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말이 없는 어린애였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마치 홍찻잔에 곁들여진 각설탕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분은 어른 옆에 있을 때만 느끼는 것이었지만,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어린 옆에서 지냈고, 어린애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어른과 함께 있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홍차에 곁들여진 각설탕으로 지내는 편이 성격에 맞았기 때문이리라. 별 쓸모없는, 그러나 누구나 거기에 있기를 바라는 각설탕인 편이. -13쪽

모든 것이 끝난 후, 우리의 축 늘어진 몸은 서로에게 익어 달라붙는다. 마치 오래 쓴 장갑 한 짝씩처럼. 혹은 핏줄이 같은 어린 두 아이처럼.-32쪽

나는 오늘밤,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오늘 밤 내가 살아있고, 애인 역시 살아 있다는 것에. 불쑥, 이 몇 시간이 멋드러지게 느껴진다. 밤하늘도, 복작복작하게 어질러져 있는 테라스도. 맥주도 닭고기도, 태피터 커튼까지도-45쪽

남자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색다른 과일처럼 독특했다. 다만,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 멀고 애매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54쪽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속삭인다. 그것은 마치 완만한 자살 행위 같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종점. 그곳은 거친 벌판이다.-61쪽

내게 인생이란 운동장 같은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테지만,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무질서하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 모두들 그 곳에서, 그저 운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76쪽

애인은 내 등을 껴안고, 예쁘다고 말한다. 이 공원에 있는 다른 어떤 여자보다도 예쁘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란 것을 안다. 나는 입과 눈은 너무 큰데, 입술은 너무 얇다. 그리고 두 팔의 살은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지적은 하지 않는다. 애인이 애써 해준 거짓말이니까, 달콤하게 그러나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받아들인다.-80쪽

나는 자신을, 애인의 인생의 사랑방을 빌려 더부살이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낀다. 그의 옵션으로. 그의 인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112쪽

갑자기 외로워지고, 애인의 미소도 그 외로움을 치유해주지 못한다. 외로움은, 불쑥 찾아와 입을 쩍 벌린다. 그런 때마다 나는 걸려 넘어져 송두리째 삼켜져버린다-116쪽

슬픔.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슬픔에 대해, 빈틈없이 생각하고 밝히려 하면 할수록 그것은 진귀한 식물이나 무엇인 것처럼 여겨지고, 전혀 슬프지 않은 기분이 든다. 다만 눈앞에 엄연히 있을뿐. 나는 이 집에서 그 진귀한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웬만큼 잘 맞는지, 그것은 놀랍도록 쑥쑥 자라고 있다. 그것 앞에서 나는 감정적이 되기가 힘들다. 슬픔은 나와 따로 떨어져있어서, 나는 나의 슬픔을 남 일처럼 바라본다. -130쪽

애인을 만나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대체 어떤 남자들이었을까. 모든 것이 너무 멀어서 마치 타인의 기억 같다. 내 자신의 과거가 타인의 추억담을 듣는 정도로만 느껴진다-132쪽

나의 애인은 내가 아름답다고 한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더이상 1밀리미터도 길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도 완벽하니까, 라고. 속눈썹 숫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언제까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을까.-134쪽

몇 년 걸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온화한 친밀감, 서로를 사랑스럽다 생각하고, 서로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그런 장소에. 나는 모른다. 이 곳이 내가 오고 싶었던 장소인지, 와야 하는 장소였는지. 그저, 알고 보니 이런 곳에 와 있었다.-157~8쪽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사랑에 빠졌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176쪽

"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보고 싶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방금 전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인따위 만난 적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19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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