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쓰촨성에서 윈난성으로 넘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꽃이름을 도시명으로 가진 판쯔화攀枝花라는 곳을 거쳐 윈난 리장丽江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험난한 중국 내륙 지형이지만 청두成都-판쯔화 攀枝花사이 기차가 놓여 있어 가장 무난하게 여행할 수 있는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가장 유명한 길이자 인내와 고난의 길이기도 한 차마고도를 지나는 길이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 리탕理塘을 거쳐 샹그릴라香格里拉로 넘어가는 버스로만 서른 시간 넘게 걸리는 쉽지 않은 여행길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길 하나가 더 있다. 쓰촨과 윈난 중간에 형성된 둘레가 50 킬로에 달하는 커다란 호수 루구후泸沽湖를 지나는 길이다. 루구후 외에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고 교통이 불편하여 그다지 이용되지 않는 길이었다. 판쯔화를 거치는 너무 상투적인 길에 대한 거부감과 언젠가 라싸로 넘어가는 길로 남겨 두고픈 기대감에 두 길을 제외하고 루구후를 거치는 길을 지나게 되었다.


청두에서 기차로 8시간, 그리고 다시 시골 버스로 8시간을 달려 도착한 마을 초입에는 자연목으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커다란 대문 중간쯤에 '루구후'가 어설프게 양각 처리되어 있었다. 초입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던 '여인천하, 남성천당' 이란 표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마을에서 호수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온 곳에 위치한 어느 전통가옥에 숙소를 잡았다.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여행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늦은 밤 어느 집 마당에 동네 여인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마당 한켠에 걸터 앉아 한참을 구경하는데 왠지 남자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있었고 여인들만의 춤판에 홀로 있기 어색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젊은 사내가 운영하는 술집에 머무르니 주인장이 루구후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루구후는 모쒀족이 자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중국 56개 소수민족중 유일하게 모계 사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아마 그 표어의 의미는 모계 사회를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로 쓰여진 듯 했다. 


모쒀족摩梭族은 모계 중심의 사회이다. 어머니를 가장으로 하여 가족이 형성된다. 부부는 연을 맺기는 하나 같은 집에서 살지 않는다. 남자는 여인의 집으로 와서 밤을 지새고 아침이 오기 전 떠나간다. 특별한 혼례의 절차가 없다. 마음이 맞으면 남자가 담을 넘어 여자의 방문을 두드리고 여자가 문을 열어 받아들이면 암묵적인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이런 결혼의 형태를 주혼走婚이라고 한다. 결혼의 구속력이 없으니 이혼의 강제력도 없다. 여인은 마음이 떠나면 남자의 가방을 창가에 걸어 놓으며 남자는 이를 인연이 다한 것으로 여기고 돌아선다. 그러다 보니 한 집안에 같은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이 같이 생활하게 된다. 부부금실이 좋으면 모두 같은 아버지를 두게 되지만 금실이 별로면 모두 다른 아버지를 둔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고 장성한 딸들이 다시 독립하여 또 다른 모계를 이루게 된다. 외삼촌들은 어머니를 이어 장녀가 부양하게 된다. 모쒀족 여인 '양 얼처 나무'의 책 '아버지가 없는 나라'를 보면 부정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그리움과 눈물겨운 애정을 표현한 것과 달리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냥 핏줄에 대한 긍정 외에는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없는 듯 그냥 이름만을 건조하게 적을 뿐이었다. 모든 경제 생활이 어머니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며 남자들은 산에서 가축을 기르거나 집 건축 수리 등 일부 일에만 관여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주로 차마고도를 따라 마방의 삶을 이어갔다.


모쒀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풍습이 있 작지만 그들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개에 대하여 가족 같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태곳적 하늘이 열리고 신들이 세상의 모든 동물을 일렬로 세워 생명을 부여할 때 개 뒤에 인간이 있었다. 개가 60년의 수명을 얻게 되고 인간이 15년의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개가 슬퍼하는 인간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지금의 수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년 춘절에는 정성들여 음식을 장만하여 개에게 인간과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음식을 대접하는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금기시되고 있다. 그래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으면 방문을 박차고 나가 돼지나 닭에게 대신 욕을 한다고 한다. 어리둥절한 가축에게 "인간 같은 놈"이 최악의 욕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개에게는 욕하지 않는다. 


