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원균 맹장론의 거짓된 실체
 
제목 : 문학작품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이순신 폄훼 현상과 KBS 대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소설이 지닌 심각한 역사 왜곡의 문제

글쓴이 : 송우혜(宋友惠, 소설가)

I. 이순신에 대한 평가와 문학적 형상화의 변천상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한 사람의 무장인 동시에, 우리 민족이 지닌 '위기관리능력'의 극대치를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 영웅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찬연했던지, 적이었던 침략자 일본의 무사들과 그 후예들조차 숭앙하는 우상이자 전설이 되었다.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국가적 위기에서 그가 보여준 '이순신적'인 힘과 의지와 순발력은 어려울 때마다 우리 민족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운 긍지이며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는가. 시대에 따라 변해간 평가의 주요 흐름을 짚어본다.

1. 당대: '명장 원균의 전공을 가로챈 이순신'

"이순신은 원균을 모함하고 원균의 전공을 가로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느닷없이 이런 주장이 나타나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깎아내리면서 기세를 얻기 시작했다. '원균 명장론'을 전제로 한 이런 주장은 원균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원균 및 그를 지지하는 서인들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었고, 화의가 깨어져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타오르는 불이 바람을 얻은 듯이 기세를 얻었다. 독자적으로 거둔 뛰어난 승첩이 없는 무장인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려면, 직접간접으로 이순신을 폄훼하고 그의 공을 빼앗아 원균에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당시 원균과 그의 지지파들이 계속 내세웠던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았다"는 주장들이 현재 <선조실록>에 도처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당대에 이순신이 원균측으로부터 어떤 식의 괴롭힘과 폄훼를 당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국 그런 주장들이 선조에게 받아들여져서 이순신의 체포와 투옥 및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최초의 대전투에서 삼도 수군 전부를 무너뜨리고 본인도 전사함으로써, 또한 그 뒤에 이순신이 단지 13척의 전선을 가지고 명량대첩의 신화를 이룩함으로써, 그런 주장은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이순신을 내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함으로써 삼도 수군이 일시에 무너진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인 선조만은 원균이 전사한 뒤에도 계속 원균을 두호하고 "원균은 지혜와 용맹을 갖춘 무인"이라고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조가 그런 무리한 오기를 부린 까닭은, 당시의 조선사회의 관료문화와 제도 때문이었다. 조선시대는 인물 천거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엄혹했다. 누군가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임명된 자가 죄를 범할 경우, 그를 천거한 인물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하도록 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던 사회였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吏典 薦擧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끝까지 "내가 사람을 잘못 쓴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조의 무리한 보신책은 난 후에 공신도감에서 공신들을 선정할 때도 이어져서,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르고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책정하도록 강요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2. 임란 이후의 조선시대 : '희대의 영웅 이순신'

임진왜란이 무수한 생령을 죽음으로 내몰고 이 강산을 초토화하고 막을 내린 이후, 종전된 지 2년만인 1600년에 임진왜란을 다룬 최초의 문학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곧 윤계선의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인데, 현재 이 작품은 '한일 양국에서 임진왜란을 문학화한 최초의 본격적인 창작소설'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44쪽

<달천몽유록>은 27명의 임진왜란의 순국 충장들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먼저 크게 다루어진 영웅이 곧 '대장군 이순신'이다. 전 국민이 전쟁의 진상과 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기에 나온 작품인만치, 그것은 당시 민중들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된다. 이후 <임진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이 계속 나왔는데, 이순신을 한몸으로 국난을 막아낸 희대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정조 시대에 가서는 왕실에서도 이순신에 대해 최고 최상의 예우를 하고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는 등 이순신 현창에 적극 나섰다.

3. 일제시대 : '하늘이 내신 성웅 이순신'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한민족의 지식인들은 새삼 '이순신'에 대해 주목하고 이순신을 민족에게 널리 알리기에 나섰다. 3백년 전에 일본을 통쾌하게 이긴 이순신을 상기함으로써 민족 정기를 북돋으고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도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고찰해도, 당시의 절박감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독립을 잃자, 박은식 선생은 1907년에서 1908년에 걸쳐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월보(月報)>에 <이순신>에 대해 썼고 국망 이후에 망명지인 상해에서 <이순신전>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신채호 선생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나라가 망한 지 3년 만인 1913년에는 수교사(水交社)에서 자신들이 편집한 <이순신전>을 출판했다. 친일파란 비난을 들었던 춘원 이광수조차 <동아일보> 지면에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1931. 6~ 1932. 4)
이 시대에 쓰여진 '이순신전'에 나오는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성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4. 해방 이후 70년대 말까지 : '하늘이 내신 성웅 이순신'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의 고통의 여진이 남아 있던 해방 공간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여전했다. 일제시대에 쓰여진 여러 저자 여러 판본의 <이순신전>들이 속속 간행되었을 뿐 아니라, 해방 뒤에 새로 쓰여진 이순신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은상의 <이충무공 일대기>(1946), 박태원의 <이순신 장군>(1948), 김태진의 희곡 <이순신 장군>(1948), 강남형의 <이순신>(1953), 최석남의 <이순신과 그들>(1961), 최인욱의 <성웅 이순신>(1970), 강철원의 <성웅 이순신>(1972), 이원수의 <이순신 장군>(1973)…. 이런 저작물의 공통점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이러한 흐름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순신 현창'에 나선 것과 궤를 같이 하여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5. 현대 : 다시 등장한 '명장 원균, 원균의 공을 가로챈 이순신'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980년대 초반에 돌연 390년 전에 이순신을 폄훼하던 소리들이 그대로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울산대 교수인 이정일이 논문 및 잡지 기사를 통해 '원균 명장론'을 제기한 것이다. - <원균론>, <역사학보> 89집, 1981년 역사학회. <원균은 억울하다>, <마당> 1982년 12월 - 그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원균 지지파들이 이순신을 폄훼했던 발언들 및 선조가 원균을 극력 두호한 발언과 난 후에 원균이 '일등공신'으로 선정된 사실 등을 근거 삼아 원균은 '불 같은 성미의 저돌적인 용장' 으로서 이순신과 쟁공하던 사이였고, 이순신을 신격화시키는 과정에서 부당하게 악역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균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민족적 영웅으로 부각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점점 더 악인으로 되어 갔던 것이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초반에 그런 주장이 등장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매우 새롭고도 충격적인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이순신 현창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과 반발 때문에 그런 주장을 크게 반긴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원균의 지지파인 서인의 거두들이 선조 앞에서 거듭 되풀이했던 주장으로서 <선조실록>에서 눈에 익도록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긴 전란기간 중에 가장 뛰어난 수군 장수로서 조선 최대 최강의 군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이순신을 계속 견제하고 싶어 했던 임금 선조가 그대로 받아 야멸차게 활용했던 소리들이기도 했다.


이정일의 주장이 처음 나온 이래, '원균 명장론'은 논문, 잡지 기사, 소설, 1994년에 상영되었던 KBS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최근 진행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제작 등등…, 여러 장르를 망라하여 거듭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두 똑같이 치명적인 맹점이 들어 있다. '원균이 명장'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명장의 이름에 걸맞는 전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균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독자적으로는 '명장'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전공을 거둔 전투가 전혀 없는 무장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원균은 이순신과 쟁공하던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원균은 명장"이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원균은 앞장서서 나가 잘 싸우고도 이순신에게 전공을 가로챔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전공이 곧 원균의 전공"이라고까지 강변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거둔 뛰어난 승첩은 모두 이순신의 지휘 아래서 거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자면 필수적으로 이순신을 폄훼하고 그의 전공을 빼앗아다 원균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결국 4백년 전에 이순신에게 억울하게 뒤집어 씌워져서 그의 운명을 모질게 뒤틀어놓았던 오명이 현재 똑같이 되풀이되면서 다시 이순신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균의 전공'을 새롭게 조작해내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때 조선 수군 최초의 승첩은 이순신 함대가 경상도 바다로 진격하여 임진년 5월 7일에 거둔 옥포승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먼저 원균이 전란 초에 독자적으로 경상 우수영 수군을 지휘하여 '적선 10척을 분멸' 또는 '적선 30여 척을 격파'함으로써 최초의 승첩을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김탁환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소설 <불멸>에서 함경도의 여진족 관계 전투 양상과 전공을 모두 조작해내고 '당대의 명장'이라고 불렸던 온성부사 신립과 함경 북병사 이일이 세운 전공을 모두 원균의 전공으로 가로채는 황당하고도 치명적인 역사 왜곡까지 감행했다. 이렇듯 원균에 유리한 것이라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고, 이순신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조차 확대 포장하는 것이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즐겨 쓰는 서술방식이다.

원균이 살아 있던 당대에 시도된 '이순신 죽이기'는 군권 장악을 둘러싼 갈등과 당파싸움이 개제된 정치적 다툼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군권문제와는 전혀 상관 없는 현대인들이 왜 이처럼 다시 '이순신 죽이기'에 나선 것일까. 그 이유는 극도의 '상업주의'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미 세상에 정립된 평가인 '훌륭한 이순신'을 말해서는 주목을 끌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사악한 이순신'을 내세워서 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분석과 견해는 정곡을 찌른 근거와 타당성을 지녔다고 보여진다. 만약 요즘의 '이순신 죽이기'가 순수하게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이라면, 절대로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역사 왜곡까지 감행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II. 1980년대 이후 이순신 폄훼에 가담한 소설들

앞에서 보았듯 1980년대 초반에 머리를 든 '원균 명장론'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소설의 형식으로도 소화되기 시작했고, 대표적인 소설가들로 고정욱과 김탁환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쓴 소설의 공통점은, 원균측이 이순신에 대해 퍼부었던 비난과 모함들을 모두 진실인 것으로 취급하여 소설의 기본 얼개로 삼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새로운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

1.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 (상/하 전2권, 여백, 1994)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책 표지 및 대대적으로 퍼부은 책광고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큰 활자로 박아 실어서 세상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원균의 4백년 원혼이 우리를 부른다"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 모함하는 聖雄 이순신…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의 사실입니다"

고정욱이 이 소설에서 시도한 것은 문자 그대로 '원균 명장론'이다. 선조때 나온 원균측에서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추켜세웠던 말과 주장들이 소설의 기본토대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전개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써, 고정욱이 소설책 표지에서까지 강력 주장했던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하는 성웅 이순신"이란 문구와 관련된 대목을 고찰해 본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직후, 이순신에 대해 제기된 비난 중 하나가 "이순신이 원균을 두고 '원균은 자신의 십여 세 된 첩의 아들까지 군공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다'면서 불쾌해 했다"는 것이었다. 그 비난은 당시 이순신을 죽일 죄목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던 선조에 의해서 '이순신을 죽여야 할 죄 3가지' 중 마지막 세번째 죄로까지 꼽혔었다.

