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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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들이 진정,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웃고 있는 본인의 내면에서 마음만이 가난해진다. 점점 벌레 먹은 자리만 커져 간다.-17쪽

그 밤은, 불가사의하도록 긴 밤이었다. 길고, 수많은 단층으로 나뉜, 그러나 내내 한 가지 톤을 유지한 인상적인 밤이었다.-21쪽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훨씬 더 강렬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이미지가 있어, 모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듯한 기분이 든다. 희망이나 빛, 그런 것들을 전부 끌어 모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22쪽

깊은 밤에 마시는 뜨거운 커피는 왠지 애틋한 기분이 든다. 어째서일까?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렸을 적에는 안 마셨을텐데, 밤새 첫눈 내린 아침이나 태풍이 몰아치는 밤처럼, 마실 때마다 사랑스럽다.-51쪽

"사쿠미. 변했군, 굉장히."라고 말했다. 옛날, 친구 집에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빨갛고 둥글고 커다란 것이 들어 있었어. 잘 알고 있는 것인데도 순간 무엇인지 생각이 안 나더군. 그것은 수박이었지. 프루트 펀치를 만들려고 껍질을 벗겨두었다는 거야. 꽤 애를 먹었을텐데 왠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게 수박인 줄 금방 알지 못했다는 점이 우스웠어. 그때 느낌하고 비슷해. 그렇게 변했어. 라고 그는 작가다운 예를 들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기준은 무엇일까-118쪽

한 번 만났더니 또 만나고 싶고, 한 번 섹스를 했더니 또 하고 싶어져서 두 번, 세 번, 네 번으로 늘어가는, 그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씩밖에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122쪽

앞으로 인생에, 가령 오늘과 같은 날이 있다 해도, 이 하늘, 구름의 모양, 공기의 색, 바람의 온도는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175~6쪽

우리들이 백만 권의 책을 읽고, 백만 편의 영화를 보고, 애인과 백만번의 키스를 하고서야 겨우, <오늘은 한 번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단 한 번에 깨닫게 하고 압도하다니, 자연이란 그 얼마나 위대한가. 구하지도 않는데, 그냥 놔두면서 알게 한다. 누구에게든 구별 없이 보여준다. 구하여 아는 것보다 훨씬 명료하게. -176쪽

무엇이든 스스로 겪어서 획득하는 것이 가장 생생한 포획물이니까.-178쪽

테트라포트(tetrapod)에 반사되는 저녁 해의 희미한 빛을 보면서 불쑥 굉장히,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돌아간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평소와는 달리,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몹시 허전하게 느껴졌다. -182쪽

감상적인 기분에 젖는 것은, 한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느슨해져 있으면, 추억이 망령으로 둔갑하여 차오른다. 잠겨 있으면 기분은 좋지만 금방 싫증이 난다. 얼른 끝내고 싶어 강렬한 재현의 빛 속으로 의식을 날려보내 곧바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요즈음 베리즈에서의 일들이 늘 나의 주위를 뿌옇게 둘러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334쪽

아아, 인간이란 참 바보스럽지. 살아간다는 것과 그리운 사람과 장소가 늘어난다는 것은 이토록 괴로운 일인데, 애달프고 살은 에는 반복을 계속하는 것일까, 도대체 뭐란 말인가.-355쪽

이렇게 성격이 강렬한 두 사람이 함께 저 <연애>라는 끔찍스런 태풍에 좌지우지되면서도 익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의 본질에 거리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있고, 서로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인이고, 둘 사이에 생겨나는 공간도 하나밖에 없다. 그러함을 알면, 더구나 거기에 어떤 특별히 재미있을 만한 공간이 있다는 걸 알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좁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작가이기 때문에 거기서 멈춰 설 수가 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는 양지와도 같은 것, 따스하고 밝고, 혼자서는 창조할 수 없는 공간, 거기에 수많은 것들이 생성될 수 있는 미묘한 공기만을 소중하게 키워간다. -360~1쪽

오랜만에 그렇게 단순한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르는 아이들과 한 교실에 갇혀, 그 안에서 억지로 사이가 좋아질만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운명이고, 그것이 친구가 되는 일이라면 그 얼마나 갑갑한 일인가. 어른이 되었으니 자유롭게, 친구는 거리에서 자기 눈과 귀로 구하면 될 텐데, 상자 속에 처박혀 있던 때의 버릇이 떨어지지 않는다. -408쪽

내년의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렇다는 걸 잘 알면서, 모두들 잘도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두들 요령 좋게 연막을 치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고, 직면하여 대항하기도 하고, 울기도 웃기도 원망하기도 얼버무리기도 한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를 너무 민감하게 느껴 부서지지 않도록.-470~1쪽

인간은, 마음속에서 떨고 있는 조그맣고 연약한 무언가를 갖고 있어서, 가끔은 눈물로 보살펴주는 것이 좋으리라.-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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