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품절


마치 두더지가 땅속의 온기를 탐내듯, 인간은 한 줌의 친절함과 인정의 필요를 느끼는 생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나에게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이다. 따스함을, 이해를, 건강을 갖고 싶다. 살고 싶은 의욕을 갖고 싶다.-28쪽

무지개나 눈뿐 아니라,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괴롭거나 고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좀 더 깊이 보게 된 사람, 자기를 응시하게 된 사람, 그리고 죽음을 멀리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이란 별다른 감동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준다.-39쪽

권태란 우리를 소모시키고 파괴시키는 격렬한 열정이다. 권태란 이제 서로 신뢰할 수 없게 된 옛 공범자 두 명 사이의 무서운 증오감이다.-45쪽

많은 사람들은 아주 쉽사리 자기의 동심을 잃어버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스크루지가 되어 버린다.-48쪽

인생이란 우리가 전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 무엇으로서 채워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공허하고 불만족한 것이 될 것이다.-61쪽

나무는 하늘 높이 높이, 치솟고자 발돋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에까지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69쪽

매일 매일 향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다른 사람의 증오, 혐오로부터 구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하고 자신이 또 존경받지 않으면 안된다-86쪽

나는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마찬가지다.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시공에 비하면 모든 것은 그렇게도 헛된 일이다. 요컨대 인간의 생은 추구할 만한 게 못된다. 가깝든 멀든 미래에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행동하고 있다.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 모든 것, 모든 다른 것은 끔찍이도 생각하지만 죽음만은 조금도 생각질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게는 타부(禁忌)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이기 때문에... 스케줄에 따라 일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연구하고, 사랑하고, 엔조이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겐 종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인간의 생의 방식이란 얼마나 그릇되고 자기 기만인 것인가!-101쪽

여자가 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회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무위와 무기력과, 무능 등등에 대한 하나의 구실로써 그들이 여자라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여자가 된다는 어려움에 자기를 상실한 많은 젊은 여성들, 너무나도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결혼을 결승점, 하나의 최종적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력과 진지함과 끈기가 부족하다.
 사람들은 전력을 기울여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쾌활하게 내기를 할 뿐이다. 득실이 그리 생기지 않도록...결국 결혼이라는 피난처가 어쨋든 시민적 안전을 배려해준다. 때문에 훌륭한 여자의 출현이란 극히 희귀할 따름이다. 여자가 훌륭해지려면 여러 가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그걸 방해하고 있다. -107쪽

주어진 짧은 시간내에서, 단 한 번인 이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맨 끝을, 맨 속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 데까지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죽는 것- 애써서 노력하다 쓰러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 모습이다.-123쪽

1961년이 품고 있는 무언지 어둡고 무시무시한 새 맛, 긴장미가 새벽의 냉기와 함께 심장부를 압박한다. 필연코 행복이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지없는 성실한 노력을 바친, 후외도 애석함도 없는 일념으로 만들어야겠다. 생명이 타오르는 실감이 있는 팽팽한 활줄같이 귀중한 순간들의 연결선으로 된 일년을 만들어야겠다. 과감할 것, 견딜 것, 그리고 참 나와 참 인간 존재와 죽음을 보다 깊이 사색할 것을 계속할 것,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기 성실을 지킬 것, 언제나 의식이 깨어 있을 것. 이것만이 어떤 새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나의 의무인 것이다-125~6쪽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순전한 이기 주의로 보더라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은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135쪽

온갖 우정이나 애저의 토대는 존경(그의 야심, 의욕, 능력에 대한)과 신뢰(도덕적인, 인간으로서 기본적인)다. 이 두개만 있다면 육체적 매력이나 소위 성적 매력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147쪽

죽음은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약 사람의 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적 지속과 성공의 도달에는 관계 없고 순간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188쪽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은 질식시켜 버릴 것, 오로지 맑은 지혜와 의지의 힘에만 기댈 것, 이것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곡예사인 것 같다. 그 상태에만은 야심을 느낀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물같이 맑은 의식의 세계에서 늙은 잉어같이 살고 싶다.-193쪽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상태의 완화, 또는 감정의 예리함이 무디게 죽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맨 의식 밑에서 우리는 결코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195쪽

부부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미 고전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화났을 때 타인에게 그걸 옮겨서는 안되는 것처럼 부부 사이에서도 그래서는 안된다.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예의도, 감사도 우러나오는 것이다. -211쪽

말은 일단 발언하면, 그 말이 사람을 지배하고 (나쁘게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또 이끌고 나간다. -241쪽

가끔 그가 나에게 구체적인 인물로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으로 엄습할 때가 있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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