(선조 30년(정유년, 1597) 3월에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취조당하고 있던 이순신을 두고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로서 직접 3가지 죄목을 지정해 준 것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이야기가 난 김에 짚고 가자면, 바로 그 죄목들이야말로 '당시 이순신이 얼마나 원통하게 핍박을 받았으며 얼마나 억울하게 죽을 자리에 몰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인데, 당시 선조의 말은 이러했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요. 적을 좇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요. 남의 공을 빼앗기에 이르러 남에게 죄를 씌웠으니(이것은 원균의 나이 많은 아들을 어린아이라고 하여 공을 가린 글을 올린 일을 가리킨다 - <선조실록> 자체의 주, 작은 글씨로 부기되어 있음), 제멋대로가 아닌 게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게 없는 죄(無非縱恣無忌憚之罪)이다. 이토록 허다한 죄상이 있으니 법에 부쳐야지,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법에 물어 죽여야 한다. 신하된 자로서 속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 계묘조)

현재 '원균 명장론' 주창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실록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3가지 죄목의 해석조차 제대로 못해서 4가지 죄목으로 만들고는 제멋대로 네번째 죄상을 창작해 만들어 붙여서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한때 이순신의 생사를 가를 뻔했던 죄목들인 만큼 여기서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첫번째의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 석달 전인 선조 2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부산 왜영 방화사건관계이다. 그날 밤에 부산의 왜영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왜군이 큰 피해를 보았는데,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신의 짐을 운반하는 공무로 부산에 갔었던 수군 장수인 거제 현령 안위 등이 돌아와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그 대화재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자신들이 은밀히 모의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내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그 사건을 임금에게 보고하고는 안위 등에게 포상해주기를 청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 임진조). 그런데 바로 다음날 삼남 도체찰사로 남쪽에 내려가 있던 우의정 이원익의 지시를 받고 올린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는데, 장계의 요지는 "부산 왜영의 대화재는 이원익의 군관이 미리 계획하여 성사시킨 것으로서, 이순신은 그런 내막을 모르고 부하에게서 보고 받은 대로 장계한 것이기에 그 장계에 있는 대로 이순신의 부하들에게 상이 돌아가면 안되고, 이원익의 군관에게 포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일 계사조). 바로 이것이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무군지죄'의 전모이다. 이순신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거나 이순신 자신에 대한 포상 요청이 아니요, 부하의 보고를 믿고 그대로 상주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반드시 죽어야 할 죄'로 꼽힌 것이다.
요즘 첫번째의 '무군지죄'라는 죄목을 두고 새로이 '역적죄'라고 칭하는 논자들이 더러 있는데, 전혀 사실과 맞지도 않고 전혀 가당치도 않은 천부당만부당한 과장이다. 역적죄는 임금을 내치고 국권을 잡는 역모를 꾸미거나 그런 역모를 실제로 실행하다 잡힌 경우에만 붙이는 대죄의 명칭인 것이다. 선조 자신이 '조정을 속임으로써 임금을 무시한 죄'라고 명백하게 규정해 놓았던 죄목과 바꿔치기하여 이순신에게 그런 대죄의 오명을 씌운다는 것은 실로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작태이다. 그런데 김탁환 역시 이순신이 잡혀가는 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신을 아주 비천하고 비루하게 묘사하면서 이순신에게 '역적죄' 운운하는 오명을 씌우고 있으니 읽기조차 참담하다.


바로 그때 원균이 나대용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이순신의 머리를 틀어쥐고 좌우로 흔들어댔다.
"꺼억꺼어억."
이순신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천하를 호령하던 통제사의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는 그냥 두어도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시골 촌부에 다름 아니었다.
원균은 이순신을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섰다. 오른손에 상방참마검을 쥐고 살이 두툼하게 오른 양볼을 실룩이며 주위를 노려보았다. 장졸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요동하는 것이라곤 그들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작은 횃불뿐이었다. 원균은 상방참마검을 높이 들고 격문을 읽듯이 어둠에 묻힌 한산도 앞바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잘 봐라. 이놈은 임금을 속인 역적이다.(하략)"
(<불멸> 3권, 340~341쪽)

조선시대에는 반좌법(反坐法)이 엄중하게 시행되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증이나 무고로 남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대하여, 피해자가 받은 또는 받을 해와 동일한 정도의 해를 형벌로써 시행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남을 역적죄로 몰았다가 사실이 아님이 들어나면 그 자를 역적죄를 범한 것과 동일한 형량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지금이 조선시대였다면, '이순신이 역적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죄를 처벌하는 극형으로 처벌되었을 것이다.

두번째의 '적을 좇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는 널리 알려진 대로 적군인 '요시라의 반간계'에 기인한 누명이다.

세번째의 '제멋대로가 아닌 게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게 없는 죄(無非縱恣無忌憚之罪)'가 바로 고정욱이 말하는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하는 성웅 이순신 운운'에 관련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새롭게 등장한 사건도 아니었다. 이미 삼년 전인 선조 27년 11월에 경연에서 거론되어 "그 일은 원균이 잘못한 일이었다"는 호조판서 김수(金?)의 보고까지 있었던 사건인데(<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12일 병술조), 이때 재론되면서 이순신의 죄로 둔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이순신으로서는 매우 원통한 오명에 해당했다. 이순신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분명 '원균의 첩이 낳은 어린 아들'까지 군공자로 올려 상을 받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원균측이나 현재의 '원균 명장론' 주장자들은, '원균의 본처가 낳은 장성한 아들인 원사웅'을 내세워서 그 문제 제기를 이순신의 죄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 모함하는 聖雄 이순신"이라 하여 이순신을 저열한 인격을 가진 자로 모질게 매도하고 야유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고정욱이 <원균 그리고 원균>에서 이 사건을 다룬 대목은 이렇다.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러 내려간 사람은 이덕형이었다. 그는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했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자였다. …(중략, 주:이 부분에서, 이덕형의 훌륭한 임품을 말해주는 유명한 ‘제호탕’의 일화를 소개)… 그런 이덕형인지라 남쪽으로 내려와 원균과 이순신을 불러다 대질을 할 때 두 사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원균 그리고 원균> 하권, 175~176쪽).

고정욱은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아버지를 닮아 날카롭고 사나운 용모를 하고 있는 홍안의 용사였다"면서, 이덕형(李德馨) 앞에서 이순신과 원균이 '원균의 아들 문제'로 대질신문을 받고 있는 자리에 원균의 아들 원사웅이 들어오자 이덕형은 "오, 대단한 헌헌장부요"하고 감탄한다. 고정욱은 원사웅까지 등장하여 이순신의 모함을 명백하게 증명해낸 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뒤에 이렇게 서술했다.

"(이덕형과 원균과 원사웅 앞에서)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확인도 안 해본 소문을 진실로 알고 언급했다가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원균 그리고 원균> 하권, 177쪽).

이로써 고정욱은 선조 당시 해당 사건에 대한 엄정한 진상조사를 거쳐서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한 이순신의 죄상이 명백하게 밝혀졌었음을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원균과 함께 이덕형에게 불려가서 대질심문을 받기는 커녕, 이덕형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음이 다음 해에 이덕형 자신이 쓴 장계의 내용에 의해서 극명하게 밝혀져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에, 체찰사(體察使:지방에 전쟁이나 군란이 있을 때 왕을 대신하여 그 지방에 나아가 군사관계 업무 전체를 두루 총찰하던 군직(軍職), 재상이 겸임함)로서 당시 전라도에 내려가서 머물고 있던 좌의정 이덕형이 현지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일부이다.

<좌의정 이덕형의 장계에,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 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데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에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 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은 유제독(劉提督, 주:명나라 육군 제독)이 힘을 다해 적과 싸우려는 뜻이 없다는 걸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를 전적으로 수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舟師:수군)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서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 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조차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조).

2. 김탁환의 <불멸> (전4권, 미래지성, 1998)

김탁환은 고정욱보다 한 차원 더 심화된 악의적인 부당한 역사 왜곡을 통해서 '원균 명장론'을 내세우고 있는데, 당연한 결과로 이순신을 매우 비루하고 비열하며 초라하고 유약한 인물로 만들었다. 김탁환의 경우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고찰한다.


Ⅲ. KBS 대하 드라마 '이순신'의 원작소설들이 지닌 문제


현재 KBS 텔레비전에서는 '이순신이 주인공인 100회짜리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 드라마는 이순신을 다룬 두 개의 소설, 김탁환의 <불멸>과 김훈의 <칼의 노래>(전2권, 생각의 나무, 2001)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번 KBS의 이순신 드라마 제작작업은 여러 모로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 원작인 두 소설 모두 이순신과 원균의 행적과 업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다가, 더구나 <불멸>의 경우에는 매우 악의적인 역사 왜곡까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김탁환의 <불멸>이 원작 중 하나로 선정된 사실 자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였지만, 보도에 따르면 담당 제작진은 이 드라마에서 "원균은 명장"임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KBS에서는 이미 1994년에도 '원균 명장론'을 기본구조로 한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방영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대하 드라마를 통해서 다시 '원균 명장론'의 확산에 나선 것이다.

소설과 달리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는 대하 역사 드라마는 매우 직접적으로 국민의 역사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이나 악의적인 역사 왜곡을 동원한 이순신 폄훼 작업을 감행해서는 안된다. 현재 일본이 자행하는 여러 분야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우려와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판에,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우리 역사를 마구 왜곡하고 훼손하면서 민족의 진정한 영웅을 추하게 일그러뜨리고 욕보여서야 되는가. 이제 원작인 두 소설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여 검증해 보면서, '이순신'의 참모습과 당시 역사의 실체를 냉철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칼의 노래>를 먼저 살펴본 다음에 <불멸>을 고찰한다.

1. 김훈의 <칼의 노래>

이 소설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이 자신의 내면 풍경과 심정을 독백체로 토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소설구조상 실제 역사에 대한 고증을 치밀하게 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고 쓴 듯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원균을 '명장'이라고 추겨 세우지도 않고 '무능한 악장'이라고 지칭하지도 않는다.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없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있어서는 안될 오류들이 있다.

1) 정유재란이 발발한 뒤 이순신이 체포될 때의 정황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 김훈은 이순신이 체포된 이유로서 '요시라의 반간계'를 거론하고,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률이 나를 기소하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칼의 노래> 1, 34쪽)고 썼다.
그러나 이순신은 '즉각' 기소되지 않았고, 기소한 자가 '권률'도 아니었으며, 집요하게 탄핵한 이들이 '비변사(備邊司: 중종시대에 변경지방의 방비 업무를 관장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처음 설치되었는데 차츰 전국의 군사관계 업무 전체는 물론 국정까지 관장하는 상설의 최고권력기관으로 변하여 고종시대 초기까지 존재했음) 문인 관료들'도 아니었다. 요시라의 반간계가 현안으로 대두하자 조정에서 이 문제를 크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선조 30년(정유년, 1597년) 1월 23일부터였다. 여러 날을 두고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 통제사직의 개편 등 여러 갈래의 대책이 논의되다가, 2월 4일에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게 하라"고 주청한 것이 체포로 이어졌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 27일, 28일조. 2월 4일조)


2) 체포되던 당시 이순신의 행적 묘사도 부정확하다.

김훈은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칼의 노래> 1, 25쪽) 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은 가덕 해역에서만 전투를 한 게 아니었다. 선조 30년 2월에 함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까지 나가서 부산의 왜적들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덕 바다에 머물러 그 일대의 적을 소탕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조, <이충무공전서> 하권 46쪽, 충무회 발행, 참조). 체포되기 직전인 정유년 2월 10일에 이순신이 수군 단독으로 감행했던 '부산진공작전'은 뒷날 원균의 죽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바, 그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고찰해 본다.

또한 이순신을 체포한 관원은 '의금부 도사'가 아니라 왕명을 받고 내려갔던 '선전관'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선조가 직접 내렸던 체포명령이 사관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실상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임금이) 김홍미(金弘微)에게 전하여 이르기를, '이순신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되, 원균과 교대시킨 뒤에 잡아오라고 일러 보내라. 또한 만약 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싸우고 있으면 잡아오기에 비편(非便)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오라는 말도 함께 일러 보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 6일 정묘조)


3) 원균의 마지막 전투의 양상과 장소 및 죽은 장소가 사실과 다르다.

김훈은 (권률은) "원균을 불러들여서 곤장 50대를 때려서 칠천량 바다로 내어 몰았다."(?칼의 노래? 1, 35쪽)라며, "하룻밤 하루 낮의 전투였다. 나중에 들으니, 적선 1,000여 척이 방사대형으로 날개를 펴면서 달려들었고, 한산 통제영에서 거제도 앞바다까지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피곤한 군사들을 원균은 적의 방사형 대열 중앙부에 일자진(一字陣)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이다."(<칼의 노래> 1, 26쪽)고 했다. 원균의 최후에 대해서는 "갑옷마저 잃어버린 원균은 거제도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는 칼 한 자루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뭍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기술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실상은 어떠했던가. 당시 도원수 권률이 곤장까지 치면서 수군통제사 원균을 내몬 곳은 '칠천량 바다'가 아니라 '부산 앞바다'였다는 것은 모든 사료들이 일치하게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전투기간도 '하루밤 하루 낮'보다 길었다. 지도를 보면 금세 알 일이지만, 한산도와 거제도는 바로 이웃한 섬이라서 '하루 종일 배를 저'을 만한 거리가 전혀 아니다. 원균의 함대는 부산 앞바다까지 갔다가 그대로 배를 돌려서 칠천량 바다까지 '하루 종일' 노를 저어왔기에 지쳐서 전투력을 잃었던 것이다.

