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품절


난 극히 평범한 사람이야. 난 말할 게 없어. 그런데 요새는 어딜 봐도 자기 삶을 고백하며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뿐이야. 어느 신문을 펴봐도 <내 인생을 한 번 보세요>하고 외치는 사람이 꼭 있어. 텔레비전을 켜보라니까. 프로그램 둘 중 하나는 누군가가 그 또는 그녀의 문제, 그 또는 그녀의 이혼, 그 또는 그녀의 위법, 그 또는 그녀의 질병,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폭행, 파산, 암, 수술, 심리 요법에 대해 말하고 있을테니까. 그의 정관수술, 그녀의 유방 절제 수술, 그 또는 그녀의 맹장 수술에 대해 떠들기도 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걸까? 어째서 <날 좀 봐. 내 말 좀 들어봐>하고 외치는 걸까? 왜 사람들은 가만히 못 있지? 어째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일까?-19쪽

보통 사랑에 빠지면 이처럼 갑자기 탄력이 생긴다는 것을 당신을 알아챘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어떠한 것에도 끄떡하지 않을 뿐 아니라(지독한 착각),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도 끄떡없다고 믿는 탄력이 생긴다는 뜻이다-66~7쪽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어. 그렇잖은가? 음악이 멈추고 갑자기 서로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따위의 극적인 순간 같은 건 없다고. 물론, 어떤 사람한테는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냐. 아침에 잠이 깼는데 같이 잔 남자가 코를 골지 않는 걸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어. 그게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진짜같이 들리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당신이 뒤를 돌아보고 여러 순간 가운데 어떤 특정 순간을 택한 다음 그 순간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97쪽

두 가지 다 과거와 상관없이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속성이 있어. 사랑 역시 사랑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고, 권리박탈도 있고, 위험요소가 많은 싸구려 증권도 있어. 모든 유가증권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가격의 상승과 하락이 있고. 그리고 그 시세를 유지하는 데는 신용이 아주 중요한 열쇠지. 또 행운이란 요소도 고려해야지. 언젠가 네가 말했잖냐, 기업가들은 담력과 수완도 있어야 하지만, 또한 운이 따라야 한다면서. 그런데 네가 질을 체어링 크로스 호텔에서 만난 것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냐? 또 네가 그녀를 만난 행운이란 게 바로 나의 행운 아니겠냐?-200쪽

돈은, 내가 이제껏 이해하기로는, 사실상 중립적이야. 돈은 좋게 쓰일 수도 있고, 나쁘게 쓰일 수도 있어. 우리는 돈을 거래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사랑을 거래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도 있어. 하지만 돈과 사랑 그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어. -200쪽

한 사람의 행복은 흔히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세워지는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다. 세상은 냉혹하고, 하필이면 그게 스튜어트일 수밖에 없어서 엄청 유감스럽다. 어쩌면 친구 하나를, 가장 오래된 친구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말 도리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않고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으면, 우주를 만든 게 누군지 하여튼 그자를 비난해라. 나한테는 죄가 없다. 내가 생각한 것, 또 하나. 왜 사람들은 항상 빌어먹을 거북이 편만 드나? 한번 바꿔서 토끼 얘기도 들어 보자.-243쪽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면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은 서서히 상실하는 반면, 상대방에게 상처 입힐 능력은 줄지 않고 그대로라는 것이죠. 그리고 물론, 상대방에게 상처 입힐 능력이 줄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은 서서히 늘겠죠.-278쪽

사랑이란 - 아니,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 그저 섹스 뒤에 상대방이 당신을 달링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280쪽

우리는 가능한 한 돈에 익숙해지는 게 좋다.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은 아니다. 도리어 거의 모든 사람의 행복의 출발점이고, 대부분 사람들의 위안이다. 돈은 사랑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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