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 성폭력의 사각지대에 혼자 남겨진 이들을 위한 심리 치유서
하인츠-페터 뢰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의마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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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이자 심리 치료사 하인츠-페터 뢰어 저자는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내면 치유를 위해 동화의 긍정적인 영향을 심리치료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일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바뀌어야 하는 무의식을 건드리는 심리치료. 여기서 꿈, 상상과 같은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동화가 안내판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동화가 제안하는 무의식의 지혜가 내놓은 해결책이 실제 문제 해결에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독서치료.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는 그림 형제 동화 「털북숭이 공주」를 바탕으로 성폭력 문제를 폭넓게 조망합니다.


가정 내 성폭력 발생 빈도가 생각보다 아주 높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성폭력 통계의 60퍼센트 이상이 생존자가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일 때 발생하고, 94퍼센트가 면식범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드러나지 않은 수가 태반입니다. 가족의 비밀과 금기가 우선시되는 겁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수치심이 너무 심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지 못한다고 합니다.하지만 그 피해는 평생에 걸쳐 이어집니다. 정체성 문제, 성적 장애, 심신 상관 질환, 결벽증, 우울증, 자해, 중독 질환, 섭식 장애 등의 증상을 보입니다.


「털북숭이 공주」는 아버지에 의한 성폭력의 비극이 비유적으로 그려진 동화입니다. 성폭력의 주요 증상, 특징,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아름다운 금발의 왕비가 병에 걸려 죽고 난 후, 왕비를 꼭 닮은 공주에게 사랑을 느끼는 왕. 공주 말고는 죽은 왕비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고 여깁니다. 공주는 아버지를 피해 온갖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입고 검댕을 묻힌 채 숨어 살아갑니다.


부모와 아이 간 건강한 성장은 행복한 스킨십에서 생깁니다. 이런 애착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성폭력과 협박이라는 이중의 고통은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의 고민과 고통을 털어놓는 걸 포기합니다. 극복의 기회를 잃는 겁니다.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정신건강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알리다 mitteilen'라는 말은 함께 mit라는 단어와 나누다 teilen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 즉, 고통을 알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뜻이 됩니다.


"동화는 비유의 언어로 영혼에 희망을 줄 수 있다." -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책은 동화의 비유들을 분석해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의 심리적 공통점을 찾아봅니다. 동화 속 공주는 고목 속으로 도망칩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에 상처를 입은 아이는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기이한 퇴행 현상을 비유한 고목에서 잠드는 행위는 전형적인 방어 기제라고 설명합니다.


'영혼 살해'는 성폭력의 비극을 잘 설명하는 말입니다. 온갖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로 털북숭이가 된 공주는 '짐승 같은' 몸을 바라보는 자기 증오를 의미합니다. 검댕을 바르는 행위는 죄책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희생자 콤플렉스입니다. '부엌데기 말고는 아무 쓸모 없는 계집'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공주의 모습은 자기 멸시에 빠진 생존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비극적 사건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만 한 털북숭이 공주. 보호받지 못하는 세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친족 성폭력은 가족 전체가 병들었다는 표시입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는 영혼 살해를 저지른 아버지로부터, 모른 척하고 보호자 역할을 미룬 어머니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직접적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성적 왜곡이 정신건강에 끼치는 해를 보여준 사례도 소개합니다. 건강한 자존감 발달을 가로막는 정서적 학대로 인해 희생자 콤플렉스가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합니다. 스스로를 힘겨운 상황에 몰아넣고,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평생 이끌어줄 강한 사람을 찾으려 한다고 합니다. 자기 회피, 자기 파괴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보다는 희생자 콤플렉스에 머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를 읽으며 희생자 콤플렉스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인격을 포기하고 희생자 인격을 받아들이는 희생자 콤플렉스. 자기 내면 깊은 곳에 고유한 인격이 살아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저 성폭력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치유가 완성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진짜 치유는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동화 속 치유의 도구인 황금 반지, 황금 물레, 황금 실패에 담긴 의미도 풀어줍니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치유에 꼭 필요한 소망을 내포한 물건입니다. 관계 맺는 능력, 혼돈을 정돈하는 능력, 내면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동화 속 식상해 보이는 흔한 결말 중 하나가 왕자의 등장인데요.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자를 왕자 그 단어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 역시 비유적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생존자 내면의 남성성을 의인화한다는 분석이 인상 깊었습니다.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에서는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정 폭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서적 학대, 특히 부모 자식 관계에서 아이의 인격이 착취되는 상황들을 보여줍니다.


막대한 성격 장애를 불러오고 성폭력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 정서적 학대.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자기는 없고 오로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고 짚어줍니다. 부모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로 탈출하지만, 자기 발달을 희생당해야 한 했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비극을 반복합니다. 그 외 남성 성폭력 피해 생존자 사례, 정서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연애나 결혼을 오용하는 사례 등 성폭력과 중독의 연결성을 짚어줍니다.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부모를 통해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학대로 인한 장애를 치유하고 내면의 왕국을 지키고 싶다면 동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비극적인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책입니다.


부모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책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부모만이 자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라며 자신의 문제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사회적 유전을 짚어줍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수록된 시 '아이들에 대하여'를 소개하며 부모의 이상적인 태도를 그려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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