또한, 원균은 '거제도의 산 속'에서 '칼 한 자루도 지니지 않고' 죽은 게 아니라, '고성 땅'에서 '칼을 지니고' 죽었다. 당시 전투 현장에는 왕명으로 현지에 내려갔던 선전관 김식(金軾)이 있었다. 김식은 조선 수군이 모두 무너질 때 원균과 함께 상륙하여 달아나서 살았는데, 그가 상경하여 임금에게 직접 보고한 당시의 실상은 이러했다.


"…우리의 주사(舟師, 수군)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수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및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탈출하여 상륙하였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짚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조)


4) 이순신이 '장계에 쓴 적병의 숫자가 죽을 죄목'이 아니었다

김훈은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칼의 노래> 1, 135~136쪽)고 썼는데, 이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이 잡혀와 고문을 당하며 조사 받고 있을 때, 선조는 그의 죄에 대해서 직접 명백하게 '3가지 죄목'을 정해 주면서 "죽여야 마땅하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 그 3가지 죄목 중에 위와 같은 죄목은 전혀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조)

2. 김탁환의 <불멸>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문제점은, 저자가 미리 자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이순신과 원균의 캐릭터에 맞추느라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황당하고도 해괴한 역사 왜곡이 마구 감행되어 있을 뿐더러, 당시의 제도와 그 운용에 대해서도 어두워서 실제와 전혀 다른 묘사도 자주 등장한다. <불멸>이 지닌 문제점을 세 단계(어린 시절, 함경도 시절, 임진왜란)로 나누어 고찰한다.

1) 어린 시절

김탁환은 '원균은 명장'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캐릭터를 사내답고 씩씩하고 호쾌하고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설정했다. 김탁환은 그런 설정에 맞추기 위해서, 아예 원균의 어린아이 시절부터 왜곡하기 시작했다. 원균은 이순신과 유성룡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서울 건천동의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아이들의 대장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살인 원균이 열 살인 유성룡과 이요신(이순신의 형)의 도전을 받아들여 전쟁놀이를 하는 장면을 만들어 넣었다. 전쟁놀이의 결과, 원균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유성룡과 이요신은 원균의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훔치고, 추운 겨울날임에도 불구하고 원균이 명에 따라 바지를 벗어 엉덩이를 드러내야 했으며, 바지를 안 벗으려고 버티다가 강제로 옷을 찟기고 있는 일곱살 짜리 약골인 코흘리개 이순신을 구하려 나섰다가 유성룡이 원균에게 죽도(竹刀)로 심하게 맞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불멸> 1, 240~242쪽).

이 대목은 그냥 읽는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다. 뒷날 유성룡이 원균의 벼슬길을 막아대서 원균이 출세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설정되어 있는 장면이다. <불멸>에는 유성룡이 어린 시절에 그렇게 당한 원한으로 훗날 원균의 벼슬길을 계속 모질게 가로막았기 때문에 원균의 출세가 늦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성룡, 이놈! 네놈이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로 내 앞을 이다지도 가로막는단 말이더냐.
원균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십여 년 전, 건천동에서의 나날들이 눈에 선했다.
작고 볼품없는 죽도를 휘두르며 저잣거리를 달리는 아이들, 긴 댕기머리를 휘돌리며 진흙탕을 뒹굴고 감나무를 오르는 아이들, 글공부보다 들판으로 질주하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체구에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원균은 그 아이들의 대장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이요신과 유성룡이 원균에게 도전장을 냈다. 열두 살의 원균은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그들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불멸> 1, 240쪽)

그러나 이런 설정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유성룡의 연보에 따르면, 유성룡은 ..년에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나서 고향에서 자라다가 13세때인 갑인년에 서울로 와서 동학(東學: 서울에 있던 사학의 하나로서 동부에 있었음)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講讀:글의 뜻을 설명하고 토론하면서 읽음)했다. 당시 조정에서 처음 과거보는 유생들에게 모두 사학(四學)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하게 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유성룡은 이때 동학에 다니면서 강독에 참여하여 강관(講官)으로부터 "반드시 큰 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김탁환의 <불멸>에 나오는 것처럼, 유성룡이 10세 때 원균과 전쟁놀이를 하다가 져서 바지를 벗기우고 또 죽도로 맞은 것 때문에 원균에게 두고두고 원한을 품은 나머지 원균의 벼슬길까지 막는 일 같은 것은 애당초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유성룡이 서울에 올라온 13세때의 일이라면 가능했을 것인가를 살펴보면, 그래도 김탁환의 <불멸> 식의 그들의 어울림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보았듯, 유성룡의 경우, 그가 서울에 올라와서 동학에서 강독에 참가하여 과거공부를 하던 중이니 원균과 전쟁놀이를 하며 엉덩이를 까내린다는 일은 전혀 가당치 않다. 또한 원균의 경우라 해도 그 때는 원균의 나이 15세일 때니, 동네 조무라기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남의 바지를 까내리게 할 때는 이미 지난 때인 것이다.

더구나, 사료를 살펴 보면, 유성룡이 전쟁놀이에서 져서 모욕을 당하고 죽도로 맞았던 원한으로 원균의 벼슬길을 막았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왜곡이다. 그 근거가 명확하게 <선조실록>에 들어 있다. 원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파면된 일과 관련된 사안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績)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4일 신미조)


이런 <선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원균은 전에 어느 지방의 수령으로 있다가 평가가 나빠서 파면되었고, 파면 된 지 반년 뒤인 이때에 품계를 뛰어올린 승진인 전라좌수사직 임명을 받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간원이 원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반대한 논거는 '원균 자신이 수령으로서 거둔 나쁜 성적' 때문이었고 그 반대를 선조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니, 원균의 출세를 막은 것은 원균 자신의 과거 행적이었을 뿐, 결코 '유성룡이 어렸을 때 맞으면서 품은 원한 때문에 원균의 앞길을 가로막은 탓'이 아니었다.

아무튼 원균의 뒤를 이어 새로 유극량이 전라좌수사직에 임명되었다가 그도 사헌부의 논계에 의해 2월 8일자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시 임명된 장수가 이순신으로서 그 직을 지니고 임진왜란을 맞았던 것이다.

2) 함경도 시절

김탁환은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담하게 감행한 역사 왜곡의 또다른 축은 '원균의 함경도 시절'이다. 원균은 함경도의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일에 큰 공을 대단하게 세웠고 그때부터 '육진의 수호신'으로 불렸으며, 니탕개 무리의 토벌과 시전부락 토벌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고, 또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원균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그런 원균에 대해서 이순신은 평생 열등감을 안고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도를 '이순신 자신이 하는 말'이란 장치를 통해서까지 자꾸 강조한다. 녹둔도 전투로 북병사 이일에게 소환되어 문초받던 이순신이 '관아가 흔들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는 말의 서도가 이러하다.
"원부사가 녹둔도에서 대승을 거둔 후 야인들은 녹둔도를 멀리했소이다. 육진 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지목되어 둔전을 짓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불멸> 1, 32쪽), 또한 "육진 시절, 그는(원균) 나의 우상이었소."라느니, "원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진족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던 때도 있었느니라"(<불멸> 3, 18쪽)와 같은 표현들이 소설 전체를 도배하듯 했다. 이토록 대단한 원균의 ‘함경도 신화’의 구도는 <불멸> 전4권 전체를 통하여 유지되는 기본 골격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조조 당시 북변의 사정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온 해괴하고도 황당한 날조에 해당하고, 니탕개 토벌전의 영웅인 온성부사였던 신립과 시전부락 토벌전의 영웅인 함경 북병사 이일의 전공을 가로채서 원균에게 넘긴 우스꽝스러운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

김탁환이 자행한 여진족 토벌관계에 대한 역사 왜곡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선조 당시 북변에 대한 역사를 고찰한다.

선조 치세 당시 선조 16년(1583) 이전에는 북변에서 일체 전투가 없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인 듯, 임진왜란의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꼬박 28년 동안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승평의 시절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돌연 선조 16년(1583, 계미년)에 북쪽 야인(野人) 추장인 니탕개가 2만여 기를 거느리고 변경을 침략함으로써 수십 년을 이어온 평화가 깨졌다. <한국군제사(韓國軍制史)>는 이때의 일을 <선조실록> 등 각종 사료의 기록들을 통합 정리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명종 10년의 을묘왜변 이후 니탕개란(泥蕩介亂)이 일어난 선조 16년까지 약 30년 동안은 이제까지 대소 규모로 침입을 끊이지 않던 남쪽의 왜인이나 북쪽의 야인이 거의 잠잠한 상태이어서 이른바 승평의 세월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조 16년(1583) 정월과 5월 양차에 걸친 두만강 일대 야인의 추장인 니탕개의 난은 이와 같이 해이하여진 국방태세에 일대 경종이었다. ……(니탕개는) 동왕 16년 정월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인부(隣部)를 동원하여 경원부로 입구(入寇), 아산/안원 양보(兩堡)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은 파직 무신 오운 박선 양인을 서용하여 조방장으로 삼고 경중의 용사 80명을 거느리고 먼저 전지에 부방하게 하고, 이어서 경기감사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켜 도순찰사로 함경남도 병사 김우서를 방어사로 임명하여 출동하게 하였다." - <한국군제사> 근세조선 전기편, 372~373쪽, 육군본부, 1968

명종 10년의 을묘왜변은 서기로 1555년이요, 선조 16년의 계미년 니탕개란은 서기로 1583년이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28년' 동안 전혀 전투가 없는 승평의 세월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니 선조가 등극한 이래 그 때까지 전혀 국경지방에서의 전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계미년 1월에 국경지방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이웃 부족들까지 대거 동원하여 쳐들어와서 경원성을 함락시켰다.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받은 변경의 흉보를 대한 선조가 통치자로서 느낀 충격은 매우 컸던 모양이다. 경원성(慶源城)과 안원보(安遠堡)가 함락되었다는 북병사 이제신의 치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계미년 2월 9일인데, 선조는 그 날로 즉각 “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경원부사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의 목을 군진 앞에서 베어서 군율을 진작시키라”는 명을 내렸다.(<선조실록> 선조 16년 2월 9일조)

그런데 김수와 양사의의 목을 벨 선전관이 미처 출발하기 전에 다시 북병사의 치계가 당도하여 "1월 28일의 싸움에서 김수가 고군분투하여 적 40여 급을 베었다"는 승첩을 알렸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그 공을 들어 김수를 살리기 위해서 "속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김수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고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선조에게 건의했으나 즉각 단호하게 거부되었고, 결국 선전관이 내려가서 2월 26일에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선조실록> 선조 16년 윤2월 5일조). 니탕개 무리는 5월에도 다시 대거 침공했었는데, 당시 온성부사로 있던 신립이 대승첩을 거두면서 난을 평정했다.

<한국군제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니탕개란의 평정에 있어서 유공하였던 장군은 신립이었고, 그 공으로 그는 임란이 발발할 때까지 근 10년 동안 일국의 명장으로서 온 국민의 촉망을 일신에 모우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때에 신립이 명장이 된 근본요인의 하나가 새로 발명된 승자총통(勝字銃筒)의 이용에 있었음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니탕개란의 직후인 선조 16년 6월에 이미 왕은 ‘고(故) 병사 김지가 신제(新製)한 승자총통은 이번 북방사변(니탕개란)의 격퇴에 있어서 크게 유효하였다’고 칭예(稱譽)하면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관직을 주었으며" - 위의 책, 459~460쪽
라고 하여, 온성부사 신립이 승자총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니탕개란을 진압했음을 명확히 밝혔다. 니탕개란이 평정된 뒤에도 순찰사 정언신은 계속 함경도에 머물면서 사변에 대비했고, 그가 두만강 하구쪽에 있는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됨으로써 이듬해인 갑신년(1584) 봄부터 녹둔도에 목책을 둘러치고 군사를 두어 땅을 개간하게 하여 둔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녹둔도 둔전은 조산만호 이순신이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때인 정해년(1587) 추수철에 갑자기 녹둔도에 쳐들어온 야인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조정의 명에 의해 둔전이 폐지되었기에, 불과 4년 동안만 운영되었다. 이때의 녹둔도 침입에 대한 응징으로, 조정에서는 다음 해인 무자년(1588) 1월에 북병사 이일로 하여금 함경도 군사 및 서울의 군사들까지 동원한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서 여진족의 근거지인 시전부락(時錢部落)에 대한 대토벌을 단행하게 했다.)

