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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의 가치사전 -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2012.01.17

 

 

  나는 올해로 만 스물여섯이다. 보통이면 대학 졸업할 나이에 아직도 3학년이다. 국문학 전공은 나에게 여전히 맞지 않는 레고조각처럼 낯설기만 하다. 대학의 공부와 생활은 이모저모로 나의 기대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군대에 가서 생각을 정돈하기 전까지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핑계는 대지 않는다. 의지박약이었다. 그 때 쓴 글들은 모두 불살라버렸다. 때문에 나의 옛 글은 대학 초년생 무렵까지 썼던 시를 엮은 시집과 제대 이후의 글들로 확연히 구분이 된다. 얼마 전, 나는 이곳의 한 블로거와 함께 ‘자폐적 글쓰기’에 대해 코멘트를 나누다 응원을 하겠다는 요량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천편일률적 글쓰기보다 차라리 안으로 굽어진 글쓰기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나 역시 그 때가 무척이나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는 쉽게 지울 수 없다던가. 새벽녘 한창 예민해질 때에 나는 감성적 사유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의 존재가 그리도 두려운 것이다.


  자폐적일 때에는 쾌락도 추구하지 않는다. 반복적, 혹은 습관적 쾌락은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때문에 당시 나는 기쁜 적이 없었다. 무색, 무취, 아니면 건조된 육포 정도였다. 혈기왕성하지도 않았고, 나이에 걸맞은 패기도 없었다. 자폐적 글쓰기라는 것은 진정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몰랐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의욕적으로 생각했더라면 더 많은 성찰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빠진 물은 별로 깊지 않았었더라. 하지만 익사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굳이 군대가 아니었어도 물 밖으로 힘껏 뻗은 손으로 내가 원래 있던 곳의 공기를 한 줌 쥐어보고, “아, 저곳이다.”라고 외치며, 이윽고 큰 호흡과 함께 얼굴을 물 바깥으로 내밀 수도 있었다. 불교의 표현대로, 그것은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였다.


  손목을 꺾어 양면을 모두 본 어떤 사람의 책을 나는 몇 해 전 읽게 되었다.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서문을 읽자마자 잠시 책을 덮게 되는 그런 책 말이다. 저자도 기형도 시인의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시구를 나처럼 떠올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낙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쾌락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했다. 나는 하지 못한 것. 아,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픈 경험을 뒤로 하고, 나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장씩 읽어갈 때마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가 위로할 목적으로 책을 썼는가? 천만에! 하지만 나는 반가운 이 책의 속표지 위에 크게 사인을 하나 그려 넣었다. 날짜를 보니 2009년 6월 25일. 제대한 지 막 반년이 되가는 때였다. 그로부터 얻은 3년의 위안을 다 털어놓기에 이 자리는 너무 작진 않은가. <즐거움의 가치사전>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   *   *

 

 

  내가 읽은 박민영氏의 책은 <이즘>이 처음이었다. 미학을 공부할 때, 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심산으로 산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크게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는지, 나는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산 뒤 책장에 꽂고 나서야 비로소 의 저자가 바로 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둔감함이 준 뜻밖의 놀라움이라고 해야 하나. 독서에 애착을 갖게 하는 것들은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구나 싶었다. 사실 이런 반가움이 나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다. 쾌락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저명한 사례들을 근거로 펼쳐나가는 ‘박민영식(式)’의 명료한 문장은 든든한 벗이 되기에 충분하다.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글로써 배설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면 탐낼 만한 내공이 들어 있는 문장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관하리라.


