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절판


'의무를 다하다', 이 무슨 거창하고 결연한 말인가!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든지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수가 있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 커다란 결정을 훗날 뒤돌아보고 회상해보면, 그 중대성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결정을 내린 듯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10쪽

내가 그날 아주 불행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이십 년, 아니 이십이 년 전 나는 불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내 안에서 응고되었다. 어떤 힘이 상처를 무디게 하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나와 라요스 사이에 일어난 일을 말로 다 형언하기는 어렵다.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견딜 수 없던 일이 갑자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와달라고 외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경찰관이나 의사, 사제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살아남았다. -22쪽

가망 없는 사랑은 절대 사그라들지 않아. -40쪽

비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비를 피할 지붕만 있어도 행복한 법이다. -51쪽

죽은 자들은 얼마나 강한가! 무력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무자비한 사멸의 법칙에 따라 땅속 깊이 묻혀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비밀스럽게 살아나 이따금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이 순간 언니가 그렇게 비밀스럽게 다시 살아났다. 죽은 자들은 어느 날 문득 다시 나타나 주도권을 휘두른다. -119쪽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선과 악, 아니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당신에게는 그런 한계가 없어요. -145쪽

한계니 가능성, 선과 악, 그런 것들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소. 에스터. 우리가 하는 행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도 않고 뚜렷한 목표도 없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았소? 무슨 일을 꼭 이득이나 기쁨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오. 당신 삶을 한번 돌아보구려. 그러면 많은 경우 어쩌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거요. -145쪽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없거나 도덕적인 불구처럼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소. 인간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오직 손이나 발이 하나 없는 사람에 비교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의수나 의족을 달면 세상에 유용한 일을 할 수 있소. 이런 비교를 해서 미안하구려.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 바로 그런 의수나 의족이 될 수 있었소. 도덕적인 의수나 의족 말이오. -153쪽

현실은 당신이 나를 속였다는 거죠. 이런 경우 예전에는 '나를 희롱했다'고 낭만적으로 표현했어요. 당신은 카드 대신 감정과 사람을 가지고 도박하는 별난 도박사에요.-155쪽

상대방의 말이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나 삶의 토대는 부실할 수밖에 없어요. 흔히들 '늪'이나 '모래 언덕'에 집을 짓는 거나 같다고 말하죠. 아무리 집을 지어보았자, 어느 날 무너지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아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인간적이고 운명적인 데가 있어요. 현실적이죠. 허나 당신을 믿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보다 더 운수가 사나울 수 없어요. 어느 날 자신이 허공 속에, 무無에다 집을 지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것은 이익을 위해서라든지 순간적으로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아니면 그런 성향을 타고났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듯이 거짓말해요. 당신은 눈물도 거짓이고 행동도 거짓이죠. 그러기도 아주 어려울거예요. 이따금 당신이 정말로 천재라고 믿을 때가 있어요... 거짓말의 천재. -15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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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았어요.

이매지 2006-11-1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갓 다 읽었는데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