그렇다면 북변 여진족 토벌과 원균의 관계는 어떠한가. 사료를 고찰하면, 원균과 이순신 모두 계미년과 무자년에 단행된 여진족 토벌작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원균의 경우를 <원균 행장>과 <선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고찰한다.

우선 <원균 행장>을 보면, 원균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서 조산만호로 있을 때 번호(藩胡)를 토벌하는 데 공이 있으므로 부령부사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이내 종성부사로 자리를 옮겼고,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서 시전부락을 격파하였다." (<원균정론> 290쪽, 이재범, 계명사, 1983)고 되어 있다. 또한 선조 29년(1596)에 경연석상에서 선조가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의 됨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원균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그때 오갔던 이야기가 <선조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상(上)이 이르기를
"원균에 대해서는 계미년부터 익히 들어왔다.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김수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로 있었을 때 어사 성낙이 장계하여 포장하였습니다."
(중략) 조인득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찌기 종성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이 매우 박실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9년 10월 21일조)


두 자료를 종합해 보면, 원균은 계미년(1583)에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니탕개난 토벌전에서 참가하여 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승진했고, 종성부사로 있을 때 시행된 시전부락 토벌전에도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조 당시의 조선 무장들은 선조의 즉위 이래 첫 전투였던 계미년 대토벌작전을 통해서 처음으로 무장으로서의 역량과 명성을 세상에 알렸다. 계미년 이전에는 외적과의 전투 자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공을 떨쳐 이름을 낼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가 원균을 두고 "계미년부터 익히 들어왔다(自癸未年熟聞之矣)"고 말한 것이다. 즉 계미년 이전에는 원균 역시 외적과 싸운 일이 전혀 없었음이 선조의 언급으로도 명확하게 증명된다.

당시 북변의 정세 및 녹둔도 둔전의 유래와 존재 시한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탁환은 전혀 다른 역사를 날조해 놓았다. 원균이 조산만호였다는 것만으로 원균 시절에도 녹둔도에 둔전이 있었을 것으로 지레 착각하고 원균의 전공을 엄청나게 날조해냈다.

이물에 서서 녹둔도를 바라보던 이경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부령부사를 거쳐 종성부사로 가 있는 원균 장군의 첫 벼슬이 조산만호였다지?"
귀밑까지 뻗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임경번이 협선을 뒤따르는 갈매기떼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렇습죠. 그때도 소인은 녹둔도의 군관이었습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녹둔도에서 야인 삼백여 명을 몰살시킨 전투를 알겠구나."
"알다 뿐입니까? 소인이 직접 참전했습죠."
"원부사가 홀로 목책을 뛰어넘어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냐?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말이다."
임경번은 신바람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믄입쇼. 그땐 정말 대답했습니다. 원장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자 소인을 비롯한 장졸들도 한꺼번에 목책을 넘어 뒤를 따랐습니다. 오랑캐놈들,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지 허둥지둥 해안으로 달아나느라 아우성이었습니다. 원장군께서는 장검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놈들의 목을 쳤습죠. 수급(首級, 전투에서 벤 적군의 머리) 삼백 두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아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야인들은 이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습죠."
"과연 원부사는 용장임에 틀림없구나. 지금의 조산만호 이순신은 원부사와 비교해서 어떠한가?"
임경번은 눈을 끔벅끔벅거리면서 잠시 말을 접었다.
"말해 보아라. 원부사에 비해 어떠한가?"
"어찌 감히 원부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원부사는 육진의 수호신이옵니다."
(<불멸> 1, 23~24쪽)

참으로 어이 없는 황당한 역사 왜곡이다. 원균을 이순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균의 생애 첫 승첩으로서 '녹둔도에서의 대승리'이라는 가공의 역사를 날조해내고 원균에게 거창하게도 '육진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하필 '녹둔도'를 원균이 처음으로 거둔 대승첩의 전장으로 설정한 것에는, 이순신이 선조 20년(정해년, 1587)에 녹둔도에서 당한 실패와 대비시키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 원균이 조산만호로 있던 계미년에 녹둔도에는 둔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원균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 뛰어넘을 ‘목책’도 없었고, 물론 지키고 있는 조선 군사도 일체 없었던 텅빈 섬이었다. 따라서 그리로 여진족이 쳐들어올 이유도 없었고, 쳐들어온 일도 전혀 없었다.

계미년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아 순찰사로 현지에 내려가서 난의 평정을 총지휘했던 정언신은 난이 평정된 뒤에도 계속 현지에 남아서 방어체제를 살폈고, 그해 연말에는 북변 방수 전략의 하나로서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받은 결과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뒷날 그가 병조판서로서 조정에 있던 때인 선조 20년(1587) 9월에 녹둔도에 여진족의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변보가 서울에 도달하자마자 정언신은 책임을 통감하고 먼저 자신을 처벌해줄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병조판서 정언신이 아뢰기를,
"녹둔도에 논밭을 일군 일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호들이 침범해 와서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 먼저 신을 다스려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4일조)

당시 선조는 정언신이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한 요구에는 좋은 말로 만류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녹둔도 둔전을 폐지했다. 불과 4년 동안 둔전이 경영되었고, 이순신이 당했던 녹둔도 전투를 계기로 폐지되었던 것이다.
이 자료 하나만 보아도 녹둔도 둔전의 역사의 전모를 알 수 있고, 김탁환이 주장하는 원균이 여진족 수급 3백 두를 거둔 녹둔도의 대승리 운운 하는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허구인지를 알 수 있다.
선조가 즉위한 이래, 선조 16년 계미년 1월에 돌연 경원부로 침공하여 경원성을 함락시켰던 니탕개 무리를 응징하는 대규모 토벌전이 실시되기 전에는 조선의 무장들과 여진족과의 사이에서 전투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원균이 생애 최초로 참여했던 실전은 '계미년 이전의 녹둔도 전투'가 아니라 '계미년의 니탕개 토벌전'이었다. 그리고 원균은 거기서 공을 인정받아 부령부사로 승진했다는 것인데, 단편적인 언급만 있을 뿐 그에 직결된 상세한 자료는 아무 데도 없다. 당시 니탕개 토벌전에서 거둔 대승첩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역사에 큰 활자로 기록된 장수는 신립이다.
여기서, 김탁환이 원균을 위하여 선조조 여진족 토벌에 관한 실제 역사를 얼마나 심하게 왜곡하고 해괴하게 날조했는지 그 실례를 들어본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봄부터 여름까지 여진족 추장 니탕개는 삼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나들었다. 곡식과 의복을 빼앗기 위한 일시적인 노략질이 아니라 육진을 한꺼번에 삼키려는 전초전의 성격이 강했다. 남의 땅을 빼앗기는 쉬워도 이미 얻은 땅과 성을 지키기란 어려운 법이다. 온성부사 신립이 두만강을 건너자고 했을 때 경원부사 이일과 부령부사 원균만이 그 제안에 동조했다. 나머지 삼진의 부사들은 개죽음을 자초할 뿐이라며 발을 뺐다. (중략) 원균이 앞장을 섰고 이일이 뒤를 따랐다. 신립은 맨 뒤에 처져서 멈칫거리는 군졸들의 목을 쳤다.
(<불멸> 1, 243쪽)

김탁환이 묘사한 계미년의 니탕개 무리에 대한 토벌전은 발단도 성격도 진행도 모두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임은 물론, 온성부사 신립을 빼고는 가장 기본인 인적사항마저 사실과 다르다. 계미년 1월에 니탕개란이 벌어졌을 당시, 경원부사는 이일이 아니었다. 니탕개에게 경원성을 함락당한 죄로 왕명에 의해 목이 잘려 처형된 김수(金璲)였다. 경원부사 김수가 조정에서 내려간 선전관에 의해 처형되어 죽은 날이 2월 26일, 그 후임으로서 4월 7일자로 새로 임명된 경원부사가 이일이었다. 임명 당시 이일은 전라수사였으니 (<선조실록> 선조 16년 4월 7일조), 그가 실제로 함경도에 부임한 날은 그로부터 훨씬 뒤였을 것이다.

또한 니탕개의 난 당시에 원균은 조산만호였지, 부령부사가 전혀 아니었다. 당시 부령부사는 장의현(張義賢)이었는데, 장의현은 니탕개 무리와의 전란에서 큰 공을 세워서 가자(加資: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까지 되면서 현재 <선조실록>에 이름이 당당히 올라있다. 선조 16년 2월에 니탕개의 난이 일단 평정된 뒤에, 선조가 승전원에 전교하여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에 대한 포상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는데, 그 안에 당시 부령부사이던 장의현에 대한 항목이 들어있다.

<전교하였다.
"신립은 가자하는 것이 옳으니 교서를 지어 하유하도록 하고, 그의 어미에게 쌀과 콩을 합하여 20석을 내려라. 부령부사 장의현은 따로 건원(乾原)을 지키면서 반적이 와서 포위하자 고군으로 혈전 끝에 적을 물리쳤고, 훈융첨사 신상절은 반적이 와서 포위했을 때 힘을 다하여 막았을 뿐만 아니라 또 용기를 내어 출병하여 신립과 합세하여 적을 쳐부수고 돌아왔으니, 이 두 사람의 공도 작지 않다. 장의현은 가자할 것이며, 신상절은 4자급을 뛰어넘어 어모(禦侮: 주, 정삼품 당하관의 품계)로 삼고 준직(準職: 주, 당하관으로서 가장 높은 당하 정삼품의 벼슬)을 제수하라.">
(<선조실록> 선조 16년 2월 14일조)

당시의 사료가 이처럼 지극히 명명백백하게 존재하여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탁환은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역사 왜곡을 마구 자행한 것이다.
아무튼 계미년의 대토벌전의 효력은 상당하여 그 후 4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니탕개 무리에게 성을 함락당한 죄로 경원부사 김수와 판관 양사의가 계미년 2월에 참형을 당해 죽은 일이 변경의 조선측의 장수와 군사들을 크게 경계시켜서 예리하게 날이 선 경각심을 지니고 방위에 진력하게 했을 것이고, 조선의 변경을 침략했다가 혹독하게 토벌당한 기억이 여진족측의 침공의지를 누른 것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지속된 평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 20년(1587,정해년) 가을이 되자, 계미년 대토벌 이래 조용히 지내던 여진족이 다시 침구를 개시했고 이때 가장 큰 물의를 일으킨 변란이 곧 선조 20년 9월에 이순신이 조산만호로서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겪었던 녹둔도 침공이었다. 여진족이 돌연 녹둔도에 쳐들어 와서 지키던 조선 병사들을 죽이고 다수의 군사와 민간인들을 포로로 끌어간 것이다. 선조 치세 중에 북변에서 니탕개의 난 다음에 두번째로 큰 물의를 일으킨 이 변란으로 조선측이 입은 피해는 병사 11명이 죽고 포로로 잡혀간 군사와 민간인이 도합 160여 인이었다.(<선조실록> 선조 20년 11월 10일조, 11월 21일조, 12월 26일조)

