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정(正)의 한 획을 그으며”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그가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의 낙인과도 같은 문신에 대한 글인데, 그들을 사회 약자의 위치에 놓고 바라본 이야기이다. 그들의 문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카멜레온의 보호색과도 같은, 가난한 이들의 자기 보호색으로 보는 시각이 흥미로웠던 글이다. 네팔에는 “분따” 라는 특별한 행태가 존재한다. 과거 마오이스트들이 트래킹 대상자들을 상대로 길을 막고 통행료를 받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분따”로 인하여 여행 일정이 종종 연기되곤 하는데, 네팔인들이 하루 동안 특정 도로를 막고 통행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행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그들이 “분따”를 일으키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결국 가난한 이들의 서글픈 이야기들이다. 같은 마을 사람의 장례식 비용 마련을 위하여, 가진 자의 폭정에 항거하여 그 억울함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넘어가는 히말라야의 언저리에서 버스를 가로막는 “분따”를 만났다. 몇몇 사람이 직접 쓴 비뚤비뚤한 현수막을 들고 길을 가로막고 몇몇 사람이 운전석으로 다가가면 운전수는 일정량의 통행료를 지불한다. 버스 승객 모두 그 행위에 그저 일상의 일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그 작은 항거에 대한 동병상련 때문일까.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통행료를 지불하던 젊은이마저 환하게 씨익 웃는다.
<박타푸르 더르바르 - 리틀부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더르바르(광장)에는 “쿠마리”가 산다. 네팔의 미신적인 풍습에 의하여 선발되는 4세의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다. 엄격한 심사과정을 통하여 선발되면 여신으로 추앙받는데 그 마지막이 서글프다. 어린 시절을 저당 잡혀 살며 어떤 교육이나 사회화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초경이 시작되면 불경하다는 이유로 결국 쫓겨나는데 일반인으로 돌아온 쿠마리를 맞아들이는 가족은 단명한다는, 쿠마리와 결혼한 남자는 단명한다는 나쁜 속설로 인하여, 쫓겨난 쿠마리는 평생 홀로 살아가며 생계를 위하여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쿠마리는 카트만두 시내 더르바르의 한 건물에 살고 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는 여행자에게 이층 창문으로 살며시 얼굴을 보여주는 쿠마리는 운명의 서글픔을 알고는 있을까. 결국 보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얼굴에 서글픈 운명이 겹쳐진다면 그 운명의 무게로 발걸음을 띄지 못할 듯 싶었다. 더르바르 광장 뒷골목을 서성이다 여염집의 이층 창문에서 쿠마리 또래 인듯한 아이들을 보았다.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그들의 모습 위로 보지도 못한 쿠마리가 자꾸 겹쳐져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왠지 근접할수 없는 분위기가 느껴지던 박타푸르 광장의 노인>
로컬 버스에 흔들리며 찾아간 박타푸르 더르바르는 흡사 중세 시대로 귀환한 듯한 느낌이었다. 온통 흙색의 도시이다. 인도의 자이살메르가 풍기던 황금빛의 찬란함과는 다른, 흙만이 줄 수 있는 아늑한 온화함이 굴절된 빛으로부터, 막 응달로 접어든 벽으로부터 스며 나와 차분하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듯한 탑과 사원의 웅장함, 그 사원의 주변에 형성된 민가의 단촐함에서는 대조적인 이분법적 의미보다는 오랜 세월 품고 살아와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조화로움이 느껴졌다. 그러한 골목을 거닌다는 것은 여행이 주는 가장 호사스런 경험일 것이다. 아득한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을 따라 걷다 보면 흡사 내 몸의 일부가 골목이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그곳을 벗어나 아득히 먼 길을 떠난다 해도 그 온화함에 살며시 눈을 감고 골목을 걷던 평화로움은 언제나 내 기억의 한 조각을 이루어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골목은 언제나 포근하다>
내가 머물던 숙소는 한국 여성이 운영하는 “네팔짱” 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카트만두에서 유명한 곳인데 식사를 위하여 찾아 들어간 부속 식당에는 꽤나 유명한 인사들이 히말라야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 들어 남기고 간 사진들로 가득했다. 우연히 그곳에서 포카라에서 막걸리 “창”으로 만난 여행자를 만났다. 하루 일찍 네팔을 떠나는 그와 마지막 “창”을 마시고 들어온 날 우리도 하나의 사진을 붙였다. 포카라에서 만난 네 명의 여행자가 사랑코트에 올라 찍은 사진인데 나머지 두 명은 인도로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진 밑에 우리의 이름을 쓰고 바를 정(正)의 한 획을 긋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다른 두 명에게는 메일로 통보해 줄 예정이었다. 그는 이년에 한번 정도 네팔을 방문할 계획이라며 십 년의 세월이 걸릴 거라 말했다. 난 십 년 안에 한 획을 더 그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라며 웃었다. 그 사실이 다소 서글펐지만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밑에는 한 획으로 표현된 우리의 추억이 굵게 가로 지르고 있었다.
<바를 정(正) 자의 한 획을 그었다. 누가 또 다음 획을 그을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