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구판절판


그들은 첫 순간부터 자궁 속의 일란성 쌍둥이처럼 붙어 지냈다. 그들은 동년배들이 흔히 하듯이 우스꽝스럽게 거창한 의식으로 ‘우정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세계에서 빼앗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왜곡되어 무의식적으로 처음 솟구칠 때 사람들은 잘난 척 으스대며 그런 우정을 맺는다. 사랑과 우정을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정은 그 자체 하나의 삶으로 간주되는 모든 위대한 감정이 그렇듯이 진지하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모든 위대한 감정처럼 수치심과 죄의식을 배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대가 없이 빼앗을 수는 없다.-46~7쪽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마련이야.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된 일이지. 그런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야.-53쪽

진실, 삶에서 맡은 역할과 복장,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진실이 있다.-68쪽

이 생명 없는 물체들은 나무, 금속, 직물의 법칙에 따라서만 존재했다가, 사십일 년 전 어느 날 밤 생생한 의미로 채워지고 새로운 의의를 부여받은 것처럼 추억, 한 시간, 한순간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태엽을 감은 기계처럼 되살아난 이제, 물건들은 그것을 기억해냈다. -90쪽

내 고향은 감정이었어. 이 감정이 상처입었고, 그렇게 되면 떠날 수 밖에 없네-119쪽

세상은 아무것도 아닐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나이가 든 훗날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네. 사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꿈처럼 그냥 던져버릴 수 있어. 연대는 기억나지 않네.-122쪽

참 신기하게도 기억은 쌀과 뉘를 골라낸다네. 십년, 이십 년이 지나보면,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 그런데 사냥 갔던 일이나 책의 한 구절, 아니면 이 방이 어느 날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네-123쪽

고독이라는 것도 참 묘하네. 그것도 정글처럼 이따금 위험과 놀람에 가득 차 있어. 나는 온갖 고독을 알고 있네. 삶의 질서를 아무리 엄격하게 좇아도 헤어날 길 없는 권태. 그 뒤를 잊는 갑작스러운 폭발. 고독도 정글처럼 불가사의하다네-133쪽

내가 본 사람들 사이의 호감은 결국 모두 허영과 이기심의 늪에 빠져 질식하고 말았지. 동료애와 동지애가 어쩌다 우정처럼 보일 때가 있어. 공동의 관심이 우정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지. 또 사람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밀함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 일종의 우정으로 보였던 친밀함을 후회하게 되지. -142쪽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155쪽

정열은 이성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열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받든 상관 없이, 자신을 표출하려고 하네. 다정함과 정중함, 우정, 인내심을 대가로 받아도, 자신을 끝까지 실현시키려 들지. 모든 커다란 정열은 희망이 없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정열이 아니라 현명하게 계산한 타협, 얼치기 이해타산과의 흥정이기 때문일세.-171쪽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172쪽

신들이 질투심 많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들에게 행운의 일 년을 선사하면, 즉시 이 부채를 기록해두었다가 인생의 끝에 높은 이자를 붙여 돌려받길 원하지.-208쪽

지금 가련한 거짓말쟁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세. 인간이 아무리 진실을 찾고 경험을 축적해도 타고난 천성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걸세. 이 변하지 않는 근본, 타고난 천성을 현명하고 신중하게 현실에 적응시키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세.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더 현명해지거나 상처를 덜 입는 것도 아닐세, 아니고 말고...... -210쪽

사물이나 방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네. 발견할 때와 작별할 때가 있지.-213쪽

우리는 세세한 것들을 통해서만 본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세. 나는 책과 삶에서 그렇게 배웠네. 먼저 세세한 부분을 다 알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중요하고, 사물 뒤에서 어떤 말이 빛나는지 결코 알 수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잘 헤아려보아야 하네. -215쪽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네.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처음 순간부터 알면서도 그만두려 하지 않아. 인간과 운명, 이 둘은 서로 붙잡고 서로 불러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네. 운명이 슬쩍 우리 삶으로 끼어든다는 말은 맞지 않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운명이 들어오고, 또 우리가 운명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걸세.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을 행동이나 말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네. -219~20쪽

삶의 가장 큰 비밀과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네. 그 이유는 자연이 술수와 힘을 사용해 그러한 만남을 방해하는 데 있을걸세. -223쪽

정조란 무엇이고, 우리는 사랑한 여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던가? 나는 살 만큼 살았고, 이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네. 정조는 가공스러운 이기주의가 아닐까? 인간이 좇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허영심의 산물이 아닐까? 우리는 정조를 요구하면서, 과연 상대방이 행복하길 원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정조라는 것에 구속되어 행복할 수 없는데도 정조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데도 정조나 희생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 242~3쪽

‘왜’와 ‘어떻게’에는 관심이 없어.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 사이에 ‘왜’와 ‘어떻게’는 어쨌든 한탄스러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일세. 처음부터 끝까지 경멸스러울 정도로 간단하지. 그것이 가능했고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 때문에’ ‘그렇게’이지. 이것은 진실일세. 끝에 가서 자질구레하게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261쪽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목숨을 바칠 만큼 가까운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은밀한 범죄이네.-271쪽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으면 대답해주게.-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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