계미년에 니탕개의 난 평정작전을 지휘했던 순찰사 정언신의 발의로 녹둔도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시작한 지 4년째인 선조 20년, 그 해에 처음으로 둔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곡식이 익은 9월에 한창 추수하고 있던 목책 안에 바람처럼 달려든 여진족들은 군사 11인을 죽이고 160여 명에 달하는 군사와 민간인을 납치해갔다. 둔전관인 이순신은 이미 전부터 군사의 수효가 너무 적어서 녹둔도 방어상태가 매우 취약한 상태임을 걱정하여 함경북도의 군정을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인 북병사 이일에게 공문을 보내어 군사를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적침을 만난 것이었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이순신의 <행록>과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기록을 보면, 당시 적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울타리를 포위하고 붉은 모전을 입은 자 몇 명이 앞장서서 지휘를 하며 달려오므로 이순신이 활을 쏘아 연달아 쏘아 명중시켜 붉은 옷 입은 자들이 모두 땅에 쓰러지자 적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이순신이 이운룡과 함께 추격하여 사로잡혀 가던 자 60여 인을 도로 빼앗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조정에 보고되었고, 이순신은 이 사건에 대한 처벌로서 "백의종군하면서 공을 세우라"는 왕명을 받고 백의종군하다가 이듬 해 1월에 단행된 시전부락 토벌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결과 백의종군 처분을 면제받았다.
이순신의 이른바 ‘녹둔도 패전’의 전말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김탁환은 이 사건에도 당치 않게 원균을 끼워넣어 원균을 이순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만드는 등 참으로 해괴한 역사 왜곡을 감행했다.
김탁환의 <불멸>에 따르면,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에서 맨 먼저 한 일은 적을 친 것이 아니라 겁을 먹고 달아나려던 자신의 부하 군졸에게 활을 쏘아 목을 꿰어 죽인 것이었다.(<불멸> 1, 27쪽) 그 뿐인가. 김탁환은 당시 함경북병사가 주재하는 병영이 종성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뒤에 북병사 이일의 소환을 받은 이경록과 이순신이 종성으로 간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당시 원균은 종성부사로서 북병사가 그들을 신문하는 현장에 참석하여 있다가 이순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중략) 여봐라! 경흥부사 이경록을 옥에 가두고, 어서 저 여우 같은 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당장!"
"예이!"
나졸들이 이순신에게 달려들었다. 선거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형님, 어쩌시렵니까? 이대로 불귀의 객이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두만강을 건너 숨어버릴 것을.
"멈추어라!"
이일의 오른편에 서 있던 건장한 체구의 장수가 나졸들을 제지했다. 밤송이 수염이 턱과 뺨에 제멋대로 돋아난 종성부사 원균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이일과 이순신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아니, 원부사! 왜 이러는 거요?"
이일은 원균의 만류가 뜻밖이라는 듯 따져 물었다. 북병사의 군령을 부하 장수가 가로막는다면 치도곤을 당할 터이지만 원균은 예외였다. 수많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지난 여름 무산 전투에서는 이일의 목숨까지 구했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이곳은 원균이 군정을 관장하는 종성이 아닌가.
(<불멸> 1, 33쪽)

이 장면 이후로, '원균은 이순신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란 말은 <불멸> 전4권 도처에 나온다. 원균이 이순신을 두고 "동향 선배이자 육진에서 목숨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에게 이게 무슨 짓인가? 의리도 용기도 없는 인간!"이라고 분노하는 장면까지 나올 정도이다(<불멸> 2, 49쪽). 또한 이순신 스스로도 "원균은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자주 뇌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모두 한갖 넌센스에 불과한 황당무계한 날조에 불과하다. 우선 앞에 인용한 문장 속에 들어있는 오류를 검증해 보자.

첫째, 당시 북병사의 병영은 두만강쪽의 종성이 아니라 동해쪽의 경성(鏡城)에 있었다. - <한국군제사> 근세조선 전기편, 166쪽, 육군본부, 1968. - 당연히 이순신과 이경록이 소환되어 간 곳은 종성이 아니라 경성이었다. 종성부사인 원균이 멀리 경성의 북병영에서 있었던 북병사의 신문자리에 참가할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이다.

둘째, 이일이 부하 장수인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가로막는 것을 용인한 것은 원균이 '지난 여름 무산 전투에서는 이일의 목숨까지 구했기 때문'이고 '더군다나 이곳은 원균이 군정을 관장하는 종성'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전해 여름에 무산은 물론 육진 전체에서 아무런 전투도 없었고, 당연히 원균이 북병사 이일의 목숨을 구할 일도 없었다. 더우기 '이일이 이순신을 신문하던 장소가 원균이 군정을 관장하는 종성땅이라서' 원균의 말을 존중했다는 것은 앞에서 보듯 어처구니없는 넌센스에 불과한 소리이다.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조에는 이때의 전투와 관련하여 이순신의 이름이 두 군데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북병사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그릇쳐서 전사 10여 명이 피살되고 106인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잡아 가둠)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0일조)

<이경록과 이순신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6일조)

비변사에서 이순신을 잡아다가 취조하려는 것을 막은 것은, 원균이 아니라 선조였다. 그리고 선조 자신이 처벌도 무장에 대한 처벌 중에서 가장 가벼운 처벌인 '백의종군'으로 조치한 것이다. 본래 조선에서는 북변의 방위에 대한 규정 중에 변민(邊民:변경의 백성) 피납에 관한 규정이 있었으니 "조종조로부터 변민 한 사람이라도 납치되면 주장(主將)은 곧 그 도에서 백의종군하도록" 되어 있었다(<중종실록> 중종 7년 5월 7일조). 그런데 녹둔도 사건에서는 11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160여 명이 납치된 대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변민 한 사람이라도 피납되었을 때 적용하는 가장 가벼운 처벌인 ‘백의종군’의 처분을 내린 것이다. 아군의 군사가 전사하고 많은 인명이 피납된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패전한 전투가 아니라고 판정해준 것이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의미

여기서 당시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내려진 '백의종군' 처분에 대해서 밝힐 것이 있다.
김탁환의 <불멸>에는 이순신이 녹둔도 패전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평생을 두고 수치스러워하며 열등감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에게 예전 부하들이 마구 반말을 하고 이순신을 '졸병'으로 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백의종군'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데서 온 오류이다. 현재 김탁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백의종군'이 대단한 중형에 해당하는 처벌이고 졸병의 대우를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조선왕조에서 죄를 범한 무장에게 가했던 처벌은 여러 종류로서 각기 차등이 있었다. 가장 중형이 니탕개의 난에서 보듯 장수에 대한 '처형'0이었고, 그 아래로는 귀양을 보내는 '유배'가 있고, 그보다 약한 처벌은 '파면'이었다. 백의종군은 '파면'보다도 더 미약한 아주 가벼운 처벌로서, 정확히 말해자면 '보직 해임'의 처벌이었다. 그래서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으면 '흰옷'을 입고 자신이 근무하는 곳에서 계속 근무해야 했는데, 실제 사례를 고찰해 보면 보직을 해임당한 상태로 흰옷을 입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직을 그대로 지니고 근무하면서 옷만 백의를 입게 하는 사례도 있는 등 일종의 '정서적 처벌'로 활용되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그 사람의 신분과 위계를 표시하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관리로서 관복이 아닌 '백의'를 입고 집무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충분한 징계 효과가 있는 처벌 방식이었다. <난중일기>를 고찰해 보면,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자신의 종을 거느리고 다니고 그가 묵는 곳에 각급 관리들이 와서 현안을 보고하고 다량의 녹봉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백의종군'의 실상을 알려주는 산 자료이다.
현재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 등 조선조의 법률관계 서적을 모두 고찰해 보아도 '백의종군'에 대한 법적인 명문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고찰해 보면, '백의종군'은 실제 통치상 매우 활발하게 활용되었던 처벌양식이었다. <실록>에는 시대를 가리지않고 관리들이 '백의종군'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백의종군'의 실체와 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일 행궁의 시위가 너무 적어 체모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궐내의 시위 장사와 의금부 관원 등을 모두 백의종군시켜 처벌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5월 22일조).


<양사가 아뢰기를, "사변이 일어난 뒤로 군율이 해이해졌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장수를 일일이 벌 주기가 어려워 매양 백의종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미 극도로 구차해졌습니다.">(<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18일조).

"군율을 위반한 변장과 수령들을… 백의종군시키는 것도 형벌을 감해주는 것인데"(<선조실록> 선조 30년 8월 15일조)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가기)를 회피한 정명해를 전례에 따라 백의종군토록…"(<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2월 1일조).

"임금이 기우제 지내려고 북교(北郊)에 거둥할 때 길을 잘못 인도한 훈련대장 장붕익을 백의종군토록…"(<영조실록> 영조 1년 7월 23일조).

[녹둔도 침공의 단호한 응징: 시전부락 토벌]

이순신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지 석달 만인 무자년(1588) 1월,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녹둔도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서 함경 북병사 이일로 하여금 함경도의 군사 뿐만 아니라 서울의 군사까지 포함된 도합 2천5백여 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근거지인 시전부락을 치게 했다. 이 때의 토벌작전에서 아군은 1월 14일에 출진을 개시하여 캄캄한 이경에 행군하고 삼경에 두만강을 건너서 15일 날이 밝을 무렵에 시전부락을 들이치기 시작하여 궁려(窮廬:호인들이 치고 사는 장막) 2백여 좌를 태워버리고 여진족 380여 급, 말 9필, 소 20수를 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면서 여진족의 본거지를 초토화하고 승전했다. 이순신도 이 토벌작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 처분을 면제 받았다. <선조실록>에 보면, 이 토벌전의 승첩으로 이일은 전국적으로 명장의 이름을 얻었고, 특별 포상까지 받았다.(<선조실록> 선조 21년 1월 27일조, 5월 20일조)

선조는 녹둔도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 무장들인 이경록과 이순신에게는 백의종군의 가벼운 처분을 내리고, 침공한 여진족에 대해서는 '되로 받은 것을 말로 갚듯이' 단호하게 응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자신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북변에서 벌어진 두번째의 외침에 해당하는 녹둔도 침공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컸던 모양이다. 궐 안에서 승정원과 옥당과 한림원 주서 등 측근의 신하들에게 [과녹둔도전장유감(過鹿屯島戰場有感: 녹둔도 싸움터를 지나며 느낀다)]라는 제목을 주어 각기 칠언율시 2수씩을 지어 바치게 명하고, 가장 잘 지은 검열 한준겸에게는 상으로 아다개(阿多介:털요)를 하사하고 그 이하도 차례대로 상을 베풀었다.(<선조실록> 선조 21년 1월 10일조)

[함경도 시절의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세간의 평가]

함경도 시절에 녹둔도 전투로 '백의종군'의 아픔을 겪었고 벼슬은 고작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의 지위로 그쳤던 이순신 및 그런 아픔은 전혀 겪지 않았으며 위계는 종3품의 높은 품계인 '부사'로까지 출세했던 원균. 무장으로서의 그들의 역량에 대한 당시의 임금과 조정의 평가는 어떠했던가.

김탁환의 <불멸>에는 곳곳에서 이순신을 두고 "문신들에게 아부하여 단숨에 벼슬이 오른 장수"라고 지칭한 표현이 나온다.(<불멸> 4, 150쪽) 유성룡에게 아부하여 출세했을 뿐, 자기 실력으로 출세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반면 원균은 실력은 뛰어난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유성룡이 어린 시절에 폭행을 당한 보복으로 끈질기에 원균의 벼슬길을 막아 출세가 늦었다는 것이다.(<불멸> 1, 240쪽 등)

과연 그러한가. 객관적인 사료를 통해 검증한다.
선조 21년(무자년, 1588) 1월에 북병사 이일의 지휘 아래 단행된 시전부락 대토벌전 이후 북변은 다시 조용한 평화상태로 들어갔다. 이때의 대토벌은 선조가 남쪽 왜작의 침입에 총력 대처하기 위한 사전조치로서 여진족을 철저하게 섬멸하여 후환을 방비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전해인 정해년(1587) 2월에 왜적이 지난 32년간 지켜졌던 평화를 깨고 돌연 전라도 흥양과 가리포 해안에 침공하여 녹도 총관 이대원이 전사하는 등, 남쪽 국경의 방위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조는 남북 양쪽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이때 여진족의 본거지 시전부락을 철저하게 초토화시킨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단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하는 문제가 해결되자, 선조는 남방 왜적을 대비하는 방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국경 방위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유능한 무장의 확보였다. 여진족의 시전부락 대토벌이 단행된 지 일년 뒤인 선조 22년 1월, 비변사에서 무신(武臣)을 불차채용(不次採用:관계의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줌)하겠다면서 추천하라고 했다. 조정의 이름 있는 신하들이 각기 자신들이 평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무장들의 이름을 제출함으로서 수십 명의 무장들이 추천되었다. 이때 원균을 추천한 사람은 전혀 없는 반면, 이순신을 추천한 대신은 두 명이었으니, 곧 이산해와 정언신이다. 여기서 정언신이 이순신을 추천한 것은 특히 의미가 크다. 정언신은 계미년 니탕개의 난의 당시 현지에서 토벌을 총지휘했던 순찰사였기에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북도 장사들의 역량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당시에는 병조판서로서 전국의 군정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탁환의 <불멸>에는 원균이 니탕개의 난과 시전부락 토벌전을 거치면서 신립과 이일과 함께 단짝이 되어 서울에 와서까지도 극도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김탁환의 근거 없는 창작임을 증명하는 것이, 이때 신립이 추천한 장수 명단이다. 신립은 장수들을 6명이나 추천했는데도, 그 안에 원균의 이름은 없다. 신립이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료인 것이다.
또한 이순신과 원균의 장수로서의 인물됨에 대한 그와 같은 판단은 임금인 선조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선조 22년) 7월 28일에 좌부승지 황우한이 비변사에서 올린 밀계를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그것은 하삼도(下三道:충청/경상/전라의 삼도)의 병사와 수사를 잘 선택해서 올리라는 임금의 전교를 받은 비변사가 올린 계달이었다. 그 밀계 안에서 비변사가 '하삼도의 병사와 수사로서 적당한 사람'으로서 추천한 사람은 '서득운, 이옥, 이빈, 이혼, 신할, 이경, 조경'의 7명이었는데, 선조는 비변사의 밀계에 대한 대답으로 내린 전교에서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물론 여기서도 원균의 이름은 일체 등장하지 않았다.(<선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조)
이러한 사례들은, 이순신이 계미년의 니탕개 토벌전과 정해년의 녹둔도 전투 및 무자년의 시전부락 토벌전 등, 북도에서 벌어졌던 대 여진족 전투들을 통해서 무장으로서 자신의 성가를 대단히 높이면서, 위로 임금과 아래로 신하들의 주목까지 모두 받는 장수로 크게 성장했음을 웅변한다. 이 사료들은 또한 김탁환이 <불멸>에서 원균을 두고 "랑캐 토벌전으로 '육진의 수호신'이란 칭호까지 받은 명장"이라고 강력하게 내세운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 임진왜란