루구후는 아침 햇살이 특히 인상깊었다. 아침부터 뭔가 저녁처럼 쓸쓸하고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첩첩이 둘러싼 산을 넘어 여명보다 훨씬 늦게 호수에 도착한 햇살이 갈대 여기저기서 조금씩 비집고 들고서야 고즈넉함은 사라져갔다. 뱃사공들도 모두가 여인이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키보다 훨씬 큰 삿대를 둘러 매고 석양을 거니는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다.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는 그녀들의 모습에 측은지심은 한낱 나그네의 객창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갈대숲 사이 사이를 삿대를 저으며 나아가는 그들의 나룻배를 빌려 한나절 호수를 유람하였다. 돌아오는 길 호수가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저기 아래로 두 대의 나룻배 사이 커다란 목재를 걸친 배가 지나다닌다. 그들 또한 여인들일까. 그들의 거친 생존력이 아직껏 모계 사회을 이어가는 원천이 되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차트랑 2026-08-07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루구후의 여인들은 조선의 여인들처럼 남존여비를 겪으며 살지 않았을듯 하여
참으로 다행이다 싶습니다.

모쒀족의 풍습은 처용가를 떠올리게 하네요.
처용가를 통해 신라도 어쩌면
폴리가미(polygamy)의 사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하거든요.

어쨋든 루구후의 남녀 문화가 조선 사회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군요.
여인들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는 다는 것 만으로도 말입니다.

음... 사진 잘 찍으시네요~

건강에 유의하십시요 잉크냄새님.
좋은 하루 되시구요~


잉크냄새 2026-08-07 21:26   좋아요 1 | URL
모쒀족은 폴리가미라기에는 관계 정리에 철저해 보입니다. 여성은 가방을 걸어둠으로써 상대와의 관계를 확실히 끊어버립니다. 남자 또한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 듯 합니다. 오랜 전통이 본성마저 바꿔버린 것 같기도 하네요.

사진은..... 하나 잘 얻어 걸렸다는 표현이 제일 적합해 보여요.
 
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소한 비인도적인 행위로 위대한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구호와 생의 궤적을 같이 한 작가 고모의 비극적 인생,수천명의 산파이자 낙태시술자의 이중적 삶을 통해 중국 근대사의 비극인 ‘계획생육’을 해부한다. 중국에서 다산의 상징인 개구리의 와蛙는 인형,아기의 와娃와 발음이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꺼비


-박성우-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

산소호흡기의 들썩거림에 맞춰 하얀 이불보 옆으로 삐죽히 빠져나온, 한 몸인 듯, 숨에 겨운 듯 같이 들썩거리던 검은 두꺼비의 거친 떨림을 본 적이 있다. 또 어떤 날은 영안실 유리 뒤편에서 마지막 숨결을 몰아 쉬고 삼베에 싸여가던 두꺼비를 본 적이 있다. 녀석은 죽어서도 독을 뿜어대었다. 새집을 결국 얻지 못하고 떠났다. 손을 바라본다. 노동에서 비껴선 내 손에는 더 이상 두꺼비가 살지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차트랑 2026-07-24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께서 보았던 두꺼비는 참으로 거룩한 독성을 가졌습니다. 살아서도 세상을 등져서도 여전히 두 눈에 독을 뿜어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어찌나 독성이 강한지 저의 눈마저 따갑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에서도 잉크냄새님의 두꺼비를 많이 닮은 두꺼비를 본적이 있는듯 합니다....

잉크냄새 2026-07-25 10:06   좋아요 2 | URL
시인의 관찰력과 상상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노동으로 거칠고 굽어진 손등에서 눈물 겨운 두꺼비를 읽어내다니요...어느 집에나 두꺼비는 살고 있습니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난 사람들에 관하여
맥스 디킨스 지음, 이경태 옮김 / 창비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스탠드업 코디디언인 저자가 자신의 결혼식에 신랑 들러리를 부탁할 친구가 없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고 스스로의 우정을 돌아보며 통찰해 낸 남성 우정에 대한 글이다. 개인의 경험 위에 인문학적,사회학적 분석을 더해 현대 사회 남성 우정의 실질적인 문제점을 분석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주제를 코미디언다운 재치있는 글과 스토리텔링으로 큰 몰입감을 선사한다. 다만, 블랙코미디의 특성상 변기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음담패설류의 화장실 유머는 철 지난 개그 콘서트의 아련한 몸부림으로 비춰져 아쉬울 수도 있다.


작가는 그의 경험에 근거해 남성이 나이 들수록 친구가 사라지는 이유를 찾아내는 여정을 떠난다. 과도한 남성성의 과시로 인한 관계의 균열(거친 말과 행동으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도 남자라는 꽤 튼튼한 갑옷을 걸치고 파탄날 때까지 버틴다), 감정 표현을 두더지 잡기 게임으로 인식하는 유해한 남성성(분노라는 감정 외에는 몸 속에 지방처럼 저장하고 활활 태운다.다른 감정은 다 때려잡고 오직 분노만이 표출된다), 관계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감정 노동의 결핍(능동적으로 만남을 주선하는 감정 노동을 회피하며 감정 노동의 많은 부분을 아내나 여친에게 위임한다) 등 남성성 자체의 문제와 성적 요소의 접근 방식 차이에 의한 여사친 관계 문제(전부는 아니지만 남녀간 성적 요소 차이는 관계 단절을 유발한다), 소설 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관계 자체의 소실(소통이 아닌 은둔과 고립을 위해 미디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AI 간의 새로운 관계의 부상(부족한 인간 관계의 대체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형성으로 받아들여진다) 등 사회적 문제까지 다방면에 걸쳐 접근한다. 


