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구판절판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 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17쪽

세계가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이따금 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른다. -27쪽

장소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화장실과 식사. 형광등과 플라스틱 의자. 맛없는 커피. 딸기쨈 샌드위치. 그런 것에 의미는 없다구.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닐까? 안 그래?-50쪽

모든 것이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 큰 전쟁에 관한 일도, 돌이킬 수 없는 생사 문제도, 모든 일들이 먼 과거의 일이 되어갑니다. 나날의 삶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많은 중요한 일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오랜 별처럼 의식 밖으로 사라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일도 너무 많습니다. 새로운 양식,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말들.....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처럼 자기 안에 남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결코 마모되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190~1쪽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218쪽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256쪽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하고 조니 워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규칠일세.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 눈을 감아도 사태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으니까. 눈을 감았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사태는 더 악화되어 있을 거라네.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걸세, 나카타상. 눈을 똑바로 떠야 하네. 눈을 감는 것은 약자가 하는 짓이야.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자가 하는 짓이란 말일세. 자네가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있단 말이야, 똑딱똑딱하고." -285쪽

그것이 이야기의 공통적인 구성 요소지. 커다란 전환. 의외의 전개. 행복은 한 종류밖에 없지만, 불행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톨스토이가 지적한 대로 말이야. 당사자 이외의 타인에게 행복이란 교훈적인 우화이고, 불행이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일 경우가 많지.-307쪽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315쪽

세계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나카타 상. 매일 때가 되면 날이 밝지. 그러나 거기 있는 건 어제와 똑같은 세계는 아니지. 여기 있는 건 어제의 나타카 상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369쪽

주위에서 잇따라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요. 그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를 잘 구별할 수가 없게 됐어요.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내가 그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돼요.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말예요.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의 궤도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거든요. 아니, 무섭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3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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