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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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선율에 맞춰 공원 길을 달렸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램프가 어두운 길을 비추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와 윤상의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 내 숨소리도 들렸다. 머리 위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고, 저녁 공기가 모두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28~9쪽

독학의 절정은 실패하는 과정에 있다. (요즘 같은 취업 대란의 시대에 이런 말 하기 겁나지만) 실패하지 않으면 성공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취향에 맞지 않는 노래들을 많이 들어봐야 내가 어떤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취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취향에 맞지 않은 음악들을 무수히 걸러내고 남은 '내 노래'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2쪽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 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93~4쪽

음악도,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사랑해) 그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풀기 위해(흠, 푼다니까 좀 야릇한 어감이 되어버렸지만) 반복해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쪽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134쪽

노래를 듣다가 울컥,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 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후에야 닦아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거다. 듣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갑자기 한숨을 쉬게 되고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들을 때마다 슬픔은 반복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래에 익숙해지면 슬픔은 사라지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그 노래를 들으면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147~8쪽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묻게 된다. -150~1쪽

사람들의 성격이 모두 다르다는 게 놀라울 때가 있다. 각각 고유한 퇴적층이 되어 유일한 삶과 생각들을 쌓아올리며 자신만의 성격을 완성했을 테니 성격이 다르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문득 생각하면 놀랍다. 동물들도 그럴까. 같은 동물이라고 해도 태어난 시간이 다르고 자라온 동네가 다르니 자신만의 성격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동물 애니메이션 때문에 동물의 입장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같은 종의 고양이라도, 같은 종의 개라도 성격과 취향과 철학이 다를 것 같다.
'한번 정해진 성격은 영원히 그 사람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내 생각엔 (우리가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성격 역시 변하는 것 같다. 성격을 고쳐야지, 라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큰일을 겪거나 중요한 사건을 맞닥뜨리고 난 후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는 알지 못하더라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아, 그때 그래서 내가 변한 게로군' 하고 깨닫게 된다. -172~3쪽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180쪽

모든 음악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된다. '실용음악학과'라는 학과 이름을 들을 때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그럼 뭐야, 실용음악의 반대는 무용음악인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18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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