우리는 우정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다. 화초처럼 가꾸고 돌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잡초처럼 봄만 되면 언제나 다시 피어나는 다년생 작물로 여긴다. 우정도 늙어가고 낡아간다는 것을 잃은 후에야 겨우 알아낼 뿐이다. 공기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다만 인지하지 못하는, 언제라도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 줄 것만 같은 영원한 존재도 아니다. 인생의 커다란 결단과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히든 히어로도 아니다.때론 술에 취해 '저 친구는 나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라고 호기롭게 말한다. 그 충성심과 관대함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정은 인생이 상처 입었을 때 홀연히 나타나 큰 감동을 주는 이벤트가 아니라 같이 즐길 수 있는 매일매일의 만남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작가는 결국 그의 이십대 가장 절친인 두 여사친을 결혼식 들러리로 결정한다. 그의 우정 여정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과는 '밥 한 번 먹자' 라고 말하면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밥 한 끼 먹는 걸로, '술 한잔 하자' 라고 말하면 그냥 술 한잔 하는 걸로 인생의 방향을 튼다. 아니, 밥 한번, 술 한잔의 인사겉치레 성향은 동서양이 똑같구만! 어찌 되었든 그 밥과 술이 생명뿐 아니라 우정을 지속하는 삶의 영양분임을 결혼식 들러리 고찰을 통해 알아낸 이유일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6-07-16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정이 있는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죠. 얼마 전 친구의 딸 결혼식에 갔다 왔는데 신경을 많이 쓰게 되더군요. 결혼식장을 가기 위해 미리 파마를 하고 교통이 불편한 데도 감수하고 갔다 왔어요. 그 친구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이런 것도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성들의 우정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잉크냄새 2026-07-17 18:46   좋아요 1 | URL
우정도 세심한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하죠. 리뷰에서 남성성으로 표현된 부분의 함축적 의미가 아마도 그런 세심함의 부족도 포함할 겁니다. 남성들의 우정도 분명한 장점이 있겠지만 여성 우정이 지니는 섬세한 감정 교류 측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해 보입니다.

감은빛 2026-07-17 15: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는 믿을만한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진심으로 함께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몇 가지 어려움을 긴 시간 겪고 있는데,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편으로 친구 라는 개념에 대한 제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이를 과도하게 따져서 동갑인 경우만 친구로 보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선배(혹은 형이나 누나)로, 한 살이라도 어리면 후배(혹은 후배)로 생각하는데, 사실 사회에서 서너살 정도는 친구로 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길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도 친구로 지낼 수 있겠지요.

잉크냄새 2026-07-17 18:53   좋아요 2 | URL
깊은 우정을 나눌 친구가 많다는 건 확실히 행복한 일이죠. 아마 활동가로 지내시며 함께 고생한 연대의 기억이 그 우정을 더 돈독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항상 어디에서나 기수를 따지는 사회적 현상이 반영된 결과죠. 나이마저도 계급화하고 싶었나 봅니다. 중국만 해도 선배, 후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더군요. 자연스럽게 ‘펑요우‘ 라고 소개합니다. 나이에 대하여 참 관대하고 개방적입니다.
 


인도의 극장은 카스트 제도를 닮아 있었다. 극장 자체가 따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극장 좌석이 앞좌석부터 브론즈,실버,골드,플래티넘으로 등급이 나뉘어 있었다. 마치 카스트 제도를 극장 좌석에 넣어버린 모양새였다. 등급은 좌석 위치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게 옷차림 등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외부적인 요인으로도 구분되어졌다. 브론즈에는 길거리에서 주로 만나는 릭샤꾼이나 뱃구레를 거침없이 드러낸 여인들의 싸구려 사리처럼 지저분하고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고 실버, 골드로 올라갈수록 눈부신 사리의 장식처럼 옷차림도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인원수는 브론즈가 압도적이었고 극장 전체의 분위기도 브론즈 인원들이 이끌었다. 당시 본 영화는 인도 액션 영화 <가지니>였는데 나쁜 놈을 응징하는 권선징악의 장면이나 주인공이 악인에게 얻어터지는 장면에서는 극장 안을 가득 메우는 감탄사와 푸념이 터져 나왔다. 인도 발리우드 마샬랴 영화 특유의 뜬금없는 중간 댄스 장면에서는 흥에 겨운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동참하기도 했다. 왁자지껄한 브론즈에 비해 실버와 골드는 왕족이 위엄을 갖추듯 무표정에 무반응으로 조용히 관람했고 플래티넘은 브라만의 신비주의를 품은 듯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왕족의 좌석에 앉아 천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상영 시간이 세 시간이 넘었는데 중간중간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대니 체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왁자지껄한 모양새가 시체말로 교양 없는 폼이기도 하고 요즘의 극장 관람 문화와는 동떨어져 있으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언저리에 소환되는 장면이다. 문명은 이런 본능을 억제하고 포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은 아닐런지. 영화의 성격에 맞게 놀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액션은 액션답게, 멜로는 멜로답게,코미디는 코미디답게. 유안진은 그의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 군밤을 깔 때는 아이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말자고 했다. 가끔 영화는 인도인처럼 신명나게 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이 2026-07-09 2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인도 가신 건가요?