  그가 적어놓은 항목들은 무척 많다. 따라서 전문적인 책이 아니다. 가령 이렇다. 근래 들어 읽고 있는 세 권의 책은 모두 심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도 10도>는 종교분쟁 중에서도 제목과 같은 ‘위도 10도’의 분쟁국가 사례를 토대로 한 현장감 넘치는 책이다. <과잉연결시대>는 <위도 10도>보다는 한결 쉽다. 인터넷을 체험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해할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은행들의 파산, 각종 금융사기, 리먼 브라더스 파산,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전문적인 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휴버먼의 자본론>은 제목에서 이미 전문성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사례와 개념을 검색해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Wikipedia와 Google을 화면에 띄워놓는다. 미술을 공부했을 때와 똑같다. 하지만 <즐거움의 가치사전>은 제각각 단편적 내용들의 옴니버스 형식이라 설명이 깊지도 않을뿐더러 전체적 맥락을 공유한다. 요컨대, ‘쾌락의 종합’이다. 주제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생각은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독자, 즉 생각의 주체와 말이다. ‘나’와 벗어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연결의 감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누구는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어 ‘신앙’의 장(章)에서 감명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감명을 받을 수는 없다. 저자는 인문주의자이다. 비판도 항상 견지한다. 그가 종교에 대해 한 말은 도킨스와 세이건이 그의 두꺼운 책에서 했던, 혹은 수많은 강의에서 했던 주장의 축약본이다. 따라서 박민영氏는 해당 챕터의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에게 문제를 재고하도록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더 공부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식으로 권력, 노동, 자유, 민족애, 독서, 미술, 스포츠, 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쇼핑, 섹스, 매춘, 동성애, 효도 등 우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관통한다. 독자는 저자의 노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왜 이런 생각들을 깊이 있게 해보지 않았던 것인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왜일까? 우리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질문의 대답은 박민영氏의 서문에 명료한 문장으로 적혀 있다. 부분만 발췌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한 문단을 통째로 옮겨보고자 한다. 분명한 만큼 당연한 말이다.


  “이 책의 집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자료 수집에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었다는 의미이다. 힘에 부치는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할 수 없는’ 작업 성격 때문이었다. 그것이 특정 분야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발언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에 불을 붙였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전문가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전문가는 결코 사회 전체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분업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두루 알려고 하는 이의 실천을 나는 주변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요리도 잘 하고, 첼로를 잘 켜며, 운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가 저명한 교수라면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다 잘해?”라며 놀라곤 한다. 여기에다 그가 생물학, 철학, 종교학 등에 모두 능통해 박사 학위를 무려 너덧 개 정도 지니고 있는 이면 놀람은 경외로 바뀐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우리는 정말 저 다양한 것들에 능통할 수 없는 사람들일까? 일부만 천재이거나, 일부만 탁월한 의지의 소유자라 ‘super-talent’의 경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은 소수의 특권일까?


  루트번슈타인 부부의 공저 <생각의 탄생>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책이었다. 박민영氏가 말한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란 <생각의 탄생>에서 줄기차게 주장된 ‘전인(全人)’이다. 단테와 알베르티가 그러했다. (참고하건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가 정의하는 ‘전인’이 아니다. 그는 언어적 능력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예술적 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며,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우리도 알듯이 역사 상 가장 탁월했던 인물 하나라 손꼽혀도 어색하지 않다.) 다방면에서 고루 뛰어나다는 것은 남들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저자가 1년이나 걸렸다고 했던 집필의 시간이 평생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와는 달리 ‘전공자’이다. 대학을 나온 이라면, 그리고 논문을 써본 이라면 전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항간에는 “직장 다닐 때에는 거의 쓸모없는 것” 정도로 회자되곤 하는 것. 그리하여 최근 대학에서는 미래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전공논문을 폐지하고 인문학 수강을 독려한다. 이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다른 책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으니, 중복은 되도록 피하겠다.


