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2012.06.30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권]


  8시 30분. 버스에 오른다. 나와 같은 학생들이 타고, 서로 비슷해 보이는 회사원들이 타고, 이따금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타고, 버스는 자유로에 진입한다. 그 쯤 되면, 나는 이미 한 시간 이상을 버스에 있었으므로, 졸기 시작한다. 버스는 가양대교 북단 즈음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가끔 미동만 할 뿐인 버스 속의 불편한 고요함을 말없이 견디기 시작한다.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교통사고가 있는 날은 한 시간. 그래야 버스는 사람들을 내려주기 위해 합정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내린다. 종점까지 15분은 더 가야 하는 나를 남겨두고 줄줄이 내린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는 채 떠나지 못한 ‘그것’들이 등받이처럼 붙어 있다. 떨어지지 않은 ‘그것’들이 이따금 나를 노려보는 것도 같다. 나는 하품으로 응수한다. ‘그것’들에게는 하품이 최적의 무기라는 설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들이 하품을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그 버스를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도록 만든다. 뭔가를 너무 많이 먹은 느낌이다. 포만감이 극에 이르면 토가 나온다. 그래, 사르트르의 ‘구토’가 나온다. 바로 라르스 스벤젠의 “과잉에 의한” ‘그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태’이다. 지루한 가뭄이다. 혹은 한 음만 반복되는 4분짜리 곡 12트랙의 앨범이다.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울지 않던가. 자연의 이치가 ‘변화’에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데, 왜 우리의 일상은 마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구두 한 켤레처럼 그토록 ‘어김없는’ 것일까? 그 구두를 신고 우리는 현관문 바깥을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이 노골적인 제목의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었다. 피터 투이의 <권태(Boredom)>이다.

 

 

*     *     *

 

  사람마다 다르겠다. 나는 ‘권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Olafur Arnalds이다. 그는 순전히 Sigur Ros와 Bjork 때문에 알게 된 아이슬란드의 뮤지션이다. 책상에 앉아 인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노라면 나는 대체로, 의자에 걸터앉아 축 늘어진 베케트와 담배를 문 카뮈 사이의 어느 즈음 정도 되는 자세와 잔뜩 찌푸린 인상을 하곤 한다. 주제들이 가볍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별로 재미없는 사람인 나의 천성인 듯도 하다. Olafur의 음악은 그런 나에게 제격이다. <권태>를 읽을 때, 나는 그의 음악 를 수 백 번 반복해서 들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단조가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3분 5초 동안 계속된다.


  한창 미술공부에 열을 올릴 무렵에는 뒤러의 <멜랑콜리아 Ⅰ>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을 뜯어본 까닭은 당시 파노프스키의 <뒤러>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작품 속 여인은 뒤러의 은유이고, 뒤러의 ‘권태’는 화가를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그의 도전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나에게 이 역설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자신을 초상화 속 예수로까지 묘사했던 북유럽의 자존심이 느낀 권태. 권태는 참으로 인간적인 쇠사슬이 아닌가 말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판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 에우스타키우스>(1501년경 동판화)이다. 동물 묘사의 극치라 여긴다. 어쨌든, 이제 미술 이야기는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권태는 늘 역사적인 주제였다. 가볍고 간헐적인 권태는 불현듯 일상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예술이 그곳에서 탄생한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진지하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막연함. 그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권태는 우리가 표현하도록 하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일까? 피터는 책의 부제를 “창조적인 역사(Lively History)”라고 달아뒀다.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권태를 줬다.” 이런 주장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아, 이것도 일종의 권태인가? ‘명제에 대한 권태’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고등학생들은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 즉 한 분야나 주제를 통시적으로 훑는 과목에서 거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모더니즘의 특징을 (고등학생 때보다는 조금 더 심도 있게)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가 왜 권위와 전통, 혹은 절대적 진리들을 이따금 적대시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역(役)현상도 재미삼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모더니즘이 유발한 ‘시대적 권태’에서 도망칠 수 있는 비밀통로나 첩경 따위는 찾기 힘들다. 피터의 책에서 권태는 차라리 ‘사회적 권태’의 약칭이다. 멜랑콜리와의 차이라고 할까. 그러나 우리에게 둘의 경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권태, 멜랑콜리, 우울함은 시각적으로 같은 모습이다.(59쪽)
  그것은 강렬하지만 너비와 높이를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카뮈의 <이방인(L'Etranger)>을 읽다 돌연 손가락으로 방아쇠 당기는 흉내 내본 이라면 안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이것만 하면 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별로 시원하지 않은 하품을 하는 것 말이다. 가져다 대면 살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정도의 고열을 방출하며 총탄이 총구로부터 음속에 필적하는 속도로 날아간다. 그래도 지루하다면 팔꿈치로 턱을 괴면 된다. 이 행동들의 순서를 뒤죽박죽 바꿔놔도 별 상관은 없다.