① 임란 최초의 승첩은 어느 전투인가

그간 역사는 임진왜란 최초의 조선군 승전 장수는 이순신이고, 승전 전투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자신의 휘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건너가 싸운 '임진년(1592) 5월 7일의 옥포 해전'이라고 기록해 왔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은 그것을 부인한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이 처음 바다를 건너온 날인 4월 13일 자정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4월 14일에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싸워서 30여 척을 격침시켰다는 것이다.(<불멸> 1, 296~308쪽). 그렇다면 시기로나 규모로나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첩이다. 과연 사실인가.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닌 역사의 왜곡에 불과하다.
당시 일본 침략군은 4월 13일 오후에 경상좌수영 관할 바다로 들어가서 아무런 전투 없이 부산포 건너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14일에 부산을 치고 15일에 동래를 함락시키느라고 경상우수영 바다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의 14일 오전까지도 원균은 전쟁이 일어난 것조차 몰랐다. 13일에 수많은 왜선이 부산포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응봉(鷹峯) 봉화대의 보고를 받은 가덕진 첨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이 띄운 급보를 14일 오전에 받은 뒤, 당시의 제도에 따라 급보를 받았다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그 사실을 인근의 이순신에게도 통보하면서 "필시 세견선(歲遣船:해마다 대마도 왜인들이 보내던 무역선)인 듯하나"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 임진년 4월 14일의 원균이었다.(이순신,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15일 술시 계본, '인왜경대변장(因倭警待變狀)')
일본군의 공격으로 경상좌수영과 연안 고을들이 모두 무너진 뒤, 경상우수사 원균은 막대한 적의 군세가 경상우수영으로 덮쳐오는 듯하자 화급하게 경상우수영의 전함과 전구(戰具)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 적과 싸워서 물리칠 수 없으면 무기와 군량을 물에 넣거나 불태워서라도 적에게 넘겨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장수의 책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배 한 척에 몸을 담아 전라도 경계에 가까운 사천(泗川)쪽 바다로 피했기 때문에 경상우수영 소속의 군사 1만여 명은 아무런 전투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 뒤 원균은 이순신에게 "본도의 수군이 적선을 추격하여 10척을 분멸(焚滅)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상적(相敵)할 수 없어서 본영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알리면서 경상도로 건너와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비슷한 자료가 <선조실록>의 선조 25년(임진년) 5월조에 들어 있다. 4월 하순에 경상도에 내려갔던 선전관 민종신(閔宗信)이 5월 10일에 평양 행재소의 어전에 나가 복명하는 중에 원균에게서 들은 말을 전하느라고 "원균은 바다에 나가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원균이 스스로 주장했던 이 구절들이 훗날 뜬소문의 형태로 더러 전해졌는데, 김탁환의 <불멸>은 그쪽을 선택하여 '원균의 적선 30여 척 격파설'을 바탕으로 소설의 기본틀을 세웠다.
그러나 원균이 임진년 4월에 이루어냈다는 '적선 10척 분멸설'과 '적선 30여 척 격파설'은 오로지 위에 언급한 짧은 단편적인 문장들 뿐, 전투 자체에 대한 상세한 근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원균 자신이 경상우수영을 무너뜨린 직후의 대혼란기에 단지 두 번 아무런 근거도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주장했을 뿐, 그 후로는 이순신과 치열하게 '쟁공'하던 시절에조차 원균은 그런 주장을 전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원균을 마냥 치켜세우면서 이순신을 마구 깎아내리던 정유재란 초기의 어전회의에서도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수전에서 최초의 승첩을 거두었다'는 주장은 원균 지지자들측에서조차 전혀 주장된 바 없다.
반면에 왜적이 밀려오기도 전에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기록은 <선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공식 기록들과 당시대인들의 각종 기록들 도처에 남아 있다.
"흉칙한 적들이 형세를 떨쳐 패를 갈라 도적질하며 한 패는 연해안으로 들어가 남김없이 깨뜨리되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버리고 수군 진영으로 말하면 오직 우수영과 남해와 평산포 등 네 진 뿐이온데, 이제 듣자오니 우수영도 또한 함몰을 당했다고 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장계, <임진장초> 선조 25년 4월 30일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미시본(未時本))

"(경상)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 해포에 우거하고 있고"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원균은 수군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禹應辰)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경상우도 도순찰사 김수의 치계,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조)

"(전란 초에) 원균이 거느린 선척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시를 그릇 받들어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으므로(元均所領船隻 適於其時 謬承朝廷指揮 多數燒沈), 이순신의 온전한 군사가 아니었던들 장한 진세를 만들어 큰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약포집>)

이상의 자료들은 모두 당시의 장계와 신구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떠도는 풍문을 듣고 기록한 야사나 개인문집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왕에게 직접 올리는 장계나 신구차는 절대 거짓을 쓸 수 없는 문서이고, 그 안에 의도적인 것은 물론 몰라서거나 또는 부주의로도 거짓을 썼다면 응분의 처벌이 따르는 공문서들이다.

이순신의 경우는 그가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경상도로 구원하러 갈 진격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올린 공문인 장계이고, 김성일과 김수의 글은 임진왜란 초기에 그들이 당시 경상우도의 큰 벼슬아치들로서 현지에 있으면서 직접 파악한 현지 사정을 임금에게 급히 알린 장계이었다. 더구나 정탁이 신구차를 올릴 때는 이순신은 잡혀와 감옥에 있던 비상시였다. 당시 원균은 신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위세를 떨치고 있고 임금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공언하던 때인데, 그토록 긴박하고 불리한 시기에 정탁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 임금에게 올린 신구차의 문장 속에다 거짓으로 "전란 초기에 원균은 조정의 지휘를 잘못 받들어서 거느린 선척들은 많이 불태워 침몰시켜 버렸었다"고 쓸 수가 있는가. 삼척동자라도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것이다.
더구나 이순신의 경우, 정유년에 체포되었을 때 그를 죽여야 할 죄목 중에 하나가 '원균의 아들의 나이를 틀리게 말해 그 공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전에 이순신이 임금에게 보내는 장계에다 '(경상도의) 육군과 수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원균의)우수영도 함몰되었다'고 써보냈던 것이 만약 거짓이었다면, 이순신을 죽이자고 들 때 '원균의 아들 나이 문제'와 같은 구차한 사안을 드는 대신, 바로 그 장계 구절을 문제 삼아 원균을 모함하여 그 전공을 가린 장계를 올린 죄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탁환은 상세한 전투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단편적인 풍문을 기록해놓은 개인적인 야사의 기록인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그 근거라면서 "원균은 이순신의 함대가 오기 전에 독자적으로 삼십여 척의 적을 분멸"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결정적인 판별 기준이 또 있으니, 전란이 모두 끝난 후에 원균의 군공을 심사하던 공신도감의 기록이다. 심사 초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올리라는 선조의 특별지시를 거부했던 공신도감에서 선조에게 그 이유로 댄 것이 "원균은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無軍將)로서 해상 대전에 참가했고, 뒤에는 패하여 수군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었다. (<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조). 또한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극심해진 뒤에 선조의 앞에서 원균 지지파와 이순신 지지파들이 각기 두 사람의 전공을 거론하며 거듭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때조차, 원균 지지파들 입에서 "전쟁 초기에 원균이 독자적으로 '적선 10척' 또는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여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라는 주장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도 강력한 방증이 된다.
이 문제를 이리 상세하게 고증하는 것은, 이것이 ‘원균 명장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내세우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1994년에 KBS 텔레비전에서 제작 방영했던 '원균 명장설' 성향의 다큐멘터리 역시 첫머리를 원균이 적선 10척을 용감하게 격파하는 전투장면으로 시작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했었다.

[장계의 내용은 어떻게 세상에 전해지는가]

여기서 잠깐 '장계 제도'의 문제를 짚어본다. 김탁환은 <불멸>에서 이순신을 야비하고 간교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서 '장계' 문제를 거듭거듭 거론한다. 원균이 연명장계를 보내자고 하자 이순신이 나중에 보내자고 하고 먼저 몰래 보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원균의 공을 빼앗느라고 몰래 장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내 말 잘 들으시오. 옛 인연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요. 다시는 날 의식하지 마시오. 그대의 적은 나 원균이 아니라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들이오. 나의 전공을 훔치는 것은 용납하겠으나 내 앞에서 함께 연명 장계를 올리자느니 하는 수작은 부리진 마시오. 또 한 번 그런 속임수를 쓴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라고 하면서 이순신이 쓴 장계 초본을 보자고 요구하는데, 이순신이 초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초본은 없소이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숨기고 계속 내놓지 않자, 원균이 "그대가 쓴 장계는 한 달 안에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오. 조정 대신들을 거치면 한 달 안에 그대가 쓴 장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말이오.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소." 운운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불멸> 2, 122~124쪽)
장계는 임금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장계가 임금에게 도달할 때까지는 장계를 쓴 사람만 그 내용을 알 뿐 다른 사람은 일체 알 수 없고, 다만 그 장계에 대한 회답인 유시가 내려왔을 때 유시 속에 언급된 내용에 의해서 짐작하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조정에 있는 대신들을 통해서 알아보면 한 달의 시차를 두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장계제도가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 시대의 사료들을 분석해 보면, 자신이 보낸 장계의 내용을 즉각즉각 인근 지역 책임자들에게 통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에는, 그런 장계운용제도에 의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원균 자신이 임금에게 보낸 장계의 내용을 인근 지역 책임자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는 공문 안에 그대로 다시 기록해놓고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렸음'을 통고한 대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이순신 또한 원균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공문을 받았음을 다시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 임금과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가지 사안을 여러 갈래로 상호 교차하여 검증하고 확인하는 조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장초> <인왜경대변장>, 임진년 4월 15일 술시본 참조). 이것은 아마도 사실과 다른 허무맹랑한 말이 아무도 모르게 장계로 올려질 경우에 발생할 행정의 오도와 혼란과 낭비를 막기 위하여 상호교차 확인과 감시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운용했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장계제도가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음은, 이순신의 죽을 죄 3가지 중에서 첫째 죄목으로 꼽혔던 '부산 왜영 대화재사건 관계'에 관련된 이순신 및 이원익측의 장계들에 의해서도 극명하게 증명된다.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였고, 이원익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임을 띠고 남도에 내려가서 수륙군을 모두 통괄하면서 왜적에 대한 방어를 총지휘하고 있던 이순신의 상관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거제 현령 안위 등이 사신의 복물선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갔을 때 왜영을 불태웠다고 보고했다면서 그들의 보고 내용을 그대로 임금에게 알리면서 포상해주기'를 청한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정유년 1월 1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월 2일에, '이순신의 그 장계는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올린 것으로서 진상은 그와 다르다. 그 일은 이원익이 자신의 군관에게 명하여 도모하게 하여 실행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이 청한 대로 그의 부하를 포상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이원익측의 장계가 조정에 도달했다. 이원익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임금에게 아뢰라는 지시를 받은 이조좌랑 김신국이 올린 보고였다. 그것을 본 선조는 "이순신이 조정을 속이려 했다"면서 격노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조, 1월 2일조). 다음 달에 이순신을 체포하여 서울로 끌어다가 투옥시킨 선조는,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죄 세 가지 중에서도 첫번째 죄로 꼽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측의 장계 내용과 두 장계가 조정에 도달한 날짜를 고찰해 보면, 그 장계를 보낸 뒤에 이순신이 상관인 이원익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의 장계를 임금에게 보냈음을 즉각 통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벌어질 리 없었던 사태 진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이순신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이순신을 아낀 사람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그런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는 것을 이원익이 사전에 알았더라면 사실을 설명하여 그런 장계 자체를 올리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인데, 사후에 알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토록 비통한 비극의 빌미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첫 승첩인 옥포해전 뒤에 원균이 요구한 연명장계를 거부한 까닭은, '연명'이란 형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연명한 사람들이 함께 장계의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이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한 연명 장계는 올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균이 그 전투에서 행한 행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이순신은 연명 장계를 거절하고 따로 자신이 보고 겪은 바를 그대로 기록한 장계를 보내었고, 그 일로 두고두고 끈질기게 원균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김탁환이 주장하고 묘사한 것처럼 장계의 내용을 원균 전혀 모르게 몰래 보내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모르게 장계를 보낸다는 것이 제도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이순신은 '왜적의 간자(스파이)'를 사칭한 사기극을 벌였는가