  두루 견문이 있어 시각이 넓다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인식에 대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장점일 것이다. “대중은 무지하다.”라는 말은 곧 “우리는 모두 전공자이다.”라는 말과 진배없는 것이지 않을까? 타인의 개입이 아니면 다른 분야의 것이 요구될 때 우리는 무능력자가 된다. 물론 세부적인 전공기술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추가 되는가를 묻는다면 가령 이렇다. 나의 일부 국문학적 지식이나 미술적 지식이 그것만으로 온전한 지식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삶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이것들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 관심의 사신들을 파견하고, 돌아온 그들로부터 견문을 얻어들은 뒤 모든 것을 종합해 각각의 것들을 ‘하이퍼링크’할 수 있는 역량은 전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박민영氏의 말마따나 그것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에서 나온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공자가 아닌 전인을 꿈꿔야 한다는 것도 일맥상통한 주장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얻어가야 하는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장과 그 장에서 설명된 사례들은 충분히 재미있다. 어렵지 않게 보따리에 넣을 수 있다. 얼마든지 대화와 작문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직접적인 도움도 되리라. 하지만 그건 저자의 집필의도에서 벗어난 독서에 그친 것이다. 비유해본다. A씨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전공자이다. B씨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C군은 막 흡연에 관한 전공논문을 쓰려는 대학원생이다. 이들을 ‘쾌락’이라는 큰 나무에 가지로써 삼고, 멀찌감치 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원경(遠境)을 조망하는 시선, 혹은 버드아이(Bird-eye)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쾌락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라는 만족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조금의 이해’에서 오는 만족감이 바로 전인이 될 수 있는 기로에 섰다는 생리적 반응이다. 더 나아갈 것인지는 독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박민영氏는 각 장마다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명언들을 남겨뒀다. 명언은 의지의 마약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저자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쓰고자 이 책을 남겼으나, 독자는 쾌락의 실체를 통해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려는 찰나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의 꿈이 샘솟는 소리가 나는 들린다.


  얼마 전, 나는 한 지인으로부터 카뮈가 그르니에의 책에 실어놓은 서문의 한 구절을 전해 들었다. 카뮈는 스무 살 무렵에 그르니에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회상했다. 훗날 그의 책을 읽을 독자들이 너무나도 부럽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에 담긴 저자의 진의, 그리고 쾌락의 다양함 속에서 각기 얻을 깨달음을 생각하며, 나는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이 카뮈만큼이나 부러워진다. 그들은 또 무엇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나의 것과 얼마나 다르고, 나는 그로부터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기쁨은 우주적이다. 몸에 갇혀 있지 않고, 정신을 뛰어넘고, 신의 '말씀'보다도 가까우며, 모든 것을 초월해 나의 온몸을 전율케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누가 이 책의 한 구절에서 무엇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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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8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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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사진출처] guardian.co.uk

 

 

  정확치 않은 기억으로는, 그 때는 아마 겨울이었다. 한창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소설을 읽겠노라고 벼르던 어린 시절. 카뮈, 가오싱젠, 쿳시, 그라스, 지드, 야스나리. 하지만 이들의 글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많은 것을 느끼기는커녕 나의 모자람만 반복적으로 확인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너무 앞당겨 경험한 기분. 처참하진 않았다. 동경은 오히려 커졌다. 단, 문제는 문학에의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 펜을 굴리며 잠시 공황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체력과 의지가 탁월하지 못한 나는 장애물을 만나면 한참을 머리로 씨름한다. 아니, 씨름만 한다. 문학에도 기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노벨문학상’이라는 후광만을 바라보다 제 눈 먼 줄을 모르게 된 꼴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동경한 것은 계속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끈을 만든다. 다행이도 나는 그 끈의 어느 즈음에서 유독 애착을 갖게 된 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알게 되었다. 십 수 명의 사람들과 차례대로 만나 멀찌감치 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누던 차에 어떤 단짝을 만난 기분이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   *   *

 

 

