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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종교학
피신 몰리토 파텔 이란 긴 이름을 3.141592의 파이로 바꾸어 버린 이 꼬마가 맘에 드는 것은 신에 대한 사고의 일치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물드는 석양 아래서 융단을 펴고 알라신께 기도하기를 좋아한 파이는 크리슈나 신을 사랑하는 정통 힌두교 집안 태생이다. 어느날 이 세 종교의 대리인이 모인 자리에서 신의 모독에 가까운 그의 행동(?)이 들통나고 세 종교의 우월성과 진정성에 대한 논리들이 분분한 곳에서 이 어린 꼬마가 나의 맘에 꼭 드는 말을 외친다. "신을 사랑하니까" 이처럼 명쾌한 답변이 있을까.
"힌두교도들도 사랑의 용량에 있어서는 기독교 대머리들과 같다고. 이슬람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신을 보는 방식이 수염난 힌두교도와 같고, 기독교도들이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들과 같은것 아니겠느냐고."
난 "사랑하니까" 정도는 아닐지라도 "믿으니까" 라고는 말할수 있을것 같다. 대입시를 앞두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절에서 탑돌이를 하고 돌아오던 친구 녀석에게 "종교의 충돌로 물 건너 갔구나" 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이라면 " 이 자식, 넌 신을 참 사랑하는구나" 라고 말해줄수 있겠다.
동물학
파이가 난파를 당한 구명보트에는 4마리의 동물이 타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져 얼룩이 더 측은해 보이던 얼룩말, 말아톤의 얼룩말처럼 달릴때 얼룩이 윤기있고 역동적인 것이지 보트에 축 늘어져 있는 얼룩은 눈물진 얼굴의 얼룩과 다를바 없다. 파이, 너보다 불운한 운명이 있구나!. 바나나 통을 타고 나타난 오랑우탄, 머리만 크지 뇌는 콩알만 하고 생긴것 구부정하고 인류진화의 시초라고 믿기도 싫은 오랑우탄이 그리 살갑게 느껴졌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결국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초식동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으니. 파이, 남의 일같지 않았겠지. 조용필의 노래에서도 배척받던 하이에나, 동물의 왕국을 볼때마다 너만은 참 싫었다. 음울하고 비겁하고 뭔가 뒤가 구린 인상의 너가 싫었고, 네 발 짐승치고 축 처진 너의 엉덩이, 항문은 항상 땅바닥을 쓸고 다니는지 치질이 있을까 싫었다. 그래도 육식동물이니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겠지. 파이, 이 정도 절망은 버틸만 하겠지. 난파후 며칠동안 존재도 나타내지 않던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 그래 왕의 미덕은 주려도 함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지. 하이에나가 설쳐도 근엄하게 있었던 것은 너가 먹이 사슬의 최상위이기 때문이겠지. 파이, 이 망할 놈의 절망은 어쩔꺼냐!
추락이든 침몰이든 바닥은 있다. 모든 비상은 바닥을 차고 시작된다. 리차드 파커라는 절망 덩어리를 안고 태평양 바닥으로 추락하던 파이에게 들어온 풍경은 새로움이다. 막막하고 검기만 하던 태평양이 태양빛 찬란한 바다로, 물고기들의 향연장으로 보이는 시점. 절망의 끝에는 늘상 보던 풍경이 눈물나도록 눈부실때가 있다. 그것은 희망이 내미는 손이고 구원이 던져주는 빛이다. 나에게도 눈물나도록 눈부신 풍경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