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과 환상 -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
한태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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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러도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텐데요.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는 후각을 의학자의 입장에서 탐구해가는 여정을 그린 독특한 책 <후각과 환상>. 역사 공부와 답사 여행을 즐기는 의학자 한태희의 특별한 여행 함께 해보세요.


우리는 냄새를 어떻게 구별하는 걸까요. 인간은 1000개 정도의 후각수용체 유전자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연색 시각의 발달과 함께 후각은 점점 퇴화합니다. 이제 후각은 논리적 언어보다는 감정에 더 밀착됩니다.


냄새는 콧속 후각세포로부터 신경망을 통해 뇌에 전달됩니다. 인간의 후각 중추는 대뇌 피질 아래 변연계에 위치해있습니다. 이곳은 감정, 기억, 성적 충동, 동기 부여 등을 관장하는 신경조직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뇌에 전해진 냄새 자극은 이곳에 축적된 다양한 기억과 연상에 의해 종합적으로 판단됩니다. 우연한 자극에 의해 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후각적 체험이 되살아나는 메커니즘입니다.


카이로의 오래된 향수 가게, 인도 갠지스강 하류 늪지대의 진흙 냄새, 모로코 가죽 작업장의 악취, 세비야 궁전의 오렌지 꽃 향기, 더블린 도서관의 양피지 냄새, 지중해 작은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 등 향기와 악취 속에서 후각과 기억, 감정의 생리적 연관성을 탐구해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후각과 환상>.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감정과 연결된 충만한 감각.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부러워했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애매한 상상으로만 끝나다 보니 저의 빈약한 감각이 아쉬워지더라고요. 동남아의 깊은 숲 냄새는 내가 기억하는 숲 냄새와는 다를 테고, 낙엽 타는 듯 후추같이 알싸한 유향 냄새를 맡을 때면 나즈와의 깊은 골목을 걷는 감각을 떠올리는 저자의 후각적 체험을 동경하게 됩니다.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들어서기만 해도 특유의 냄새가 자극합니다. 새책만 가득한 서점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오래된 책 냄새는 우디향, 흙 냄새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비 내리는 숲속 나무향보다는 좀 더 묵직한 느낌입니다.


책 종이는 나무 펄프의 가공물이고 펄프는 나무 세포 셀룰로스와 리그닌이 주성분이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종이 성분을 산화시키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종이를 누렇게 변색하고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게 아몬드 향, 바닐라 향, 빵 냄새와 비슷한가 봅니다. 여기에 잉크 냄새, 제본 접착제 냄새까지 더해져 특유의 복합적 향내가 완성됩니다. 책 냄새 이야기는 더블린 도서관의 역사, 종이와 양피지 이야기, 인쇄 발명의 역사, 희귀본 이야기, 아일랜드 문학 전통을 거쳐 더블린만의 축축한 소금 냄새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안정감 있는 우디 계열의 숲 냄새를 좋아하는 저는 축축한 이끼 향, 젖은 흙 냄새가 오묘하게 뒤섞인 숲속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든 소라게 사육장을 통해 집에서도 느껴왔는데요. 이 특유의 냄새를 워낙 오래 맡다 보니 이제 평소엔 못 느끼겠더라고요. 또 다른 냄새를 맡기 위한 생리 현상인 후각 피로 효과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정과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냄새를 언제든 떠올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감정은 환상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후각적 연상이나 환상은 자욱한 매연 냄새나 생선 냄새처럼 싫은 냄새도 여행자의 유혹을 끌어냅니다. 후각적 체험은 감성, 욕망에 얽혀 영향을 주거나, 반대로 감정의 흐름이 후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 해변 카페 거리 음식이라는 고등어 샌드위치는 순간 고등어라는 단어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를 먼저 떠올렸던지라 솔직히 맛보고 싶지 않은데, 단백질을 가할 때 형성된 아미노산이 선사하는 향이라는 글귀를 보니 또 팔랑귀가 되어버립니다.