  바이런의 말이 맞다. 권태는 “잠으로도 가시게 할 수 없는 지독한 하품(57쪽)”이다. 무료한 우리의 일상에 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없지 않은가. 혹 그런 까닭에, 결말이 훤히 보이는 드라마, 예컨대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이 사실 남자주인공의 배다른 동생이었다던가, 여자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남자주인공이 목숨을 담보로 장기기증을 해서 살아난다던가, 대충 그런 드라마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막장드라마들도 시청률은 대체로 높다.


  피터는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는 여러 이론들을 문학과 미술 등의 다채로운 사례로 입증하거나, 혹은 이론이 문학과 미술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글을 엮어간다. 하지만 권태에 대한 그 특유의 (그는 서문의 마무리에 “고백하건대 나 역시 살면서 권태를 자주 느꼈다.”고 썼다.) 낭만적인 시각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읽는 이들은 아마 수시로 독서를 멈추게 될 것이다. 공감 때문이다. 권태는 그 정체가 애매모호한데도 이상하리만치 공감되는 무엇이다. 그렇다고 호들갑떨면서 무릎을 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의 권태면 다행이다. <권태>의 2장에 실려 있는 소위 ‘만성적 권태’는 위험하다. 이 권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면 ‘환자’가 된다. 사람의 성격유형을 구분하는 여러 유명한 이론들이 있다. 심리테스트 좋아하는 현대인들 중 몇몇은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자신에게 실제 적용하기 위해 비싼 돈 주고 전문가에게 검사를 의뢰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형검사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심각한 수준의 권태 ‘환자’들도 있다.


  만성적 권태가 해당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의학적 근거는 도파민 수치이다. 도파민은 소위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 그것이 평소 낮은 사람들, 즉 늘 권태로운 사람들은 자극을 찾게 된다. 여기서 ‘자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권태와 분노의 상관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된다. 여행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를 ‘배회증(흔히 말하는 방랑벽)’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행이도 만성적 권태는 대체로 가볍다.


  다음 장에서 피터는 동물과 권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동물을 여전히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일부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라면 동물 중 일부 종이 권태를 느낄 수 있다는 의학적 주장을 별다른 근거 없이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동물도 권태를 느낀다는 것을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 중 하나는 집에 아무도 없으면 간혹 자신의 대변을 먹는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 하나는 소변을 머리에 묻히곤 했다. (우리 가족은 그녀의 바짝 세워진 털을 보고 ‘베컴 머리(닭벼슬 머리)’라고 불렀다.) 이는 한 박사의 관찰(125쪽)과 꼭 닮았다. 격리와 감금은 동물에게 공포, 동요, 또는 우울을 유발한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단 동물의 경우만 그러할까. 감옥, 그것이 실제 감옥이든 은유의 대상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를 철창 속의 새처럼 만든다. 새는 날아야 한다. 본능이다. 우리는 박탈된 권리로부터 권태를 느끼게 된다.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서 앤디(팀 로빈스氏)는 지루한 감옥생활을 잊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한 일은 교도소 주변의 돌을 모아 체스 말을 만드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수용소 안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는 죄수들이 그려져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도 방 안의 모든 물건들, 그리고 그 물건들의 흠집까지 기억해내는 방법으로 (카뮈의 표현대로라면) ‘추억거리’를 만들어 권태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이 있다.


