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구판절판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누구의 지문指紋으로도 뭉개버릴 수 없는 앨리시어의 지문을 배양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8쪽

그 계집애는 한 권뿐이었다는 것을 알까. 앨리시어의 동생이 가진 단 한 권의 공책. 그게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까. 그가 공책을 아끼려고 필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이전에 필기했던 내용을 지우고 지우개질 흔적으로 거칠거칠해진 종이에 다시 필기한다는 것, 그런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 것이다. 멍청하니까. 아둔하니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맛을 보아야지. 배가 아플 정도로 서글픈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계집애는 맛을 봐야지.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찢어져야지. 두고봐라 너도 찢어져야지. -18쪽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그래 그거. 가엾을 정도로 왕따를 당하다가 감투를 쓰고 나니 사랑받게 되었다는 얘기.
그런 얘기냐.
남들하고 다르다고 놀림을 당하고 외톨이로 지냈잖아. 그러다가 싼타한테 뽑힌 거잖아. 싼타의 썰매에 묶여 한자리 차지하게 된 거지. 그러고 나니 사랑받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니냐? 루돌프 코는 그전에도 빨갰는데 이제 그 코가 뭔가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비로소 사랑받는 코가 되었다는 거지. 게다가 길이길이 기억되기까지. 치사한 노래다. -22쪽

그녀가 그년을 씨발 년이라고 말할 때 그년은 진정 씨발이 된다.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년 천만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 그 정도로 씨발이라서 앨리시어는 그녀가 씨발, 하고 말할 때마다 고추가 간질간질하게 썩는 듯하고 손발이 무기력해진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27쪽

알겠냐 너.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들으면 씨발, 이 된다는 거.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말해도 씨발 된다 너.
왜?
말하면서 자기 말 듣게 되잖아, 씨발 씨발, 하고.
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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