순천 선암사의 맑고 상큼한 매향에서 더듬어본 선비 문화, 3000년의 세월이 흘러도 희미한 향을 간직한 투탕카멘의 향수에서 이끌어내는 향의 역사 등 후각적 체험이 생물학, 문화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세상의 냄새를 좇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후각과 환상>. 마스크를 쓰는 요즘은 더 억눌린 후각. 일상에서든 여행지에서든 그곳의 고유한 냄새를 마음껏 갈망하는 후각 세포를 더듬어보게 하는 시간입니다. 냄새를 맡는 것을 넘어 그 냄새를 표현할 때 다양한 감정과 지식이 한데 어우러질 때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원시적 감각인 후각이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적 즐거움을 자극하는 위치에 섰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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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 성폭력의 사각지대에 혼자 남겨진 이들을 위한 심리 치유서
하인츠-페터 뢰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의마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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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이자 심리 치료사 하인츠-페터 뢰어 저자는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내면 치유를 위해 동화의 긍정적인 영향을 심리치료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일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바뀌어야 하는 무의식을 건드리는 심리치료. 여기서 꿈, 상상과 같은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동화가 안내판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동화가 제안하는 무의식의 지혜가 내놓은 해결책이 실제 문제 해결에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독서치료.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는 그림 형제 동화 「털북숭이 공주」를 바탕으로 성폭력 문제를 폭넓게 조망합니다.


가정 내 성폭력 발생 빈도가 생각보다 아주 높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성폭력 통계의 60퍼센트 이상이 생존자가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일 때 발생하고, 94퍼센트가 면식범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드러나지 않은 수가 태반입니다. 가족의 비밀과 금기가 우선시되는 겁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수치심이 너무 심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지 못한다고 합니다.하지만 그 피해는 평생에 걸쳐 이어집니다. 정체성 문제, 성적 장애, 심신 상관 질환, 결벽증, 우울증, 자해, 중독 질환, 섭식 장애 등의 증상을 보입니다.


「털북숭이 공주」는 아버지에 의한 성폭력의 비극이 비유적으로 그려진 동화입니다. 성폭력의 주요 증상, 특징,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아름다운 금발의 왕비가 병에 걸려 죽고 난 후, 왕비를 꼭 닮은 공주에게 사랑을 느끼는 왕. 공주 말고는 죽은 왕비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고 여깁니다. 공주는 아버지를 피해 온갖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입고 검댕을 묻힌 채 숨어 살아갑니다.


부모와 아이 간 건강한 성장은 행복한 스킨십에서 생깁니다. 이런 애착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성폭력과 협박이라는 이중의 고통은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의 고민과 고통을 털어놓는 걸 포기합니다. 극복의 기회를 잃는 겁니다.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정신건강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알리다 mitteilen'라는 말은 함께 mit라는 단어와 나누다 teilen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 즉, 고통을 알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뜻이 됩니다.


"동화는 비유의 언어로 영혼에 희망을 줄 수 있다." -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책은 동화의 비유들을 분석해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의 심리적 공통점을 찾아봅니다. 동화 속 공주는 고목 속으로 도망칩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에 상처를 입은 아이는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기이한 퇴행 현상을 비유한 고목에서 잠드는 행위는 전형적인 방어 기제라고 설명합니다.


'영혼 살해'는 성폭력의 비극을 잘 설명하는 말입니다. 온갖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로 털북숭이가 된 공주는 '짐승 같은' 몸을 바라보는 자기 증오를 의미합니다. 검댕을 바르는 행위는 죄책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희생자 콤플렉스입니다. '부엌데기 말고는 아무 쓸모 없는 계집'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공주의 모습은 자기 멸시에 빠진 생존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비극적 사건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만 한 털북숭이 공주. 보호받지 못하는 세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친족 성폭력은 가족 전체가 병들었다는 표시입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는 영혼 살해를 저지른 아버지로부터, 모른 척하고 보호자 역할을 미룬 어머니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직접적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성적 왜곡이 정신건강에 끼치는 해를 보여준 사례도 소개합니다. 건강한 자존감 발달을 가로막는 정서적 학대로 인해 희생자 콤플렉스가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합니다. 스스로를 힘겨운 상황에 몰아넣고,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평생 이끌어줄 강한 사람을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자기 회피, 자기 파괴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보다는 희생자 콤플렉스에 머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를 읽으며 희생자 콤플렉스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인격을 포기하고 희생자 인격을 받아들이는 희생자 콤플렉스. 자기 내면 깊은 곳에 고유한 인격이 살아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저 성폭력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치유가 완성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진짜 치유는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동화 속 치유의 도구인 황금 반지, 황금 물레, 황금 실패에 담긴 의미도 풀어줍니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치유에 꼭 필요한 소망을 내포한 물건입니다. 관계 맺는 능력, 혼돈을 정돈하는 능력, 내면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동화 속 식상해 보이는 흔한 결말 중 하나가 왕자의 등장인데요.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자를 왕자 그 단어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 역시 비유적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생존자 내면의 남성성을 의인화한다는 분석이 인상 깊었습니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에서는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정 폭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서적 학대, 특히 부모 자식 관계에서 아이의 인격이 착취되는 상황들을 보여줍니다.


