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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과 환상 - 의학자가 걷고, 맡고, 기록한 세상의 냄새들
한태희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오랜 시간이 흘러도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곳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을 텐데요. 감정과 기억을 자극하는 후각을 의학자의 입장에서 탐구해가는 여정을 그린 독특한 책 <후각과 환상>. 역사 공부와 답사 여행을 즐기는 의학자 한태희의 특별한 여행 함께 해보세요.
우리는 냄새를 어떻게 구별하는 걸까요. 인간은 1000개 정도의 후각수용체 유전자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연색 시각의 발달과 함께 후각은 점점 퇴화합니다. 이제 후각은 논리적 언어보다는 감정에 더 밀착됩니다.
냄새는 콧속 후각세포로부터 신경망을 통해 뇌에 전달됩니다. 인간의 후각 중추는 대뇌 피질 아래 변연계에 위치해있습니다. 이곳은 감정, 기억, 성적 충동, 동기 부여 등을 관장하는 신경조직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뇌에 전해진 냄새 자극은 이곳에 축적된 다양한 기억과 연상에 의해 종합적으로 판단됩니다. 우연한 자극에 의해 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후각적 체험이 되살아나는 메커니즘입니다.
카이로의 오래된 향수 가게, 인도 갠지스강 하류 늪지대의 진흙 냄새, 모로코 가죽 작업장의 악취, 세비야 궁전의 오렌지 꽃 향기, 더블린 도서관의 양피지 냄새, 지중해 작은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 등 향기와 악취 속에서 후각과 기억, 감정의 생리적 연관성을 탐구해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후각과 환상>.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감정과 연결된 충만한 감각.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부러워했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애매한 상상으로만 끝나다 보니 저의 빈약한 감각이 아쉬워지더라고요. 동남아의 깊은 숲 냄새는 내가 기억하는 숲 냄새와는 다를 테고, 낙엽 타는 듯 후추같이 알싸한 유향 냄새를 맡을 때면 나즈와의 깊은 골목을 걷는 감각을 떠올리는 저자의 후각적 체험을 동경하게 됩니다.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들어서기만 해도 특유의 냄새가 자극합니다. 새책만 가득한 서점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오래된 책 냄새는 우디향, 흙 냄새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비 내리는 숲속 나무향보다는 좀 더 묵직한 느낌입니다.
책 종이는 나무 펄프의 가공물이고 펄프는 나무 세포 셀룰로스와 리그닌이 주성분이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종이 성분을 산화시키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종이를 누렇게 변색하고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게 아몬드 향, 바닐라 향, 빵 냄새와 비슷한가 봅니다. 여기에 잉크 냄새, 제본 접착제 냄새까지 더해져 특유의 복합적 향내가 완성됩니다. 책 냄새 이야기는 더블린 도서관의 역사, 종이와 양피지 이야기, 인쇄 발명의 역사, 희귀본 이야기, 아일랜드 문학 전통을 거쳐 더블린만의 축축한 소금 냄새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안정감 있는 우디 계열의 숲 냄새를 좋아하는 저는 축축한 이끼 향, 젖은 흙 냄새가 오묘하게 뒤섞인 숲속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든 소라게 사육장을 통해 집에서도 느껴왔는데요. 이 특유의 냄새를 워낙 오래 맡다 보니 이제 평소엔 못 느끼겠더라고요. 또 다른 냄새를 맡기 위한 생리 현상인 후각 피로 효과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정과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냄새를 언제든 떠올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감정은 환상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후각적 연상이나 환상은 자욱한 매연 냄새나 생선 냄새처럼 싫은 냄새도 여행자의 유혹을 끌어냅니다. 후각적 체험은 감성, 욕망에 얽혀 영향을 주거나, 반대로 감정의 흐름이 후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 해변 카페 거리 음식이라는 고등어 샌드위치는 순간 고등어라는 단어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를 먼저 떠올렸던지라 솔직히 맛보고 싶지 않은데, 단백질을 가할 때 형성된 아미노산이 선사하는 향이라는 글귀를 보니 또 팔랑귀가 되어버립니다.
순천 선암사의 맑고 상큼한 매향에서 더듬어본 선비 문화, 3000년의 세월이 흘러도 희미한 향을 간직한 투탕카멘의 향수에서 이끌어내는 향의 역사 등 후각적 체험이 생물학, 문화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세상의 냄새를 좇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후각과 환상>. 마스크를 쓰는 요즘은 더 억눌린 후각. 일상에서든 여행지에서든 그곳의 고유한 냄새를 마음껏 갈망하는 후각 세포를 더듬어보게 하는 시간입니다. 냄새를 맡는 것을 넘어 그 냄새를 표현할 때 다양한 감정과 지식이 한데 어우러질 때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원시적 감각인 후각이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적 즐거움을 자극하는 위치에 섰음을 이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