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꼭 한밤중에 술에 취해 전화를 한다. 그래서 난 몇년동안 그와 멀쩡한 정신으로 통화를 한 기억이 없다. 그가 술에 취해 있건, 내가 잠에 취해 있건 항상 둘중에 하나였다. "쟜냐?" "그래"  /   "고맙다" "뭐가?"  / " 그냥, 옛날에 나한테 잘해준거..." " 아직도 그런말 하냐? 됐어."  /  " 미안하다" " 뭐가?"  /   "그냥" " 너, 술먹었구나? "  /  " 응, 조금..." " 늦었다. 들어가라"  /   " 그래. 미안하다" 뚜~~~~ 거의 이런식이다. 그는 항상 고맙다로 시작해 미안하다로 끝난다.

그를 처음 만난건 중학교 2학년때이다. 자그만한 체구에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얼굴이 여자보다 이쁘게 생겨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인 녀석이었다. 별명은 '간나'였다. 경상도의 '가시나'와 동일한 단어이다. 짖궂은 녀석들에게 당하는게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심하단 생각도 들었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집에 다녀올 일이 있었고 한참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의 손목에 그어져 있던 한줄의 면도칼 자국, 죽고 싶었으나 깊게 그을수는 없더라고 말하던 그의 어깨가 순간 너무 작아 보였다. 그 이후 그를 보호해주고자 꽤나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교때 딱 한번의 연락후 그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모여도 그의 소식을 아는 친구는 한명도 없었다. 그저 스쳐지나간 인연처럼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숱한 사람들처럼 여길수도 있건만 유독 그에 대한 기억만은 왠지 안쓰러웠다. 그러다 몇해전 우연히 서울에서 교육을 받다가 연락이 되었다. 당시 열풍처럼 몰아쳤던 벤쳐 기업에 투자하여 10억을 벌어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들이 모두 학창시절 그를 죽도록 괴롭히던 놈들이었다. 자신도 이유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돈이었다. 모두 꽤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친구들이 그를 다른 친구들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대해주었으면 그도 어쩌면 지금 우리와 같이 나이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동정심이 오히려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것은 아닌지 싶다. 철없던 우리의 동정심이 그에게서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운것이 아니고 어쩌면 자신마저도 사라져간 공간으로 생각하게끔 만들고 만것 같다. 그는 과거를 기억하기 싫어 우리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친구란 비록 가는 길이 다를지라도 동등한 꿈을 간직해야 한다. 누군가의 꿈에 묻히면 더 이상 나란히 설수는 없다. 일방통행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다. 그의 삶, 이제는 그의 몫으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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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10-2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죽도록 괴롭히던 놈들은 과연 제대로된 사과를 했을까요. 애초에 용서를 빌 잘못을 했다고도 생각지 않을 테지요. 상처받아 보지 않고서 상처받은 자에 대한 손쉬운 이해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설픈 동정심도 누군가에겐 평생의 온기와 의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네르바 2004-10-2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다"로 시작해 "미안하다"로 끝나는 전화 통화. 잉크님은 꽤 괜찮은 친구였나 봐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고마운 존재로 남는다는 것... 괜찮은 삶을 산 것이겠지요?
그 친구분이 님을 생각함으로 아픈 기억 속에서도 미소를 머금을 수 있으니, 그 과거의 기억이 아주 쓸쓸할 것 같지는 않네요.

잉크냄새 2004-10-2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정이든 사랑이든 인간감정과 관련된 행위는 사람에 따라 천태만상의 행태를 띄는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수도 있겠죠.
과거의 기억이 어찌되었건 전 그가 지금의 우리와 같이 나이들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