막대한 성격 장애를 불러오고 성폭력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 정서적 학대.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자기는 없고 오로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고 짚어줍니다. 부모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로 탈출하지만, 자기 발달을 희생당해야 한 했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비극을 반복합니다. 그 외 남성 성폭력 피해 생존자 사례, 정서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연애나 결혼을 오용하는 사례 등 성폭력과 중독의 연결성을 짚어줍니다.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부모를 통해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학대로 인한 장애를 치유하고 내면의 왕국을 지키고 싶다면 동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비극적인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책입니다.


부모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책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부모만이 자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라며 자신의 문제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사회적 유전을 짚어줍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수록된 시 '아이들에 대하여'를 소개하며 부모의 이상적인 태도를 그려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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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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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친구와의 여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의미와 죽음에 관한 사색 <어떻게 지내요>. 내밀한 감정을 건드리며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 들게 하는 누네즈 특유의 문체가 오랜 여운을 안겨줍니다.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라는 시몬 베유 글귀로 시작하는 소설. "어떻게 지내요"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암에 걸린 친구, 이웃 할머니, 심지어 고양이와 지구를 통해 보여줍니다.


암에 걸린 친구를 만나러 온 날, 근처에서 열린 강연을 들으러 간 '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인류문명에 대한 비관적 내용을 토로하는 강연자는 바로 전 애인입니다. 예술과 문화 강연을 하던 사람은 과거지사일 뿐이고, 이제 그는 희망이 없음을, 구원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통이 우리 앞에 높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습니다.


암에 걸린 친구는 딸이 "정서적으로 표류난민이다."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서로 없다고 치는 게 더 쉬운 모녀 관계. 암에 걸린 엄마의 치료에 대해서도 "엄마가 결정한 일이죠."라는 말뿐입니다.


치료를 받으며 달걀처럼 새하얗고 젓가락처럼 빼빼 말라버린 친구는 잘 죽는다는 건 뭘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고통 없이, 침착하게 약간의 품위를 지키며 가는 것이겠지만, 현실은 죽어가는 일이나 죽음에 대한 건 읽고 싶지도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나'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할 때마다 혹시라도 '얼마 살지도 못하는데'로 이해할까 봐 신경 쓰입니다.


친구와는 이십 대 초반 문학 잡지사에 일하면서 만난 사이로 첫 번째 절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암에 걸린 친구를 위해 딸 대신 곁을 지켜줄 수는 있는, 토할 것 같으면 머리카락을 잡아주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뜻밖의 도움을 청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한적한 곳에서 마지막 길을 지켜봐달라고 말이죠. 안락사 약을 구한 겁니다.


누구는 암을 선물이자 정신적 성숙의 기회로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 등 살아버티는 한 가능성은 있다 같은 생존자만 영웅이 되는 말 따위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친구. 죽어가는 사람에게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친구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도대체 왜 암이 한 사람의 패기를 판단하는 시험이 되어야 하는지, 치욕스럽게 고통에 시달리다 가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지금 친구에게 필요한 건 이 모두를 이해하고 자기 편이 되겠다고 약속해 줄 사람입니다.


그렇게 일주일 후 둘은 떠납니다.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새로운 장소에 도착 후 짐을 풀며 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식품은 얼마나 사야 할지 장을 볼 때마다 어색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까 봐 두려운 친구의 속내를 통해 죽음을 앞둔 자가 할법한 내밀한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묘사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작가를 보면서 죽음과 애도에 관한 작가의 경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희망은 없고, 죽음은 임박하고, 정신은 오로지 풀려나길 바라는데, 제 나름의 생각으로 살겠다고 필사적으로 분투하는 몸과 약해져가면서도 매 박동과 함께 안 돼, 안 돼, 안 돼라고 헐떡이는 심장을 생각하는 친구의 모습은 죽음에 대한 생각의 최전선에 놓인 자가 아니라면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거든요.


