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절판


오래전 나는 쇼핑몰에 있는 카트를 끌고 서점의 책들을 쓸어 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덤벙덤벙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담는 것은 곤란하다. 처음에는 양손에 하나씩 들고 제목 정도는 확인하면서 어떤 작가의 것은 모조리, 생소한 작가의 것은 잠시 멈추어 책 표지를 바라보고 느낌에 따라 선별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끝내는 재빠르게, 한 시간 남짓 카트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 계산을 하고 차 트렁크를 책으로 꽈악 채우고서 예정된 곳으로 떠나는 일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1쪽

지금 이 상태가 최상은 아니지만 나빠질 가능성보다는 나아질 가능성이 많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문제는 지나고 나면 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기다리지도 소원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책을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이것이 내 방식이다. -2쪽

죄수는 감옥에 갇히고 어른들은 회사에 갇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갇힌다. 감옥을 감옥 아닌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죄수들은 딴 짓을 했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누군가는 낙서를 하고 누군가는 잠을 자고 누군가는 상상을 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분명 낭비였다. 그러나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옥에서도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그러므로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나만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내가 여전히 어디로든 튈 수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내가 몹시 철없는 이십 대 후반을 보내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3쪽

막연한 것,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이 스물을 향해 가는 이들과 서른을 향해 가는 이들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4쪽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걸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책 읽기는 공부라는 성실하고 고리타분한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책 읽기는 처음부터 놀이였을 뿐이다. 내가 설사 아주 어려운 학술 책을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놀이일 뿐이다. 놀이가 꼭 쉬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아주 지능적이어야 하고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 바둑이나 장기, 체스를 놀이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지금 책을 읽으면서 노닥노닥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대에 읽고 싶은 책이나 읽으면서 지낼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다는 건 어쨌든 축복이다. -5쪽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책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읽는다는 주의는 아니다. 좋아하는 것일수록 사람들의 취향은 까다로워지고 선택은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많이 보고 많이 겪은 사람들은 눈이 높아진다. -6쪽

사실 책에 대한 취향은 사람에 대한 취향과 비슷한 데가 있다. 책의 경우에도 첫눈에 반할 수 있고,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매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나만의 사람으로 품고 있기가 어렵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아마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쓰인 듯한 책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쩌면 그런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7쪽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찌한다는 말인가. 나와 마찬가지로 유희도 꿈이 없다. 우리의 유일한 꿈이라면 나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면서 책을 읽는 것이고 유희는 영화를 실컷 보는 것이다. 생산자로서의 꿈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책 볼 시간, 책 살 돈, 영화 볼 시간, 영화 티켓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은 우리 인격의 어떤 부분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목숨 걸고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 한심하기 그지없다고 늘 생각한다. -8쪽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아주 많지만 그것에 관해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 순서는 무작위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작위로 선택되는 책이 마법처럼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거나 내 소소한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분명 내 스스로 발견해 내는 것이겠지만 어떤 때는 그 책이 나를 찾아온 것만 같은 때가 있다. -9쪽

소설집에 실린 단편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나는 숨을 고른다. 장편소설을 읽는 것이 장거리달리기 같다면 단편소설이 차례차례 실린 소설집을 읽는 건 100미터 달리기의 반복 같다. 단숨에 전력 질주하고 쉰 뒤 다시 뛴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는 이 경기에서도 취향에 따른 승패는 결정된다. -10쪽

소설의 가치는 읽는 독자가 각자 결정한다. 평론가들이 뭐라고 쓰든 언론이 뭐라고 떠들든 소설은 읽는 자의 몫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피력할 수는 있으나 독자가 그것대로 읽지는 않는다. 독자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다가선다. 채린처럼 연애소설에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어려운 학술 책에서 문학 책 못지않은 예술적 문장들을 찾아내는 이도 있으며, 시대를 따라가는 유행하는 책에서 동질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똑같은 책을 읽고도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11쪽

사랑에 빠진 자를 설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정상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다. 그들이 자신들 이외의 것을 살필 수 있다면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 사랑도 유효기간이 있다. 이성을 잃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시기는 반드시 지나간다. 진짜 사랑이 문제가 되는 건 그 다음부터인 것이다. -12쪽

나는 운전을 해본 적이 없지만 소설 속에서 열일곱 시간째 운전하고 있는 지미의 충고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세세한 부분에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지나온 것을 기억하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지표가 될 만한 것을 주목하고, 본능을 믿고, 실수를 인정하고, 그래도 계속 전진해야 하는 건 운전뿐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에 정통하면 그것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 정말 현명해지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은 결론을 가르쳐주지만 소설은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생각하는 법을 몸에 배게 해준다.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결론만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13쪽

책은 이 시대의 소비물 중 그리 비싼 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는 역시 돈이 필요하다. 책을 꽂을 튼튼한 책장, 그것들을 안전하게 둘 서재, 그리고 집.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르고 소유는 중독된다. -14쪽

인생에 처음 순간이란 반복되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는 경험에 불과하다. 처음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다. -15쪽

소설이 될 만큼 멋진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시시한 인생이라도 한 번쯤은 소설이 되어도 좋지 않은가, 라고 여긴다. 채린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무리 연애소설이 흥미진진하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진짜 연애보다 흥미로울 수는 없다고. 그리고 유희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책을 읽는 일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쓰는 일만큼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 요즘 들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일 아름다운 책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는 법이고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인생만큼 재밌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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