  무언가로부터 충격을 받아 어떤 잔상이 생기는 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솔제니친의 이 작품에서 나는 그 충격을 경험했다. 그것도 첫 장에서부터. 솔제니친은 구구절절 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소설을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두텁게 낀 성에가 소리를 돕는다. 곧바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 모든 낯선 상황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별 수고로움 없이 전개된다. 솔제니친이 직접 겪은 체험이 낳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낯섦’이 소설을 익는 내내 ‘익숙함’으로 변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요컨대, 본래 나는 슈호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일까? 노련한 솜씨로 취사부로부터 국을 네 그릇이나 빼돌리고 그 중 하나는 적어도 나에게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 사람 말이다. 어떤 경험으로도 이 책의 이야기를 공감하지 못한다. 수용소 생활을 직접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도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그러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때론 해군 중령 죄수처럼 영창 갈 걸 알면서도 대꾸를 해보거나, 아니면 저열한 페추코프처럼 킁킁거리면서 어디 콩고물 떨어진 곳은 없나 눈치만 살피는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일면들에 속속 자리를 잡는데, 단 한 사람만은 될 수 없을 듯하다. 반장 추린 말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은 전쟁터가 아닌 수용소에 더 적합한 말이지 않을까. 강한 자도 총을 맞으면 죽을 수 있으니. 반면, 솔제니친의 이 소설에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다.”라는 비공식적인 정답이 여러 죄수들의 행동과 입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나치게 정직하거나, 열심히 하거나, 혹은 도덕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눈치를 잘 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원 전체의 목숨을 좌우하는 반장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적절한 뇌물은 필수이다. 강하면 부러지는 곳이 다름 아닌 수용소이다. 형기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는(pg.76)” 이곳에서는 추위를 피하고, 먹을 것을 쫓고, 휴식을 갈구하는 삶에 맹종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장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pg.76).”이라, 슈호프는 굴종하지 않는 해군 중령 죄수의 미래도 결국 죄수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넋두리로 생각해본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빠지게 된다면 머리와 온 몸의 감각은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앞이 캄캄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 “발밑만 보고 걸어 다니는(pg.82)”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수용소가 마냥 시베리아의 칼바람 같은 것은 아니다. 이곳도 엄연히 하나의 공동체이다. 누군가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관계라 해도 인정(人情)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낯선 환경이 읽는 이에게 금방 익숙해지는 까닭. 온갖 부류의 죄수들의 ‘온갖 이야기’는 또한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대화되어 있다.”는 것만 빼곤 어떤 것 하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다.


  모스크바 사람인 체자리는 슈호프의 반원들에게 어렵지 않은 작업을 배당받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 어떤 이들보다 쉬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엄동의 바깥에서 땀 흘릴 정도로 일하는 죄수들이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반장도 체자리는 존경하는데 말이다. 슈호프는 오히려 그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그로부터 조금의 빵이나 국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의 소포를 지켜주고, 몰래 숨겨 왔던 만능칼도 빌려주면서 따뜻하게 배를 덥힐 수 있다면 그 무엇이 아쉬울까. 연차가 별로 안 된 해군 중령 죄수도 말은 명령조로 하지만 작업장에서는 녹초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알료쉬카와 같은 온순한 죄수는 말 그대로 ‘보물’이다. 하이에나와 같은 페추코프도 때론 불쌍해 보인다. 진짜 죄수든, 억울한 죄수든, 일단 그들의 편에 서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그들이 증오하는 간수들은 정말 악마처럼 느껴진다.


  반원들은 카리스마 있는 반장 추린의 비호를 받는다는 까닭에 서로 주동(主動)이 되어 도맡은 일을 끝까지 하고자 한다. 작업장에서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아 수용소 문을 코앞에 두고도 대기해야 할 때에 죄수들은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씩 내뱉으며, 슈호프의 말마따나 그를 죄수들 한복판에 세워둔다면 “송아지 새끼처럼 갈기갈기 찢어(pg.141)” 살점 하나 안 남기고 처참히 죽여 버릴 듯 군다. 하지만 이내 수용소 문을 통과하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랬던 그들이 식당 앞에서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에 굴종한다. 그들은 마치 베를린을 탈환한 옛 ‘붉은 군대’를 연상케 하듯 식당으로 돌진하려는 장면을 연출한다. 모든 이들이 제각각 쓸모가 있고, 행동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식당의 풍경이다. 솔제니친은 그 풍경을 “경건하다.”고 묘사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빵과 국. 그것도 대부분이 썩은 재료로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식사의 순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 “한 번 견뎌보자.”라는 의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복잡한 삶 속에서 잇달아 좌절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든든한 속은 늘 우리의 뚝심을 격려하지 않던가. 야만적이라 여길 법한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이가 있을까. 살벌한 군부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이라면 그 서슬 퍼런 시간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해볼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우리(한국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는 역사의 한 토막도 짧게 소설에 등장한다. 슈호프가 담배를 구하기 위해 라트비아인의 방에 찾아갔을 때, 마침 그 방의 죄수들이 6.25 전쟁(중공군 개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도 ‘우리’를 익숙하게 만든다.