친구에게 책을 읽어주는 나날을 통해 친구에게 위안을 주려는만큼이나 친구가 내게 위안이 된다는 걸 느끼며, 어쩌면 죽음 역시 하나의 역할극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나'. 나는 무사히 친구가 바란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요.


종말에 직면한 문명에서 도덕적이며 의미 있는 방책은 지구에게 지금까지 저질러온 파괴적인 해악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아주 작은 차원에서나마 그 보상을 할지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전 애인. 그는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할지 배워야 한다고 강연해왔지만, 친구와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는 '나'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어떻게 지내요>에서는 암에 걸린 친구 외에도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부인의 불치병을 알게 된 남편이 알게 모르게 기대감과 안도감이 만연한 표정으로 생활하기 시작하더라며 담담해하던 여자의 에피소드, 암에 걸린 언니가 살이 빠졌을 때 나도 암에 걸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며 몸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고백한 피트니스클럽의 여자, 혼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이웃 할머니가 대화를 원할 거라 믿으며 가끔씩 찾아가 살펴보던 '나'의 경험 등 "여성들의 이야기는 흔히 슬픈 이야기다."로 결론짓게 만드는 이야기들입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관통하면서도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는 적절한 감정 안배가 돋보이는 소설 <어떻게 지내요>. 지구 재난이라는 거시적 죽음과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의 죽음을 오가며 죽음에 대한 사색을 우리 곁에 가까이 끌어온 구성이 매력적입니다. 언제쯤... 이제 곧... 이제는 언제라도. 친구와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독자에게도 예행연습시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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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우리나라 제주 여행지도 - 지도의 형태로 한눈에 볼 수 있게 담은 제주여행 가이드 지도, 2021-2022 개정판 에이든 여행지도
타블라라사 편집부.이정기 지음 / 타블라라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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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찾기 정도는 지도앱이 훨씬 간편하지만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낯선 곳의 위치와 거리를 가늠하며 일정 조율하려면 지도만 한 게 없죠. 무엇보다 지도를 펼치기만 해도 그 장소의 핵심을 담은 소개글이 있다면 정보 찾고 위치 찾는 별도의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걸 가능하게한 게 바로 에이든 지도입니다. 1500여 곳의 여행지에 핵심 소개를 곁들여 지도 한 장만으로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제주의 핫이슈 여행지, 인스타여행지, 카페, 맛집 등을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한 에이든 우리나라 제주 여행지도 2021-2022 개정판. 여행 지도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타블라라사의 노하우가 집약되었습니다. 타블라라사는 2020년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관광벤처기업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여행지도는 여행지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계절적 요인을 위치와 함께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여행지와 음식, 계절적 요인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라니. 그동안 여행 계획 세울 때 알게 모르게 일일이 검토해봤던 바로 그 행위들을 지도 한 장에 압축한 셈입니다. 간단하게 루틴을 만들어준 에이든 지도를 만나고서야 얼마나 편리한지 깨닫게 되었어요.


50페이지 정도 되는 제주지도 맵북과 A1 사이즈의 제주지도, 물방울 스티커, 브로셔와 엽서가 담긴 크라프트지 케이스로 구성된 에이든 제주여행지도입니다. 다녀온 곳을 표시하는 물방울 스티커는 반투명이어서 지도에 붙이는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맵북은 제주 지도를 분할해 수록해둔 얇은 책자 형태입니다. 자세히 해당 구역을 보고 싶을 때 맵북이 편리합니다. 대형 지도를 접어서 가져갈지, 맵북을 가져갈지는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 같아요. 여행 계획 세울 때 효율적인 동선이 뭐니 뭐니 해도 최고죠. 인터넷에서 명소 정보, 맛집 정보 등을 개별적으로 찾아 나서기 번거로웠는데 에이든 지도만으로 시간을 완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니 제주 여행 갈 때 맵북의 페이지 한 장을 집중 공략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더라고요. 한 달 살기 제주를 하든, 주말에 카페투어를 하러 가든 지도만 갖고 가면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 걱정 없이 보낼 수 있겠어요.


펼치면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841mm * 594mm) A1 지도는 촉감이 독특하더라고요. 보들보들하면서도 짱짱한 재질이어서 손에 쥐었을 때 느낌이 정말 좋아요. 돌가루로 만들어진 친환경 종이라는데 물에 젖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자주 접었다 펼쳤다 하면 접힌 부분이 해져서 찢어지게 되는데 에이든 지도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마음 놓고 들여다볼 수 있겠어요.