남해현은 경상우수영 소속으로서 전라좌수영의 바로 이웃 고을이다. 이순신은 휘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를 구원하러 가던 때, 먼저 남해현에 사람을 보내서 "현령이 군선을 정비하여 중로까지 나와서 전라도 수군을 맞이해 달라"고 통고하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낯선 경상도 바다의 물길을 안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남해현은 '적이 급하게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성 안에 인적이 없고 곡식창고와 병기창고의 문도 열려 있었다"고 복명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왜군이 들어가 주둔하면 인접한 전라도까지 위험해지겠다 싶어서 군관 송한련에게 "정말 남해현 성 안이 모두 비어 있으면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곡식창고와 무기창고를 불사르라"고 명령해서 보낸 바, 송한련이 가서 창고들을 태우고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일을 자신의 <난중일기>에 명확하게 기록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불태운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자로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 그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보고했다 (<임진장초>의 '근계위대변사(謹啓爲待變事)',임진년 4월 30일 미시 계본).

그런데도 김탁환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해괴하게 왜곡했다. <불멸>을 보면, 이순신은 부하들과 비밀히 짜고 남해현의 무기고와 곡물창고를 태운 뒤에 왜군들의 방화로 위장하여 "불지른 건 '왜군의 간자'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다들 속아넘어갔으나 원균과 그의 부하들은 지혜롭게도 목격자를 찾아내어 데리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찾아가서 대질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목격자의 증언 때문에 이순신측이 할수없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자 이순신을 향하여 "천벌을 받소이다, 장군. 그렇게 덮어버리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소이까?" 라느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이까?" 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간악하다"느니 "왜놈보다 더 비열하다"느니 하며 마구 야단치고 이순신의 부하들의 멱살을 잡고 수염을 잡아당기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 크게 혼내주고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은 꼼짝못하고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불멸> 2, 44~122쪽)
어째서 김탁환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을 이처럼 비루하고 추악한 꼴로 왜곡하는가. 소설의 세부 묘사를 보면, 김탁환은 이순신이 몸소 기록해놓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서 남해현 창고 방화사건을 취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그 부하들이 그 사건을 숨기기 위해서 몰래 짜고 '왜적의 간자'까지 사칭하는 사기극을 벌여 세상을 속이다가 원균과 그의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혼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③ 이순신은 정유년에 부산에 진격하지 못했는가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1597년(정유년)이다. 그는 생애 최대의 고난과 슬픔은 물론 최상의 영광을 모두 이 해에 겪었다. 그런데 1월의 정유재란 발발부터 2월에 이순신이 체포되고 7월에는 원균이 전사하는 등, 극히 중요하고 긴박했던 상황이 두 소설에 모두 매우 부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이순신이 정유년 2월 10일에 직접 함대를 이끌고 다시 부산 앞바다에 진격했었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때의 부산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초기인 임진년에 이순신 함대가 부산의 왜영을 치러 갔던 부산 전투와 다른 전투임)을 두 소설의 저자 모두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경우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해도 특유의 소설 구조상 큰 무리 없이 넘어간다. 그러나 김탁환의 <불멸>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치욕적인 결점이 된다. <불멸>에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이순신은 너무 두려워서 끝내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까닭이 바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죄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극력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멸>에는 잡혀간 이순신 대신 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도원수 권율을 상대로 "이순신은 부산을 치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잡혀간 것이오이다. 그러나 소장은 지금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불멸> 4, 99쪽). 그러나 그것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왜곡된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다.

하긴 이순신이 정유년 2월에 감행한 수군 단독의 부산 왜영(倭營) 공격전은 위의 두 소설가만 모르는 게 아니다. 실로 기이한 일이지만, 정유재란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도 전문적인 이순신 연구가들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관련 자료들이 충분히 또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그런 실정이다. <선조실록>의 선조 30년(1597)조에 실린 기록들을 날짜별로 정리하면서 살펴 보면 정유재란 당시의 긴박했던 정황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1월 13일: 지난 수년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교섭이 깨진 결과, 풍신수길의 재침 명령을 받은 일본 가등청정 부대가 부산에 상륙. 다시 발발한 왜란 때문에 선조와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온나라 백성이 모두 전쟁의 공포에 빠져들었다.
1월 22일: 전라병사(全羅兵使) 원균이 수군의 부산진공작전을 건의한 장계가 궁중에 닿았다. 원균은 상관인 통제사 이순신과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1595년 3월에 육군인 충청병사로 임명되면서 수군을 떠났고, 1596년 8월에 역시 육군인 전라병사로 전임되어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全羅兵營)에 주재하고 있었다. 이젠 육군 장수인 그가 수군작전을 건의한다는 것은 월권에 해당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바로 이 건의가 뒷날 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주, 현재의 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여 명이나 200명씩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면, 가등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이 장계는 몹시 선조의 마음에 들었다. 조선 육군의 전투력을 전혀 믿을 수 없던 당시 실정으로 선조가 바란 것이 바로 이런 식의 해결책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조)

1월 27일: 선조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신하들이 이순신과 원균을 두고 크게 다투는 설전이 다시 벌어졌다. 신하들은 당파별로 나뉘어 동인은 이순신을 지지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선조가 원균을 수군으로 돌려보낼 뜻을 굳히고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라고 선언한 것이 이 날이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

1월 28일: 선조는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로서 승지 유영순에게 전교하여 다음과 같이 원균에게 하유하도록 명령했다.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바다의 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선조는 이 날만 해도 '경상도 통제사'직을 신설해서 원균에게 주고 이순신은 전라충청 통제사로서 원균과 같이 수군에 있게 하는 선에서 처리하려고 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사발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2월 4일: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라"고 주청했다.
2월 8일: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이 함께 수군에 복무하게 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원균에게 수군 전체를 맡기고 이순신은 처단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이순신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운운.

2월 10일: 한산도의 이순신은 임금이 이미 자신을 통제사직에서 파면하고 체포령을 내려서 선전관이 잡으러 내려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 날 해뜰 무렵에 함대를 거느리고 통제영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진격했다. 전투 현장인 경상도의 무장들인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경상우수사 배흥립을 함대에 동행시켰다. 함대는 이 날 미시에 부산 앞바다에 닿아 왜적과 싸우고 날이 저물자 절영도에 정박했다가 다음날 다시 싸웠다. 왜적들은 육지에 올라가서 일체 바다에 나오지 않았기에 해안에 정박해 있는 적의 함선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공격하는 싸움이었다.

2월 12일: 이순신은 함대를 돌려 귀영길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순신 함대는 가덕도 바다에 가서 주둔하고 일대의 왜적들을 치기 시작했다.

2월 17일: 남쪽에 내려가 있던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의 부산 진격작전에 관해서 올린 보고가 이 날 처음으로 조정에 도착했다. 관련 보고는 2월 20일, 2월 23일 계속 조정에 올라왔다.(<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조). 이순신은 적을 치고 있던 가덕도 앞바다로 찾아온 선전관에게 체포되어 함께 한산도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선전관과 함께 온 원균에게 한산도에 있는 모든 물품을 인계했다.(<이충무공전서>)

2월 26일: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의하면,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사무 인계를 마친 이순신은 이 날 죄인의 신분으로 한산도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이충무공전서>)

3월 4일: 이순신은 초저녁에 서울에 도착하여 옥에 수감되었다.(<이충무공전서>)

3월 13일: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고문당하면서 신문 받고 있는 이순신의 죄목 3가지를 적시해 주면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도록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는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게 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

3월 20일: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2월 28일자로 올린 장계가 궁중에 도착했다. 내용은 지난 달에 있었던 이순신 함대의 부산 공격을 매우 헐뜯는 것이었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나아갔다 물러섰다 하면서 병위(兵威)를 과시하고 가덕도 등처에서 접전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 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이번 부산 거사에서는 우리나라 군졸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한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諸將)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20일). 원균은 감옥에 갇혀 있는 이순신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 장수들까지 이순신 함대의 부산 진격전과 관련된 죄인으로 처단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석방되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복무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4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이 3월 29일자로 올린 서장이 조정에 도착했다. 원균은 이 서장에서 새로운 수군작전을 제시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였던 지난 1월에 자신이 제안했던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가 무위를 과시하여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수군단독작전 대신,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 곧 "육군 30만명을 뽑아서 수륙합동작전으로 왜적을 쳐야 한다"는 게 자신이 통제사가 된 뒤에 그가 새로 생각해낸 작전이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4월 19일조). 이후 원균은 계속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하면서 수군 단독의 부산 진격전을 거부했다. 율곡의 ‘10만 양병론’조차 실행할 수 없었던 조선의 당시 국력으로 ‘육군 30만명을 동원한 수륙합동작전’은 실현이 전혀 불가능했다.

7월에 들어서자 선조도 수군 단독의 부산진격작전을 계속 거부하는 원균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던 모양이다.비변사에 전교하여 "원균에게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10일조)

원균이 계속 부산 진격을 거부하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치며 부산 진격을 명했다. 수군 단독의 부산진격작전은 본래 원균이 건의했던 것이고, 더구나 불과 5개월 전에 이순신이 직접 실행했던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규모의 수륙합동작전을 요구하면서 수군 단독의 진격을 거부하는 원균에게 매를 친 것이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할수없이 전 함대를 끌고 드디어 부산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까지 나갔다가 아무런 전투도 없이 배를 돌려 본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7월 15일 새벽에 칠천량 바다와 고성 지역 해안에서 추격해온 왜적에게 함대가 거의 전멸하고 원균도 전사했다. 그 소식은 7월 22일에 조정에 닿았다. 경악한 선조는 이 날짜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조)

이상이 <선조실록>의 기록을 따라서 정리한 당시 정확한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도 두려워서 감히 실행하지 못한 부산 앞바다 진격작전을 원균에게 하라면서 도원수 권율이 곤장을 치는 바람에 진격했다가 수군이 모두 무너진 것이니 원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탁환의 <불멸>은 거기서 더 나아가 소설의 전체 구조가 '원균은 전부터 수군을 끌고 부산에 용감하게 진격하려고 계속 애쓴 반면, 이순신은 원균의 부산 진격을 극력 만류하고 자신도 끝까지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원수와 조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원균이 완강하게 부산 진격을 거부하다가 곤장까지 맞았던 것은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인데도, 이처럼 사실과도 맞지 않고 소설 구성의 앞뒤도 맞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한 원인은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이 모두 전투 전에 몰래 전장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라며 원균의 부하 장수인 우치적의 입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저들은 애초부터 싸울 뜻이 없었사옵니다. 장군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위해 일부러 따라온 것이옵니다. 장군! 이순신이 이 모든 일을 꾸몄을 것이옵니다.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전투중에 배에 불이 붙어 충청수사 최호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균은 이렇게 소리친다.
"이순신, 이노옴! 네놈이 끝까지 날 괴롭히는구나. 좋다. …내 반드시 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아 네놈을 찾아가겠다. 가서 네놈의 생간을 씹어삼켜 최호의 원한을 풀겠다. 기다려라. 이놈!" (<불멸> 4, 135~136쪽)

이처럼 원균에게 불리한 건 모두 이순신 탓으로 덮어씌우는 것이 <불멸>의 기본 구조이다.

