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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
박건웅 지음, 정은용 원작 / 새만화책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1950년 7월 25일 저녁
당시 피난민 500~600명이 임계리 산속 마을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미군들이 들어와 모두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부산 방면의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주겠다고 약속하며 강제로 소개시켰다.
1950년 7월 25일 늦은 밤 ~ 7월 26일 아침
피난민 행렬이 하가리에 도착하자, 인솔하던 미군이 길을 막고 피난민들을 모두 하천 변으로 내리몰아 강제로 노숙시켰다. 한편, 이날 밤 미 제1기갑사단에 퇴각 명령이 떨어져, 미군은 후퇴를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한밤중의 혼란 속에 최소 7명의 피난민이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미군의 지시에 따라 하가리 하천 변에서 밤을 지새운 피난민들은 동이 터오자, 미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남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했다.
1950년 7월 26일 정오 무렵
피난민들이 하가리를 출발하여 정오 무렵 서송원리 부근에 이르자, 5~6명의 미군들이 나타나 정지 명령을 내리고, 경부 국도와 평행으로 달리는 경부 철도로 올라가 남쪽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1950년 7월 26일 정오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거의 다다랐을때 미군들은 다시 이들을 저지하고 몸 수색과 소지품 검사를 한 후, 급히 사라졌다. 그 후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철길 주위에 모여있던 피난민들에게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무렵, 미 지상군도 총격을 시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00여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 전사 자료는 제7기갑연대 병력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1950년 7월 26일 오후 ~ 7월 29일 아침
공중 공격과 지상군 총격에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로 노근리 마을앞 쌍굴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만 3일간 미군은 피난민들이 모여있는 철길 밑 쌍굴 앞뒤에 주기적으로 총격과 포격을 가했다. 생존자들은 쌍굴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또는 쌍굴 속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최대 400명에 이른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군의 기록을 보면, 29일 이른 아침에 제7기갑연대 병력이 노근리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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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닌 망각이다" 라고 말한다. 흰 시멘트로 뒤덮은 총탄 자국과 핏물이 흐르던 냇물 주변에 아무일 없다는 듯 피어난 들꽃이 그 진실을 가릴수는 없는 것이다. 7월의 염천아래 시체로 벽을 쌓고 핏물을 마시며 발버둥친 아픈 역사, 지금 필요한 것은 단죄없는 용서가 아니다. 그 역사의 진실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처럼 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