1500개 여행지가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우도와 마라도는 별도로 더 쉽게 볼 수 있게 확대 표기되어 있어요. 꽃 여행지, 카페, 인스타 성지, 올레길, 오름 등 요즘 핫한 여행지도 표기해뒀습니다. 광고 없는 생생한 정보를 위해 에이든 지도팀과 컨텐츠팀이 직접 뛰어다닌 최신 정보를 수록했다니 마음 놓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에이든 방수 지도는 양면입니다. 한 쪽엔 제주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다른 면에는 해변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애월 카페거리, 주요 해수욕장 주변, 중문관광단지, 성산일출봉 주변, 제주 오름지도 등이 인쇄되어 있어요.


에이든 우리나라 제주 여행지도 외에 해당 장소 사진이 들어간 핵심 정보, 숙소 등 더 다양한 정보를 원할 땐 가이드북 형태로 별도로 출간된 에이든 제주여행 가이드북과 함께하면 금상첨화입니다. 국내여행지 제주의 가치가 한층 더 높아지는 요즘, 제주 여행의 필수템으로 갖춰야 할 에이든 우리나라 제주 여행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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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5 : 최초·최고 편 가리지날 시리즈
조홍석 지음 / 트로이목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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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지날이란 오리지날이 아님에도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이제는 오리지날보다 더 유명해진 것을 의미하는 조홍석 저자의 용어인데요. 익히 알고 있던 상식이 가리지날이라는 것을 짚어주는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다면 인기만점이었을 것 같아요.


역시나. 가리지날을 혼자만 알기는 아까웠던지 지인들에게 폭로(?)하기 시작합니다. 10년간 지인들에게 보낸 메일과 칼럼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2018년부터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으로 시리즈를 출간하게 됩니다. 일상생활, 과학 경제, 언어 예술, 한국사 분야에서 대다수가 모르는 놀라운 사실을 밝힌 그의 다섯 번째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 최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상의 근원 우주 탄생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100년 전만 해도 우주는 한결같이 안정된 상태 그대로라는 '정상우주론'이 대세였습니다. 이후 우주가 한 점에서 대폭발해 탄생했다는 빅뱅 이론이 등장했는데요. 아인슈타인조차도 처음엔 이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상수를 넣은 사건은 유명하죠.


빅뱅 이론은 우주에 대한 이해가 진화론적인 우주론으로 바뀌는 패러다임 대전환을 이룬 사건입니다. 그럼, 여기서 가리지날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미국인들이 최초라며 우주의 기원을 밝힐 우주망원경을 '허블 망원경'이라 이름 짓고 지구 위 600여 km 궤도에 올릴 정도로 자부심을 가진 빅뱅 이론의 증거가 된 스토리에서 진짜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천문학자 허블이 알아낸 은하계 후퇴 현상만 알고 있었겠지만, 그보다 2년 앞서 벨기에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인 조르주 르메트르가 팽창 우주론을 처음 제안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2018년 국제천문연맹 투표를 통해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바꿔 부르도록 권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빅뱅 원조를 두고 국가 간 자존심 경쟁은 우주 탄생 이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는데요. 사실 빅뱅 이론 창시자는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라고 할 수도 있다는데?! 1848년 그의 수필집에 실린 글에는 어마무시하게 시대를 앞선 빅뱅이론이 버젓이 실려있었다고 하네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공룡 세계 한 번쯤 거치지요. 우리 아이는 화석 수집으로까지 취미 확장이 된 바람에 아주 죽을 맛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강력한 티라노사우루스에 매혹될 법한데요. 트리케라톱스 화석과 함께 그 뿔에 박혀 죽은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이 발견되면서 초식 공룡 트리케라톱스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공룡의 진화 과정을 식물 진화와 함께 설명하며 공룡의 역사를 짚어보기도 하고, 최애 영화 쥬라기공원의 벨로키랍토르는 오히려 데이노니쿠스 이미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똥찬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공룡 고기의 맛은 어떨지 상상해보셨을까요. 비둘기 고기나 닭고기 맛과 비슷할 거라는데 왜 그런지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거치고 나면, 본격 인간 세상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의식주와 관련한 최초, 최고 이야기에서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산업 스파이 문익점의 목화씨 밀수 성공 스토리가 가리지날임을 밝힙니다.