잉크냄새 2026-07-09 21:25   좋아요 2 | URL
오래전에 다녀온 인도 여행을 지금에야 하나씩 정리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수이 2026-07-09 21:28   좋아요 1 | URL
저는 예순 전에 가는 게 로망인데 언제쯤 이룰 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이미 다녀오셨다고 하니까 부럽습니다. 다음 인도여행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

잉크냄새 2026-07-10 20:45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여행기라기에는 뭔가 부족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올리고 있으니 가끔이라도 재밌게 봐주세요. ㅎㅎ

nama 2026-07-11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이살메르인지 조드푸르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연회장 같은 화려한 극장에서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다 가진듯한 뿌듯함을 느꼈었지요. 잠시 인도인이 된 듯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하고요. 인도를 얘기하면서 영화가 빠지면 서운하지요.

잉크냄새 2026-07-10 20:47   좋아요 0 | URL
자이살메르에는 큰 극장이 없었던 기억으로 보아 조드푸르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인도 영화는 마샬라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뭔가 이것 저것이 부자연스럽게 섞여 알듯 말듯한 향기를 풍기는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ㅎㅎ

nama 2026-07-10 21:41   좋아요 1 | URL
앗, 자이푸르의 라즈 만디르 극장이었어요. 이십여 년 전에 갔었지요. 인도는 일곱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지명이 오락가락 하네요. 자이살메르는 가보지도 않았는데 마치 가본 것처럼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고요.

잉크냄새 2026-07-12 09:52   좋아요 0 | URL
와우, 난이도 최상을 자랑하는 인도를 일곱번이나 다녀오시다니... 세상 그 어떤 여행도 두렵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전 한번 더 다녀오고자 항상 생각중입니다.

2026-07-09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7-10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26-07-09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여행도 갔다오셨다니 넘 부럽습니다^^

잉크냄새 2026-07-10 20:50   좋아요 0 | URL
한참 세월 지난 여행기입니다. ㅎㅎ 언젠가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이지요.

감은빛 2026-07-10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정말 좋아했던 영화가 [가지니]예요. 아마 대여섯번 이상 봤을 거예요. 이 영화를 인도 극장에서 보셨다니! 정말 부럽네요.

잉크냄새 2026-07-10 20:5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예전 감은빛님 인도 영화 소개한 페이퍼에서 <가지니>에 대하여 언급하신 기억이 나네요. <가지니>는 인도에서도 상당한 흥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피터지게 두드려 패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마샬라 영화의 세계로 빠져봐야 알 수 있는 매력이 있죠. ㅎㅎ

감은빛 2026-07-17 16:15   좋아요 1 | URL
어쩌다 잉크냄새님께서 제 글에 남기셨던 댓글을 다시 읽었어요. 2008년에 바라니시에 있는 극장에서 가지니를 보았었다는 댓글을 이미 24년 1월에 남기셨었네요. 저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잊고 여기 이런 바보 같은 댓글을 달았군요. ㅠㅠ 죄송합니다!!

잉크냄새 2026-07-17 18:41   좋아요 0 | URL
아이고, 별 말씀을요. 항상 정성어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페크pek0501 2026-07-13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기행, 이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뭔가 특별한 나라, 같았어요.
수필을 인용해 잘 마무리하셨네요. 그 수필이 좋아서 프린트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잉크냄새 2026-07-14 21:17   좋아요 0 | URL
법정 스님의 인도기행 이군요. 마침 저도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읽었어요. 한동안 직접 갈 수 없으니 인도가 그리울 때는 다른 이들의 여행기로 허기를 채우곤 합니다.
유안진 님의 저녁을 먹고... 로 시작하는 저 수필은 한때 엄청났죠. 지란지교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