  “다른 놈들이 오늘 죽는다면 나는 내일 죽을 거란 말이다!(pg.195)” 
  독일의 유명한 축구선수 중에 한 명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더라. 오래된 분데스리가(독일의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 축구팬이라면 알 법한, 소위 ‘사냥개’라 불렸던 (지금은 은퇴한) 그의 투지와 관련돼 한동안 명언이라 회자된 것인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누군가에게 한 대 맞는다면 자신은 그의 엉덩이를 두 대 걷어찰 것이라고 했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손해는 늦춰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세태에서 인정이 식고, 마음이 인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무엇이 모범이고, 무엇이 도덕인가를 더욱 열심히 논하려는 이때에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비리와 혐의들이야말로 진정한 야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언젠가 “도덕은 얇다.”고 말한 적이 있는 듯하다. 역으로 말하면 그것은 도덕의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당장은 그저 식어버린 사회를 묘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수용소의 삶은 점점 익숙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체감된다.


  묻는다. 신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솔제니친은 그 부분도 빼놓지 않는다. 불평하는 법 없고, 올곧게 친절한 알료쉬카가 취침 전 슈호프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두 개의 목적을 발견한다. 둘 다 맹목적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맹목의 손가락이 어딜 가리키고 있는가가 다르다. 우리는 대개 둘 중 하나이다.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구? 알료쉬카,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말해 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될 뿐이고, 거절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야!(pg.200)
  알료쉬카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슈호프는 이미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뒤였다.
  “자넨,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감옥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지? 1941년에 전쟁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pg.204)
  그리하여 슈호프는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논쟁은 결국 큰 의미 없이 끝난다. 어제 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슈호프는 체자리를 도와준 대가로 받은 비스킷 하나를 알료쉬카에게 넘겨준다. 그가 신앙을 강하게 주장해도 슈호프는 알료쉬카가 ‘좋은 놈’임을 안다.


  유난히 ‘운수 좋은 날’이었던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내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와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창에는 두텁게 낀 성에가 이곳이 시베리아임을 알려줄 것이다. 단순한 이곳의 삶에서 “삶”을 쫓는 이들의 묵묵한 전쟁은 몇 십 년이고 계속될 것이다. 책은 얇다. 하루치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가 직접 겪은 8년의 형기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이다. 이 책을 가장 밑에 365권 쌓아놓고, 그 위로 여덟 겹을 더 쌓아야 한다. 상상이 불가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 옮겨놓고, 글을 접는다.
  “토끼들의 즐거움이다. 그래, 우리를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도 있다고 좋아하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pg.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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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내의 충돌 현대의 지성 127
디테 젱하스 지음, 이은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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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깊게 읽기] 문명 내의 충돌 (1~4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어제 시리아에서는 또 한 번의 차량폭탄테러사건으로 인해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이하 NYT)>紙 홈페이지의 1면에는 거의 매일 아랍의 정치격변과 테러,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의 미군 피해, 미군 철수 등이 헤드라인으로 올라온다. 근 몇 주 동안 위와 같은 뉴스들을 제치고 1면을 장식한 사건은, 내 기억으로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과 김정은의 집권 외에는 없었다. 미국이 아랍에 얼마나 깊게 개입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NYT가 보도하는 거의 모든 아랍 관련 국제사건들은 비극이다. 각 기사들에는 익명을 요구한 인터뷰이들의 부정적인 의견도 빠지지 않는다. 작년은 2001년 참사의 10주년 되는 해였다. 나아진 것은 없는 듯하다.


