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유미리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무색무취한 언어로 그려낸 고통의 기록
재일한국인 2세이자 젊은 극작가 ‘양 히라카’는 자신의 연극 상연을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이질감뿐이다. 한편 그녀는 동행한 친구의 소개로 ‘박리화’라는 여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박리화의 얼굴에 난 상처에 반사적인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에 점차 이끌리게 된다. 그녀는 일본에 돌아와서도 박리화와의 관계를 조금씩 이어나가지만, 그녀를 둘러싼 다른 관계들은 하나같이 위태롭다. 빠찡꼬 가게의 기술자로 일하면서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집을 나가 호스테스로 일하는 어머니, 원조교제를 일삼는 여동생과 정신장애로 병원에 입원하는 남동생, 연극 연출가와의 불륜과 또다른 남자와의 위험한 만남, 그리고 낙태와 자살 미수……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듯한 생활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박리화와의 관계마저 그녀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어짐으로써 위기에 처하자 히라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번 한국을 찾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실과 배신감, 그리고 절대적인 고독뿐이다.
작가 유미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첫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부모의 불화와 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가족, 정신적인 교감을 얻지 못하는 남자들과의 연애, 낙태와 자살 미수 경험 등 그녀의 이후 작품들의 모태가 되는 모티프들을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적인 상처를 공유하며 인간적인 유대를 바랐던 상대의 배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와 슬픔이, 칼날 끝으로 그려낸 듯 날카로운 필체로, 또한 생의 의미만큼이나 둔탁한 무게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이든 간에 보호를 바라는 것, 힘이 없는 것, 가엾어 보이는 것들을 나는 미워했고 용서하지 않았다”는 주인공의 입을 빌린 유미리 자신의 고백은, 그녀의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특유의 태도와 시각의 원점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은 돌의 바다에 풀려난 물고기
영혼의 피를 흘리며 계속해서 헤엄친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제목에서처럼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피를 흘리며 헤엄쳐야 했다. 박리화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에게 사생활 침해로 고소를 당해 팔 년이 넘는 재판 끝에 출판금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재판 중 그녀는 문제가 된 일부분을 수정·삭제한 개정판을 법정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법이라는 절대권력의 틀 속에서, 개인의 인권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윤리 사이에서 문단과 언론의 일방적인 비판을 받아야 했던 유미리는, 이와 같은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면서 작가의 역할과 문학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나는 이 소설에 사실 그대로를 쓴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인 ‘나’의 눈을 거친 픽션일 뿐이다. 판결문에서는 ‘이것은 허구이고 이것은 사실이다’라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 단정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자세들이 일본에서 오랫동안 이어져내려온 사소설이라는 장르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모든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도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소송과 관련해 유미리는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문학동네, 2002) 등의 에세이에서 사건의 상세한 전말과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유미리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절망을 끊임없이 표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작가 자신의 모습과도 겹친다. 스스로의 살점을 도려내는 가위질을 통해 다시 세상에 탄생한 이 처녀작은 그녀에게 ‘쓴다는 것은 곧 싸운다는 것’이라는 의미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어주었고, 그 자체로 이미 그녀의 ‘싸움’의 기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대에 자살할 의미가 있는 작가는 유미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자살자들의 책이다.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의 분격과 격투이다.
_후쿠다 가즈야 (문학평론가)
유미리의 소설을 읽으면 목에 비수가 들이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소설을 사소설이라는 말로 폄하하는 치들도 있지만,
그런 명칭이나 비평 따위와는 상관없이, ‘쓴다’라는 행위의 무게와
그 ‘윤리’에 감동을 받기 위해 읽어야 할 소설이다.
_주간 포스트
마지막에 마음에 남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누구나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연소되는
그녀의 한결같은 생의 에너지이다.
_스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