진실을 알려면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요, 공민왕 시절 혼란스러운 정치 국면을 이해하면 당시 말단 관리였던 문익점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더라고요. 어쨌든 진실은 사절단으로 갔을 때 개량형 목화 종자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는데, 사실 아무 제재 없이 그냥 가져온 게 진실이라는 겁니다. 목화에서 실 뽑는 기술도 원나라에 살던 고려인이 많아 잘 알려진 상황이었고요. 결과적으로는 의복 혁신을 이룬 공이 컸기에 후대의 칭송이 이어지며 살이 붙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밀수로 추앙받은 사례들을 더 소개하는데 이런 번외 이야기도 참 재미있습니다.


인상, 홍삼의 최고로 우리는 고려인삼을 당연시 여기고 있는데, 해외에서는 미국 인삼을 최고로 친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정말 우리 고려인삼의 질이 떨어지는 건지 저자는 역사를 통해 팩트체크해봅니다.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가치로 연계하지 못한 우리 인삼의 슬픈 이야기라는 게 팩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대규모 감염병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스페인 독감 이름 자체가 가리지날이라는 것, 대규모 감염병의 유행이 정치, 경제면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촘촘히 짚어줍니다. 40일간의 격리 제도를 처음 시행했던 베네치아 이야기는 섬뜩해지더라고요. 이방인 거주 제한 시행령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터키인들을 건물에 감금했고, 이는 암암리에 유대인 거주 제한하던 일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감염병의 격리 제도가 게토 탄생으로 이어진 겁니다. 활발한 경제 활동하던 유대인이 사라지니 스페인 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소설의 기원을 다룰 때 언급되는 1886년 프랑스 작가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라당이 쓴 소설 <미래의 이브>. 최초로 안드로이드라 부른 인조인간이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로봇이란 용어는 이후 1920년 체코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등장합니다. 로봇 탄생의 배경이 된 체코의 문화적, 산업적 특징을 알면 독특한 골렘 신화의 확장이 로봇으로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식 기록과 관련한 필기구의 역사, 한글 타자기의 탄생, 한글 점자 훈맹정음의 탄생 이야기를 비롯해 시네마 천국을 이야기하며 시칠리아 역사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여정이 이어집니다. 일본어로 된 시력검표를 한글로 처음 바꾸고, 최초로 하드렌즈 시술을 도입하며 국산화 과정에 참여한 공병우 박사. 안과의사로서 엄청난 업적을 남긴 그는 한글 기계화에도 앞장선 선각자입니다. 공병우 타자기는 획기적 기술이 들어가 엄청난 빠르기를 자랑해 6.25 전쟁 이후 공식 문서는 모두 3벌식 타자인 공병우 타자기를 이용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목 통증 증후군을 겪으며 쓰는 컴퓨터 키보드의 2벌식 자판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음악계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이야기에서 가리지날은 무엇일까요. 영화 시네마 천국의 메인 음악 '러브 테마'는 모리꼬네의 최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실은 둘째 아들 안드레아 모리꼬네가 만들고(데뷔 음악이었다고) 엔니오 모리꼬네는 편곡을 한 작품입니다.


항일 투쟁 최초의 영웅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서는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30대의 안중근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방정환 선생님과 어린이날 이야기,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농업기술 혁명을 이끈 우장춘 박사 등 우리 근현대사에서 최초와 최고를 찾아봅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유명한 말씀은 안중근 의사께서 하신 말이 아니다?! 물론 그 구절을 붓글씨로 써서 남기긴 했지만, 옛 명언 문구 중 하나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던 격언이었다고 합니다.


교과서나 교양서를 읽으며 알게 되었던 지식이 가리지날이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하면서 배신감도 진하게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과학자가 쓴 책에서 읽은 이야기조차 결국 허구로 판명되었다는 정보를 이 책으로 알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효용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많은 자료 사진과 핵심이 잘 드러난 일러스트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가 탁월한데다가 군데군데 귀여운 아이콘을 넣어 가독성을 높인 편집이 돋보인 책입니다. '걸어 다니는 네이버', '유발 하라리 동생, 무발 하라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유쾌한 지식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조홍석 저자가 풀어주는 천문학, 역사와 과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가끔 옆길로 새기도 하지만 그 옆길조차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지식들이어서 비범한 상식으로 재탄생하는 가리지날 시리즈의 매력이 쏠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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