 잠이 오고, 하품이 난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뜨거울 때에도 나가서 일을 한다. 지중해의 농부들이 만든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는 인간에게 유익하지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낮잠을 꾸준히 자는 사람들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아이들이다.


  낮에 빛을 많이 보고, 밤에 빛을 적게 보면 ‘빠른’ 시간유형의 사람이 된다. 이는 일찍 자고,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는 건강한 생활의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일과시간을 보통 실내에서 지내기 때문에 낮에 빛을 적게 보고, 밤에 빛을 많이 본다. 이것이 때때로 우리가 아주 피곤하더라도 잠이 오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낳는다. 여기에 열대야나 불면증까지 더해지면 그 날의 피로는 다음 주까지도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렇듯 그의 설명을 읽다보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 거스르는 것이 생각보다 많고,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뢰네베르크가 이 책을 통해 사회적 문제라 지적하는 두 가지는 이른 등교시간과 서머타임이다. 그는 일명 ‘덴마크 프로젝트’라는 것을 소개하는데, 이 생소한 프로젝트는 학생을 고객으로 여기며, 그들이 마음대로 등교하고 하교하도록 하는 실험적인 교육시스템을 일컫는다. 뢰네베르크는 ‘젊음’과 ‘야행성’의 연관관계를 실험적으로 밝힌 뒤, “10대들은 야행성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10대들에게는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아침 늦게 등교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권장될 수 있다는 말이다. 덴마크는 그 점을 알았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운영한 바 있다.


  서머타임에 저자가 반대하는 까닭은 앞서 언급한 사회적 시차증 때문이다. 서머타임은 “계절적 변화를 3주 정도 거스르는” 시스템이라서 “하루아침에 서쪽으로 15도 정도 여행해 그곳에 체류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머타임이 “1시간 더 일찍 출근하겠다는 집단적인 결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뢰네베르크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작업은 시간생물학의 연구사례, 개념, 그리고 결론을 쉽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결론’이란 연구결과가 사회적으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그는 마지막 장에서 “체내시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체내시계란  외부시간을 나에게 맞게끔 리모델링한 시간이다. 물론 이것은 유전되는 까닭에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라 (사람 살피는데 부주의한 면이 있는) 누군가에게는 병으로 여겨질 법한 점도 있다.


  하지만 뢰네베르크는 우리에게 “다양한 시간유형”이 있음을 강조한다. 체내시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시간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옮긴이도 그 점을 다시금 짚고 넘어간다. 아들이 어느 날 와서 그(옮긴이)에게 한다는 말이, 친한 친구 한 명은 아침에는 무반응이고 오후부터 웃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뢰네베르크의 책에서 얻은 지혜를 아들에게 들려줬다. 오해하지 말라고.


  이 책은 어쩌면 수많은 카운슬링 책들에 앞서 읽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기이해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시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단순한 효율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근사한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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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8-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 다큐멘터리가 '시간'에 대한 다큐..제가 봤던 그걸까요?

[벤자민-]을 영화도 책도 아직이라서 잘 모르겠고, 이 리뷰는 좀 어려운 걸요. 시간생물학도 생소하고요. 그나저나 모르면 댓글을 말던가 뭐하는 건지........( '')

미안요!

탕기 2012-08-20 00:09   좋아요 0 | URL
영생의 물약 먹을거냐고 카쿠 박사가 물어보던 그 다큐에요. 아마 맞지 않을까요?ㅎ
저도 이 책은 이해는 되는데 뭐라 리뷰 쓰기 참 어려웠어요. 사실 그다지 감명이 있다거나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