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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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읽기 힘든 책이다. “힘들다.”가 마냥 부정적으로 들리는 요즘 풍토에 저런 표현으로 리뷰를 여는 것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봤으나, 정직하게 말해 이 책은 정말 읽기 힘들다. 뜻이 난해해 독서를 중단하게 되는 부류의 책은 아니다. 윤상욱氏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로 아프리카의 심장을 관통한 저자이다. 사려 깊다. 그만큼 독자의 부담은 줄어든다. 그러나 책은 그저 읽고 그치는 수준의 단순한 ‘앎의 벗’이 아니다. 좋든 싫든 책은 우리에게 아픔과 상흔을 남긴다. 그것은 앎 이상의 것이다. 동기가 되고, 그로부터 어떤 행동을 유발하며, 그 행동이 한 사람의 평균적인 몫보다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길 수도 있다.


  이런 역할은 대개 ‘문제작’이라 불리는 책들이 도맡아했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비판적으로 동참하게 되고, 독서의 순간만큼은 너도 나도 미간을 찡그리며 마음의 무게를 버텨본다. 하나라도 피해간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겁쟁이라 여기게 된다. 하지만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고 해서 뿌듯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책들은 자신을 다 읽고 덮은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마음에 어떤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지난주까지 연속되는 발표, 시험, 리포트 따위에 시달린 까닭도 있겠으나, 나의 리뷰가 늦어진 까닭(거의 한 달을 이 책만 붙잡고 있었으니)은 무거워진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는 소심한 핑계를 슬쩍 글에 얹어본다.


  어떤 바이러스가 있다. 병증이 다양한 ‘사회적 바이러스’라고 부르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이형(異形)과 변종을 통해 아프리카 각 지역들에 숱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발병의 빈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문가들의 통계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보도되는 중동 어느 곳의 폭탄테러사건을 볼 때마다 “중동은 왜 만날 저 모양이야?”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혀를 차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에게도 비슷한 시선을 보낸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몇몇 부정적 대명사들이 선명하다. 제 3자에게 아프리카 긍정론을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땅은 드넓지만 대개 농경에 부적합한 사막과 정글로 이뤄져 있고, 지하자원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지만 그것은 곧 검은 돈을 낳으며, 점차 민주화되어가는 추세라지만 그곳의 ‘더위’는 미풍(微風)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팬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각한 것은 그 중 대다수의 문제들이 아무리 을러도 숨통을 죄어오는 맹수를 앞에 둔 상황처럼 곧장 생사를 가를 급박함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윤상욱氏는 그 문제들이 언제 어디서부터 야기되었는지, 왜 지금도 그 문제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지 역사적 배경을 상세하게 알려주고자 여러 장(場)에 걸쳐 반복과 강조를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1장에서는 그의 표현대로 ‘미아(迷兒)’나 다름없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뭉뚱그려나마 파악해보고, 2장과 3장에서는 빈곤과 독재를, 4장에서는 폭력을 야기하는 두 거대 종교를 고발한다. 문제는 이것들이 다 “따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유기적이라는 진리가 이런 때에는 참 잔인한 말 같다. 5장에서 약간의 긍정론을 내비치지만 단정 짓기 좋아하는 몇몇 독자들은 (속된 표현으로) “뭐 이런 망해가는 집구석이 다 있나?”라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관론은 사치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는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면 된다. 필요하다면 검색하는 것도 좋다. 때문에 굳이 이 자리를 구실 삼아 “나 이만큼 읽고 알았다.”고 자랑할 거리가 되진 못한다. 한편으로 나는 그들의 문제를 알고, 고통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함께 모색하는 것이 세계인의 자세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자세에는 공허함이 있다. 우리가 도심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화려한 부품’처럼 생활하는 중 지구 반대편의 어느 곳에서는 집단테러, 강간, 방화, 소년병 양성, 말도 안 되는 종교전쟁, 나라의 예산을 횡령한 ‘왕’ 같은 대통령이 판을 친다고 해서 나에게 저 사막의 뜨거움이 체감되진 않는다.


  ‘검은 대륙’의 빈곤과 기아를 위해 모금과 봉사활동을 하자는 홍보 요원들의 미소와 손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곧 도착할 버스들의 번호를 확인한다. 다반사이다. 지적 태만을 책을 통해 해소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未)행동’의 죄목을 가진 우리에 대한 판결을 유예시킬 만한 긍정적 요인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케케묵은 이런 표현으로 늘 반성만 하고 마는 내가 과연 이 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첫 삽을 뜰 때부터 나는 상당히 겁을 먹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리뷰가 거짓말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시리아에서는 또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 중 나는 나이지리아의 난사테러를 전해 들었다. 한 쪽은 독재자를 몰아내려는 재스민 혁명의 후발 사태가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고, 다른 한 쪽은 너무나도 빈번했던 두 거대 종교 간의 무력 싸움이다. 이들 국가에는 못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권력자의 힘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크고, 에리히 프롬의 말마따나 ‘전제형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충돌은 인간에게 신이 아닌 죽음을 남겨놓고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사자인 양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이 국민을 위한 국가인가? 무엇이 인간을 위한 종교인가? 민주화와 세속화라면 세계적으로 손에 꼽힐 정도로 빠르게 달성(물론 그 후속 진통을 묵과할 수는 없겠지만)한 우리나라에서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그럴 역량이 없다. 이를 두고 “아프리카인들은 멍청하니까.”라며 구시대적 ‘악플’을 다는 몇몇 몰상식한 사람들에게 윤상욱氏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요목조목 설명해준다. 그 부분에서 독자들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것이다. 그들이 자력으로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생명권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날은 적어도 반세기 내에는 찾아오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론이 그들의 서술형 답안지를 가득 채울 것이다. 부실한 국가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아프리카의 막대한 자원을 수입할 수 있는 강대국들의 전략적 외교가 이 비관론을 현실적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낡은 아프리카식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며 언젠가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낙관론을 조심스럽게 꺼내든다. 내전이 줄어 그들이 남긴 자해(自害)의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물 것이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현실감각들로 대체되기 시작할 것이다. 혁명의 여파로 독재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고, 교육의 기회와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들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요구할 것이며, 그로부터 국민들의 갈라진 정체성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정당한 정치인이 선출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지위가 상승하면 그들이 달고 있던 꼬리표는 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긍정적 역사의 흐름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저자의 작업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가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책날개에는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모순과 고통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해결책이 없다. 9할이 문제에 대한 지적이고, 1할이 그나마 몇몇 긍정론의 사례 언급이다. 미미한 수준의 변화로부터 희망의 불씨를 목도하려면 약간의 관심만 가지고 뉴스 기사 몇 개만 시간의 흐름별로 분석해보면 된다. 그런데 그 불씨의 무게가 무거운 비관을 한 쪽 팔에 얹고 있는, 아니 무거운 비관에 한 쪽 팔이 짓눌린 저울의 평형을 되찾을 수 있을 만한 것인가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저자는 그것에 답하지 못한다. 실전에서 활약 중인 국제단체의 수뇌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저자가 거둔 절반의 성공이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책의 의미를 높이 사야 한다. 바로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감정은 추상적이고 감성적 차원의 동정심에 머무르고” 마는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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