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사람들은 독기나 오기를 품으라고 말하지. 마치 싸움을 할 때 독기를 품으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말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뜨거운 것들은 결코 힘이 되지 않아. 그렇게 뜨거운 것들을 들고 싸우면 다치는 건 너밖에 없어. 정작 투지는 아주 차갑고 조용한 거지.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네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툭툭, 방울토마토 하나. 툭툭, 방울토마토 두 개. 툭툭, 방울토마토 세 개.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25~6쪽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26쪽
금고 속의 정적이, 기묘하다. 천장의 할로겐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수십억 혹은 수백억 원이 넘는 보석과 골동품이, 금세 무감각하다. 저것들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마냥 행복해질 거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 반짝반짝하는 것들을 가지려고 훔치고, 사기치고, 속이고, 거짓말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고 당장 손에 쥘 수 있어도 결국 금고 밖으로 못 가지고 나간다.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다른 놈들 인생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아무도 금고 밖으로 저 반짝이는 것들을 손에 쥐고 나가지 못한다. 그것은 저 보석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 불안하니까. -42~3쪽
사람들은 사기꾼이 거짓을 파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진실에 가까운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가려 하고, 자신이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 (중략) 환상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금세 진실이 된다. -47쪽
장지구는 벽시계를 봤다. 오후 5시였다. 벌써 5시다. 오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일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장지구가 반드시 자정까지 섹스를 끝내고 호박 마차 같은 것을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꼭 일곱 시간이 남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섹스는 새벽 1시에 해도 되고 2시에 해도 된다. 33년이나 묵은 동정을 걷어차버리고 훨씬 홀가분해지고 긍정적인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 발제문을 완성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건 섹스가 러닝머신이나 벤치 프레스처럼 혼자 우쌰우쌰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섹스는 반드시 둘이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랑 한단 말인가? 장지구는 '누구?'라는 질문에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그러자 절로 '인생의 쇠털처럼 많은 나날들 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산 건가? 남들은 그렇게 쉽게도 하더니만, 나에게는 왜 단 한 명의 그 '누구'도 없는 것일까?' 따위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154쪽
"나 같으면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날아가겠다. 복잡하고, 땅값 비싸고, 사람 많고, 이 콧구멍만한 명동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거 이제 지겹지도 않냐?" "지겹지. 터무니없이 지겹지. 매번 같은 사람들에, 같은 일에, 같은 농담에, 같은 술자리에, 정말 지겨워. 가끔은 섹스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지겨워서 하품이 다 나온다니까" 하며 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겨우면 그만해도 되잖아?" 내가 물었다. "외로우니까. 그런 짓이라도 안 하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 안이 말했다.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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