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절판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쓰고 버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덧입기도 한다. 신기술과 디자인의 혁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상품에 열광할 때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주고 즐거운 울림을 일으키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네 일상에 가려진 사물들, 그것들이 오랜 시간 존재하는 이유는 기능이 탁월하다거나 외형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환경과 사물이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마법과도 같은 추억 때문이다. -20쪽

삶의 질이라는 건 조금 더 좋은 공기와 신선하고 풍족한 음식, 깨끗한 잠자리와 같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별것 아닌 일상에 깃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도시 한복판에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할 만한 많은 공원은 영국 사회의 큰 장점이다. 건물을 지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넓은 녹지를 조상과 후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자산으로 여긴다. -62쪽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길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찾고 실천하려는 것이 정원 문화에 담긴 기본 정신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생산한 과거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비되지 않는 디자인을 진정한 디자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가꾸어온 정원처럼 장기간 꾸준한 소비를 이끌 수 있는 디자인이다. 논에 보이는 것만이 디자인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환경을 지속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만들고 사용한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 것처럼.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69쪽

옛것의 가치를 재탐색하고 확장 가능성을 연구해 쓸모를 생산하는 것은 런던 디자인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과거의 유산이 투영되지 않은 미래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77쪽

테이트 모던을 설계한 스위스 건축업체 헤르조그 앤 드 메롱은 기존 건물의 외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내부 공간을 미술관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당시에는 수많은 혹평이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대중 문화와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테이트 모던을 이루는 특화된 콘텐츠는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전체 일곱 개 층 중에서 네 개 층이 전시관으로, 1층의 넓은 터빈 홀은 매 시즌마다 미술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 공간으로 활용된다. 애니시캐푸어나 미로슬라브 발카와 같은 설치 미술 대가들의 작품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미술은 어렵다거나 조용히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86쪽

사실 박물관에 가면 전시된 것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꼭 봐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이런 생각이 작품을 향한 개인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 박물관을 멀리하게 만들기도 한다. 왠지 관람 시간 종료 전까지 머릿속에 꾹꾹 채워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다.
브이앤에이가 행한 프로젝트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박물관의 체제를 개선하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 변화를 모색하는 데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생각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 학술적이고 엄숙하던 박물관이 문화 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향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참여는 박물관의 진화를 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약간의 여지만을 만들 뿐이다. 누군가가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는 여지,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여지, 편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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