  작년 여름학기에 나는 요한 갈퉁의 평화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강의 하나를 들었다. 강의를 통해 나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창조적인 대응책들을 배우게 되었다. 납득은 되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적인 내용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강의의 레포트 주제로 나는 체첸의 내전을 선택했다. 그와 관련된 이론을 알아보기 위해 집어든 책이 바로 젱하스의 <문명 내의 충돌>이다. 그가 왜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반년만에 다시 읽어 나의 이해는 더욱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 어딘가가 씁쓸하면서도 한없이 공허했다. 이 책은 10년도 더 전에 발행된 책이다. 평화주의자인 젱하스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거의 실천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의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한 달에 걸친 깊은 독서를 마치고 리뷰를 쓰려던 지금, 나는 어제 시리아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를 망연자실하게 상기하게 되었다. 일개의 어린 독자가 세계의 문제를 다룬 책을 통해 그 한복판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벽이 느껴진다. 공허해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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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내의 충돌>은, 지난 네 편의 심층독서에서 파헤친 것과 같이 ‘간문화적 철학’을 위한 태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기존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고를 넓혀갔다면 현대의 철학자들은 사고의 경계에 서서 이론이 아닌 행동과 사건의 앞에 대면해야 한다. ‘간문화(間文化)’라는 문자만 보면 그것은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두 문화의 깊은 역사와 현재의 모습, 체제,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대한 정보량과 학문 간 토론, 심층이해, 현장방문 등을 필요로 한다. 석학들도 그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젱하스가 말한 “무의미한 학술대회”는 지금도 개최되고 있을 것이다. 이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길을 여는 학문이며, 따라서 행동과 직결된다. 이 철학은 제도가 될 수 있다. 젱하스는 이 철학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간곡하게 소개한다.


  매일 뉴스를 통해서 우리도 접한다. 세계는 갈등의 전쟁터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연일 언론이 보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국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평화보다는 갈등을 더 직접적으로 체감한다. 살인, 방화, 성폭력, 테러, 비리 등의 보도가 빠지는 날이 없고, 이것들에 우리는 거의 신체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혀를 차고,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입술을 삐죽 내밀거나, 아니면 한숨을 쉰다. 이렇게 우리를 치떨게 만드는 사건들은 우리가 갈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다원적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일치된다. 갈등을 중재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의 정착이나, 소통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등장이다. 법은 사소한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목도한 우리는 법을 탓한다. 그러나 그건 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며, 사회적 합의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힘도, 그럴 수 있는 지도자도 부재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젱하스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해야 한다.
  “갈등을 통해 점점 강화되는 다원성을 위한 적절한 표현방식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렇다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여러 집단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원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유일신 종교들은 이 태도에 대해 소극적이며, 다원성을 기초로 하는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들은 많다. 종교적 특성을 누구나 먼저 꼽겠으나, 현대사회에 들어 그것의 영향력은 감소(종교최소주의 사회)해 있으니, 다른 요인을 하나 더 들자면 그것은 바로 권력의 문제이다. 한 가지 예로, 내가 강의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조사했던 체첸의 내전에서 이 권력의 문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황이 유독 복잡한 지역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으나, 체첸의 대(對)러시아 항쟁의 근간(根幹)에는 상황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종교(이슬람)가 있다. 권력이 종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그 밑의 사람들은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낙후된 경제상황이 더해지면 상황은 극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 이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원성의 개념은 유럽이 백 년은 넘는 오랜 시간동안 온갖 시행착오와 피, 고통, 부정적인 역사를 감수해가며 얻게 된 근대화의 결론으로, 그것은 곧 ‘민주(民主)’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서구화’라고 칭했을 때, 동아시아는 서구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룩한 곳으로 손꼽힌다. 젱하스는 이 성공의 배경에는 바로 경제적 발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경제적인 혜택을 보장받지 못한다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정치적 참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동구권의 실존사회주의, 이슬람 세계, 다원적 인도 사회 등에서 발생했던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실패의 사례들은 다원성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대항 프로젝트’의 토양에서 자라난 쓰디쓴 열매였다. 젱하스는 ‘아시아적 가치’도 그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고 분명하게 분류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는 보수적 가치를 버리고 과감한 혁신을 통해 수준급의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유럽보다도 놀라운 정도의 역사를 쓴 것은 그도 인정한다.


