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절판


간단히 말해, 내 경우는 침대에서, 그것도 누운 자세에서 책이 가장 잘 읽혔다. 예전에는 배를, 요즘에는 등을 대고 누워 읽는다. 베개 두 개를 괴어 든든하게 받쳐놓고. 앉은 자세로 하는 독서는 학교, 일, 신체적인 제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즐거움의 일부가 증발해버린다. 지하철에서 하는 독서를 빼고는-13쪽

책은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닌다.-24쪽

빌린 책은 신성한 것이다. 그 책을 펼치는 것조차 이미 신성 모독처럼 느껴진다. 빌린 책을 가방에 넣고 방금 우체국에서 우편환을 찾은 기숙사 학생처럼 잔뜩 긴장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분실이나 절도는 자연재해보다 훨씬 심각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27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서관을 드나든다. 그건 금전적인 여건과 공간의 문제다.-36쪽

이빨 빠진 식기, 구두 닦는 걸레로 사용해도 시원찮을 낡은 스웨터를 버리는 것은 얼마나 속 후련한 일인가. 일곱 개의 야채 껍질 벗기개 중 다섯 개, 낡은 전기 믹서, 1965년부터 1985년 사이 세금 관련 서류 뭉치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은 또 얼마나 속 시원한 일인가. 하지만 책을 버리는 것은 연애편지나 할머니의 공책을 불태우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38쪽

어떤 표지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탐을 내던 책조차도 거들떠보지 않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독서를 하다가 책의 내용과 표지, 아니면 텍스트와 저자 사진을 대조해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저자의 사진 역시 내 신경을 건드린다. 이 작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나는 수염도 없고 바싹 마른 그를 상상했다. 그런데 턱수염을 기른 데다 살이 쪄 투실투실하기까지 하다. 도도하고 투박한 여자일 거라고 믿었던 저자는 한껏 교태를 부리는 세련된 도시 여자다.-63쪽

책에 배인 나쁜 냄새는 결정적이다. 반면, 좋은 냄새는 점점 더 섬세하게 변해간다. 책들은 언제나 본래의 정수를 약간 간직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사라질 새로운 향들로 풍부해져서는 아주 섬세하고, 아주 뿌옇고, 아주 건조한 냄새를 발산하게 된다.-66쪽

각각의 책은 연주자의 손가락에 따라 다르게 울리는 독특한 악기다.-71쪽

비평가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펼치는 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예배당의 하녀들이 주일 미사때마다 나와 퍼뜨리는 향에는 질식이라도 할 듯 기겁하는 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입소문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114쪽

누가 나에게 "최근에 읽은 것 중에 뭐가 좋았어?"라고 질문을 하면 무슨 조화인지 나는 완전한 건망증 속을 헤매게 된다. 그렇다,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115쪽

책의 경우에는 수없이 많은 접근 방법과 선택 동기가 있다. 작가, 나라, 만남, 장르, 정황, 판형, 순간적인 기분, 계절, 집 등등. 수없이 많은 것들. 모든 것이 구실이 된다. 관계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21쪽

독서광은 아니더라도 책을 즐겨 읽던 사람이 책 읽기를 마다하면 그건 분명 어떤 병의 징후다. "책 읽을 마음조차 안 생겨." 이 말은 신경쇠약, 피곤,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뜻한다.-138쪽

"책 읽을 마음조차 안 생길 때는 단편을 읽어야 해요. 한번 시도해봐요, 나아질테니." -140쪽

독서광은 손전등, 가로등, 깜빡이는 네온등, 자동차 미등, 촛불의 가물가물한 빛 아래에서도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쓴다.-156쪽

독서광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저장할 수 있을까? 그는 저장하지 않는다.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다. 새것이 옛것을 대신한다. 망각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그는 읽고 있는 것을 기록한다. -157쪽

나는 누가 어깨 너머로 내 책을 읽는 것 역시 참지 못한다. 마치 목욕을 즐기고 있는데 누가 불쑥 들어오는 느낌이다. 무례한 시선에 기분이 상한 나는 아예 독서를 포기하고 만다. 누가 내 연못에 돌멩이를 던졌다. 낱말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문장들이 허물어진다. 모든 것이 지워지고 만다.-162쪽

아름다움이란 사람이나 물건이 자신의 못난 부분마저 좋아하도록 만들 줄 알 때, 그것을 자신의 개성과 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1쪽

똑같은 장르, 엇비슷한 즐거움, 비슷한 분량, 둘다 대기 상태, 같은 작가. 나는 내가 왜 어떤 책은 두 시간만에 미친듯이 읽어치우면서 다른 책은 일주일 동안이나 질질 끄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212쪽

독서에 관한 한, 시민이라고 모두 평등하지 않고 남녀 간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방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소화가 잘 안 되는 책이 있고, 배부른 독자가 있는가 하면 굶주린 독자가 있다. 식욕은 기질뿐만 아니라 계절, 상황, 장소, 주변장식, 고요, 잡음, 결핍, 풍부, 사랑, 증오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기분과 마음의 움직임, 정신적, 신체적 요동을 좇아간다. 내 경우에는 거기에 기상 악화도 추가된다.-213쪽

각자에게는 매일 다른, 자신의 리듬이 있다. 그러니 아무도 참견하지 말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기를.-214쪽

나는 책 없이, 담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독서는 정말 그렇게 바람직한 어떤 것은 아니다. 아이가 책을 읽지 않아 속상해하면서도 혹시라도 마약에 손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뭘 모르는 부모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책은 마약과 같기 때문이다.-222쪽

지하철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지만 음악만 틀어놓으면 아무리 소리를 줄여도 도무지 집중을 못한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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