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밤의 코코아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11월
품절


인생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척하면 착 통하지만 좀더 소중한 것,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점이 조금 분명치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충직한 나는 그와 있으면 조바심이 난다.
나와 사귀면서도 나를 갖고 싶어하는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나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가 좀 뭐해서 슬쩍 운을 띄우면,
"아니…… 별로. 그……" 이런 식으로만 대꾸한다. -11~2쪽

스물다섯 살 여자에게 앞뒤 안 가리는 연애는 이미 어울리지 않는다. 스물다섯 살 여자의 연애는 좀더 상큼하고 여우 같아야 한다. -34쪽

연애라는 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멋진 건지도 모른다. -46쪽

나는 돈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스물여덟 살이 되고보니 돈이란 여자가 스스로를 지키는 무기라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꼬박꼬박 생활비를 내고 저축도 한다.
하지만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는 남자와 데이트할 때 함께 돈을 낸다. 내 돈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상대방의 돈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52쪽

"와다와 있는 게 가장 좋아. 마음이 편해."
그는 스스럼없이 내게 말한다.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 사이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은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난 비프스테이크를 좋아해' 할 때 쓰는 '좋아한다'와 다를 게 없었다.-55쪽

세상엔 좋은 남자가 가득할 거야.
나는 봄을 맞아 겨울잠에서 깬 것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조끼를 입은 모습이 그렇게까지 섹시한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매력에 이끌렸던 것은 내게도 그를 향한 욕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빠져들지 않고 몸을 빼버린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88쪽

성실하게 일하고 월급으로 알뜰살뜰 절약하고 살면서 남은 시간에는 내 안에서 종잡을 수 없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이야기들을 밤늦게까지 글로 옮겼다.
헛된 노력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끝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보낸 청춘의 날들은 엄청난 낭비가 되어버릴 것이다.
결혼도 연애도 못 해보고 싸구려 원고지만 더럽히면서 청춘을 다 흘려보낼지도 모른다.
이런 무서운 불안이 나이와 함께 깊어갔다. -98쪽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남녀의 차이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 같다.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내가 이러니까 그도 이럴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니, 그런 사실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없는 일심동체라고 굳게 믿었다.
그건 아닌데……
일심동체라도 남편은 남자고 아내는 여자인 것을.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겨우 알았다. -111쪽

이모는 이모부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그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젊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젊을 때는 결벽이 심해서 남녀 간의 응수에 더 민감하니까…… 남녀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교류, 말없이 오가는 시선, 그런 것이 핑핑 아플 정도로 느껴져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139쪽

나는 몇 살이 되어도 좋으니까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짝사랑이나 조건을 따지는 결혼이 아닌. 그런 진한 사랑은 어쩌면 이모 부부처럼 마흔이나 쉰이 넘어서야 겨우 찾아올지 모른다. '뒤따라갈께' 하고 정말로 뒤따라갈 수 있는 사랑. -147쪽

"온다 씨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지네요. 왜 그럴까요?"
"제가 잘 들어주나봐요."
"그런가."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치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내 마음의 파문이 선생님의 마음에 파도를 일으켜서 유쾌한 기분으로 이끄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은 상대와의 관계에서 일부러 꾸며서 즐거운 척할 수 없다.
처음에는 그런 척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거짓이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함께 있는 게 진심으로 즐겁다면 분명 상대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해진다. 그렇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162쪽

나는 치사가 나름대로 나이 화장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물예닐곱이 지난 여자는 이미 자신을 생겨먹은 그대로 내보여서는 안 되니까.
여자는 이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설계해서 그 이미지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교정하고 수련해야 한다. 나는 그걸 나만 아는 말로 '나이 화장'이라 부른다.
파운데이션이나 립스틱을 바르는 화장만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의 여자가 돼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73쪽

치사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더 덜렁대고 남자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고 농담이나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것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른 넘어서까지 들떠서 지내는 여자는 없다. 서른이 넘으면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안착할 곳을 찾게 된다. 미혼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사이에 자연스레 자신의 등딱지에 맞는 구멍을 파게 되는 것이다.
우아하게 나이를 드러내면서 시크한 이미지를 풍기려는 여자도 있고, 젊어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얼굴에 덧칠하는 여자도 있고, 전투를 포기한 듯이 화장을 그만둬버리고 눈가 주름이나 입가의 팔자주름을 안쓰러울 정도로 깊게 파는 여자도 있다.
치사는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해 눈에 띄는 '아줌마'가 됨으로써 노처녀의 콤플렉스를 날려버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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