  문제는 여전히 문화 간 대화가 시도될 여지가 없는 사례들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례들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례를 바라보는 눈은 거의 일괄적으로 서구의 것인데, 젱하스는 이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 사람들은 (헌팅턴의 용어를 쓰자면) ‘문화 간 충돌’을 바라보기에 앞서 이미 서구의 우월을 가정한다. 이에 젱하스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발전 경로가 근대화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승리였고, 전통주의자들은 항상 전망이 없이 후퇴하는 싸움만 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 근거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보통선거권을 가진 나라는 겨우 3개국이었고, 여성선거권은 20세기에 소극적으로 부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든다. 오늘날 서구가 자랑하는 그들의 근대화가 마치 오래전부터 항구적으로 누려온 것이라는 환상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근대화의 산물을 영양분 삼을 수 있었던 후손의 자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물리고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본 다음, 타문화를 대할 때, 적어도 이슬람을 대할 때에 그들(과 우리)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실제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우 새삼스러운 말처럼도 들린다. “시리아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것이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인가?”라고 주장하고픈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젱하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근본주의에 대한 유사한 비판이 계속되는 세태는 비생산적이라고. 이슬람의 민주적 대표자들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 ‘적’의 이미지가 이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항간의 ‘괴담’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관심의 편향이 ‘서구 대 이슬람’의, 마치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것처럼 가공된 기나긴 피의 역사에 대해 숱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와 같은 편견은 두 세력 사이에 공존의 역사가 있었던 장에 직접 들어가 본다면 억측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가령,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처럼 성지 예루살렘에서 공존하는 각 종교 세력과 교파들의 암묵적 합의가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두 세력의 역사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편견 때문일까?


  자만과 편견을 물리고,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면 젱하스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먼저, ‘서구 대 이슬람’ 이외의 문제 중 가장, 아니 ‘서구 대 이슬람’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그가 진단한 인도 내부의 문제이다. 인도의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는 여러 종족, 종교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며 거의 모든 갈등의 근본을 양산하고 있다. 파키스탄과의 대외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 내부의 문제도 시한폭탄과 같다. 이를 통해 젱하스는 ‘문화 내부’의 문제 역시 간과하면 안 된다고 본다. 이는 미국도, 아랍도 마찬가지이다. 두 세력을 상징하는 두 종교는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지 않기에 폭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위도 10도>의 선교 내용과 이슬람의 ‘지하드’를 참조하거나, 르네 지라르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좋다.)고 하지만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힌두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스리랑카)은 얼핏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내부의 문제는 부패한 엘리트들의 권력쟁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은 종교의 여부를 떠나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다. 갈등을 양산할 수 있는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이러한 갈등은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더라도 그 사례들은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지역보다 현저히 적고, 사회적 위력도 작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막상 들여다보면 젱하스의 설명처럼 평화롭지만은 않다.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도 그러하고, 한중일과 대만의 첨예한 갈등, 러시아의 개입, 남중국해 관련 문제 등도 우리가 자주 접하는 긴장이다.)을 유지하는 까닭은, 거듭 설명하지만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상관관계 때문이다. 젱하스는 이슬람 사회가 동아시아를 본받아야한다고까지 말한다. 반대로 실존사회주의의 실패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얻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들은 젱하스가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근대의 역동성과 매력은 바로 운동과 반대운동, 그리고 그것의 확산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양성에 있다.” 이 다양성은 “잘 쓰면” 건설적 합의를 통해 광범위한 평화상태를 유지하게 해주고, “잘못 쓰면” 내전의 씨앗이 된다. 서구는 “잘 쓰게” 되기까지 숱한 내전을 겪어왔다. 대신 그 상처는 다원성에 대한 이해, 성찰적 태도, 제도적 고찰 등의 여러 해결책을 발제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줬다. 진지하게 세계 문제를 다루는 서구의 학자들은 그들의 역사를 교훈 삼아 다른 곳의 근대화도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하는데, 이 점에서 젱하스는 요한 갈퉁과 만난다. 그리고 그가 비판한 헌팅턴과도 조우한다.


  평화는 중재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상태이다. “평화를 바랍니다.”라는 추상적 말로 끝날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운동이며, 이동이다.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체제, 그리고 이해이다. 행동에 앞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이해가 어떻게 갈등의 지역에 단비처럼 내릴 수 있느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문명 내의 충돌>의 독서는 공허하게 남는다. 내일 당장 9.11 테러와 비견될 만한 참사가 벌어져 세계가 냉각된다고 해도, 안타깝지만 별로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은 나에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애당초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럴 때 독자는 압도당한다. 독서가 늦어진 까닭도, 핑계대보자면 그 때문이다. 문득 세계 저 어딘가의 미래를 소망해본다. ‘아랍의 봄’이 정말 봄이 되어 평화에 대한 열망과 중재의 힘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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