④ 이순신은 역모에 뜻을 두었는가

<불멸>의 결말은 더구나 해괴하다. 원균이 죽은 뒤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대첩으로 명성을 되찾은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역모를 꾸민다. 그들은 이순신을 옹위하고 휘하 수군을 동원하여 거병함으로써 무력으로 나라를 뒤엎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놓았고, 이순신도 '그 길'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고 이순신 폄훼에 앞장섰던 인물인 서인의 거두 윤두수가 그런 정황까지 모두 "훤히 꿰뚫고" 이순신에게 서찰을 보내어 “왕실과 만백성을 위해 전사하라”고 요구한다. 윤두수는 뒷일은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사사로이 목숨을 아끼고 시간을 벌다가는 김덕령처럼 개죽음을 당할 뿐이란 걸 명심하라"면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함으로써 '불멸의 길'을 가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 서찰을 받은 뒤 이순신은 '군사를 일으켜 운명을 시험할 것인가, 앉아서 사약을 받을 것인가,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과 부하들과 가문과 후손들까지 광영을 입게 할 것인가.'라는"세 가지 가능성 속에서 휘청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윤두수의 권고대로 전사를 가장한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우기, 그런 권고를 하기 전, 윤두수는 유성룡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장수가 있소. 결코 왕실을 배신하지 않을 장수와 결국 왕실을 배신하는 장수. 원균, 신립, 이일 등은 차라리 자결을 할 망정 결코 왕실을 배신하지 않을 장수들이오. 허나 이순신은 왕실을 향한 충정이 그다지 두텁지 않아요."(<불멸> 4, 329~373쪽)

이처럼 김탁환의 <불멸>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은, 철저한 이순신 폄훼 구조이다. '원균은 용맹하고 이순신은 소심하다'는 기본 설정에 맞추어 이순신의 모습을 너무도 비루하고 초라하게 그린다. 또한 무엇이든 원균에게 불리한 건 이순신 탓이고 이순신이 잘한 건 원균의 덕으로 되어 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 수군을 궤멸시키고" 있는 탓에 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죽은 것인 반면에(<불멸> 4권, 135쪽), 원균이 죽은 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거둔 것은 전날 밤 꿈에 "원균처럼 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불멸> 4권, 232쪽) 이순신에 대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욕이다.

이순신이 "나는 원통제사를 평생 흠모하며 존경하였느니라. 임진년 승리도 절반은 그의 공이다"라고 원균을 찬양하는가 하면(<불멸> 4권, 162쪽), 기세등등한 원균이 쓰러진 이순신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틀어쥐고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가도 이순신은 "꺼억꺼어억." 가래 끓는 소리를 낼 뿐 전혀 반항하지 못한다.(<불멸> 3권, 340쪽)

장수로서의 능력도 원균이 더 뛰어났다고 계속 강조한다. 그래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된 무렵의 장면에는 이런 대사들이 등장한다. "이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모두 자기보다 위인 장수를 그대로 두고 볼 이수사(주, 이순신)가 아니지 않소? 이수사는 반드시 원수사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킨 다음 자신의 수족을 경상우수사로 앉히려 들 게요." "하오나 원수사(주, 원균)는 조선 수군의 중심이오이다." "…이수사가 통제사에 오른 데는 좌수영의 전공을 꼼꼼하게 적어올린 그의 장계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비변사의 대신들은 결국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올린 장계를 놓고 갑론을박했을 테고, 아무리 원수사가 공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이수사의 장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오. 원수사가 이수사의 반만큼만 정치에 밝았더라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겠지." (<불멸> 3, 53~54쪽)
이순신은 원균보다 전공은 모자라는데, '정치에 밝은 이순신이' 장계를 잘 써서 원균을 밀쳐내고 통제사 자리를 차지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김탁환이 전혀 허구로 꾸며 넣은 이순신과 원균의 여인 관계 구도이다. '원균의 여자'인 '무옥'은 아름답고 신원이 확실한 처녀로서, 여자쪽에서 원균에게 반해서 접근하여 원균의 여인이 되었다. 반면에 '이순신의 여자'인 '박초희'는 여러 남자를 거친 여자이고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자신이 낳은 매국노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인데, 이순신쪽에서 그 여자에게 반하여 접근하여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심지어 그 여자 때문에 적장인 일본의 소서행장과 은밀한 거래까지 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관계를 대략 짚어 보면 이렇게 설정되어 있다.

원균의 여자인 '무옥'은 니탕캐의 난에서 원균이 여진족을 철저하게 토벌한 데 대한 원한을 품은 니탕캐의 여동생으로서 원균을 죽이려고 왔다가 원균에게 반하여 평생을 정성껏 모시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한 여인으로서, 그 캐릭터를 보면, 신원으로는 여진족의 최상류층 여인인 니탕캐 추장의 여동생인데다가 별명이 '여진의 보석'이라고 붙을 만치 용모가 아름답고 무용까지 뛰어난 처녀라는 것이다.

반면에 이순신의 여자인 박초희는 전라도에 사는 조선인 양반의 아내인 유부녀였는데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끌려갔다가 거기서 매국노인 사화동이란 천민의 아내가 되어 사화동의 아이까지 가진 조선여인으로서, 조선으로 잡혀간 사화동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온 뒤 사화동이 처형되어 죽자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자신이 낳은 사화동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 정신착란 상태로 떠돌던 것을 보고 이순신이 의원을 시켜 치료해준 뒤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었고, 이순신은 전쟁 중의 긴박한 때에 본영을 벗어나 박초의의 주막에 가서 머물며 박초희와 지내고 있어 부하 장수들이 수군거린다. 더구나 박초희가 이순신을 위해 몰래 자취를 감춘 뒤 대마도로 돌아간 뒤에, 소서행장이 이순신을 상대로 미인계를 쓰기 위해서 박초희를 다시 조선으로 불러왔고, 왜군측의 예상대로 이순신은 부하들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소서행장에게 '왜군 포로 열한 명'을 돌려준 대신 박초희를 받아서 옆에 두고 다시 진한 정분을 나눈다는 것이다.(<불멸> 4, 270~279쪽)

이처럼 김탁환이 그린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물론 그들의 여자관계 역시 어처구니 없다 못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순신은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만신창이 같은 과거를 지닌 여자에게 자기 쪽에서 반하여 그 여자와 정분을 나누느라 전시에도 군영을 벗어나기 일쑤고, 게다가 그 여인이 제 발로 사라진 뒤에도 도저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가 하면, 그처럼 비열하게 적장인 소서행장과 내통하면서까지 그 여자를 밝히고 다니는 장수'로 묘사하여 누추하고 파렴치한 매국노같은 인물로 그려놓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용모가 아름답고 무기를 능숙하게 쓸 만치 무용도 뛰어나고 춤까지 잘 추면서 여진족 최상류층의 고귀한 신분을 지닌 아름답고 기개가 당당하고 순결한 처녀가 원균에게 반하여 좇아와서 온몸과 마음을 모두 기울여 지성껏 섬기는 것은 물론 왜적을 치는 전투에까지 원균과 함께 참가하여 왜적을 같이 치다가 칠천량 전투때 나란히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다. 1980년대에 돌연 시작된 '이순신 죽이기'의 흐름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순신이 본래 비루한 인간이었다면 비루하게 그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이 낳은 인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 중 하나로서, 적들마저 존경했던 분이다. 이처럼 부당한 모욕과 폄훼를 마구 가해도 되는 분이 아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어찌하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을 이토록 추하게 왜곡하여 욕보이는가. 그리고 이제 공영방송에서 이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소설을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 전 국민에게 방영한다는 건 어떤 뜻을 지니는가.
이순신은 한 사람이고 그의 생애도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인심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각기 그를 다르게 평가해 왔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이순신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 현상이 벌어진 근본원인은, 아직까지도 이순신의 생애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있다. 이순신의 생애가 제대로 후세에 알려졌다면, 이미 역사소설 <불멸>에서 감행되었고 현재 KBS 대하 드라마 제작진이 시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황당한 역사의 왜곡은 감히 우리 사회에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인으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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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0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만치 않은 주제를 담은 내용이기도 하고, 분량이기도 해서...작심하고 읽어야 겠습니다~!
그나저나 송우혜라는 소설가 ..음~ 대단한걸요... 병자호란 당시를 배경으로 역사소설을 써낸 책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어릴적부터 김구 선생이나 이순신에 대한 전기를 읽고 보며 자라잖아요... 하지만...거기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이렇게 왜곡된 드라마까지...나오게 된 듯...

근데...송우혜는..간호학을 공부했다던데...

내가없는 이 안 2005-04-08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퍼가서 읽어볼까 하는데요... ^^ 잉크냄새님 잘 지내시죠?

잉크냄새 2005-04-0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 간호학을 전공한 역사소설가로군요. 사실 저 이글 업무시간에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너무 집중했던지 거진 1시간 가량이 후딱 지나가더군요. 송유혜님이 논거로 제시하는 글들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불멸의 이순신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할것 같네요.

이안님 / 저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기에 꽤 괜찮은 글 같더군요. 원균이 압송되는 이순신의 머리를 틀어쥐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그만 꼭지가 돌아버릴지경이었답니다.

파란여우 2005-04-1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이순신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역사의 고증, 왜곡, 변천사, 폄하,과대포장등등을요.....
이순신이라는 한 개인적 입장에서는 성웅이라고 칭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역사적 입장에서의 이순신은 분명 불멸의 지장이었다고 감히 말합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는 감정과 이성이 대립할 경우 이성이 이긴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전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이성적 인간이 되어볼까 합니다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겨야겠지요..어렵죠? 저두요...흐흐^^
아, 이거 프린트 할겁니다. 제가 백수되면 님 서재에서 괜찮은 글들을 모두 훔쳐갈테니 그리 아셔요. 물론, 어떠한 범칙금이나 사례금은 한푼도 없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잉크냄새 2005-04-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전 사실 왜곡이니 폄하니 하는 부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보았어요. 이순신도 인간이기에 우리와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요. 근데 이글을 읽어보니 그건 아니다 싶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최고의 인물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부분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뜨금했습니다. 그래도 이순신은 재미있네요. 아, 그리고 훔쳐갈만한 것이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부족한 서재 잊지않고 찾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거늘...

비로그인 2005-04-1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읽고... 저도 글에 어울리는 댓글에 흔적을 남겨볼께요..;;
모니터로 이렇게 방대한 양을 읽지 못하는..;;

잉크냄새 2005-04-1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 반갑습니다. 모니터로 읽기에는 좀 무리수가 있지요?^^ 전 정신없이 읽다보니 결국 읽고 말았지만요. 앞으로도 종종 인사드렸으면 좋겠네요.

2005-04-15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16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네르바 2005-04-2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전에 읽었는데 거의 두 시간 이상을 왔다갔다 하며 읽었어요. 읽으면서 얼마나 분노를 느꼈는지 심장이 쿵쾅거리더군요. 이 글을 신문에서도 보았어요. 고정욱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장애인으로 장애인에 관한 동화도 여러 편 썼고, 꽤 아이들의 사랑도 받는 작가인데... 괜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김탁환이란 사람.... 지식인이 뭘까? 생각하게 해 보네요.

잉크냄새 2005-04-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전 김탁환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글을 읽고서는 손에 잡게 될것 같지는 않군요. 가상과 고증의 경계, 얼마나 줄타기를 잘 하는지가 관건일것 같아요. KBS 불멸의 이순신도 재미있게는 보면서도 왠지 위태위태한 구석도 있더군요.

마노아 2006-10-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라, 이 페이퍼 제가 어제 다른 분 서재에서 보고 인쇄해 놓았는데 이렇게 다시 원주인을 만나는군요. 인쇄해 놓은 것을 직장에 두고 온지라, 월요일즈음에 차분하게 읽어봐야겠습니다. ^^

잉크냄새 2006-10-2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 반가워요, 이리 오래된 자료를 찾아주시고...ㅎㅎ 자주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