  고행자들에게는 권태가 피하지 못할, 넘지 못할, 막지 못할, 대체로 그런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행자들에게 그것은 악마였을 것이다. 피터는 에바그리우스(초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가로, 이집트 사람이고, 흔히 ‘폰티쿠스’라고 부른다.)의 ‘한낮의 악마’, 즉 아케디아를 그 예로 든다. 그것은 실존적 권태이다. 거듭 예로 들게 되는데 <이방인>의 뫼르소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를 이해하긴 힘들어도 우리의 대부분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많든 적든 (우리들의 대부분이 더 이상 권태를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뫼르소적”이다. 원색적 욕망만을 탐닉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침묵은 있지 않은가. 여지없이 권태가 침투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얼마 전 두 편의 레포트를 한꺼번에 마무리하느라 심각한 권태를 느꼈다. 뒤러가 <멜랑콜리아 Ⅰ>으로 호소한 ‘지성인의 권태’에 조금이나마 근접했던 때였다.


  실존이 권태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면, 아니, 당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차라리 ‘공격’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그 해괴망측한 상황에 빠진다면 차라리 결정된 상황 속에서 뭔가 해결책을 찾고자 머리를 쥐어짤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그런 상황은 애당초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편안한 상상을 할 것이다. 우리의 혐오는 ‘있을 법한 것에 기초’를 둔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리얼리즘에 기초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한 마디처럼 우리가 경계를 잃게 되면, 그리하여 “나는 <변신> 속의 해충이고, <변신> 속의 해충은 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 ‘환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혹은 호퍼의 <바다 옆의 방>(1951년 유화)처럼 그 모든 것이 단조롭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 답답함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피터는 실존적 권태를 “키메라 같은 존재(182쪽)”라고 묘사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여러 개의 머리가 있다. 그런데 실존적 권태는 “정서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189쪽)”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러 개의 머리’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된다. 무슨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잉여가 된다.


  5장은 권태의 역사에 관한 공간이다. 그리스인들이 두려움을 신중함으로 여겼다면, 그리고 로마인들이 그것을 타인에 대한 지배와 연관 지었다면(201쪽), 권태도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다. 18세기부터 차곡차곡 누적된 근대의 산물들 속에 권태를 집어넣는 학자들의 의견도 있다. 우리가 ‘권태’하면 떠올리는 감정이 ‘권태’라는 언어 자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boredom’이라는 명사가 처음 등장한 때가 1864년이라 권태의 시작은 엄밀히 말해 그 때부터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이전에도 boredom에 충분히 상응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머리가 멍해진다.(209쪽)”라든지.)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느끼는 권태의 조건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권태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병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겠다. 권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사례(212쪽)도 있다. 문자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사고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보통의 이해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가깝게 와 닿지는 못한다.


  6장은 “어떻게 하면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얻고자 이 책을 펼쳐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피터가 들려주는 것들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는 답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여가시간은 실용이나 도덕과는 무관하게 보내야 한다. 잔뜩 긴장한 몸을 쭉 이완시키는 것처럼. 이 모든 답들이 이 책에서는 의학적 근거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한편, 극복할 만한 권태는 우리에게 (이 책의 부제처럼) 창조의 통로로 이어지는 놀라운 문이 되기도 한다. 브로드스키는 권태가 진정한 ‘나’를 만든다고 했다(252쪽).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을 아울러, 사실 길지 않은 책이긴 하지만, 피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맨 마지막 한 문장에서 집약된다. 이것이 명제이다.
  “권태는 그저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일 뿐이다.(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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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그 왼편 차창들 밖으로 노을 질 무렵의 한강이 황금빛처럼 빛난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Olafur Arnalds의 잔잔한 를 듣기 위해 음량을 되도록 크게 올려놓고.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하루의 고단함을 등받이에 이리저리 묻혀가며 졸고 있다. 아니, 잠을 쫓고 있다. 나처럼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사람이 아닌 경우라면 잠은 ‘버스타기’의 최대 적이니까. 그의 혈투가 못내 안쓰럽다. 차라리 “내리는 곳 알려주시면 제가 깨워드릴게요.”라고 말을 건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잠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더 걸리니, 선잠 잘 시간은 충분하다. 의식이 몽롱해지다 결국 나는 차창으로 머리를 살짝 가져다댄다. 온몸이 차창으로부터, 의자로부터, 바닥으로부터 튀어 올라도, 나는 참 잘 잔다.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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