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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 남자. 어느날 그에게서 다시 찾아오겠다는 전보가 여자에게 도착한다. 늘 거짓된 말로 주위 사람을 현혹시키고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는 남자. 주위 사람들은 그의 귀환소식을 듣고 그에게서 받을 빚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번엔 그가 또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그 남자 앞에서 또 다시 사람들은 현혹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에게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두 앗아가려고 하는데...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작품인 <열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운명적인 하루를 중심에 놓고 주인공이 그 날을 맞이하기 전에 겪는 감정의 변화, 그리고 운명적 그 하루에 생기는 일들을 다루고 있으며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순서상으로 본다면 중년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책과 노년의 인물이 등장하는 <열정>의 순서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들었다. 때문에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는다면 산도르 마라이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세월동안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작은 불꽃. 이성적으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동조하고 그가 하는 제안에 혹하는 여성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이해가 갔다. 비록 그 남자 라요스가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고, 타고난 사기꾼이라 할 지라도 그녀의 마음 속에는 그는 '그녀가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려는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를 자신의 목적때문에 이용하려는 남자. 통속적인 드라마같은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이감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성과 감성도 그렇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동전의 앞면으로, 어떤이에게는 증오가 동전의 앞면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자신의 관점을 잠시 버리고 내가 주인공인 에스터가 된 것처럼 몰입해서 읽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 책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라요스의 말을,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에스터의 입장에 선다면 이 책의 마지막에서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됐는지 조금이라도 더 에스터답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