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7년 1월
구판절판


금성은 구름이 에워싸고 있는 무더운 별이다. 더위와 습기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젊은 나이에 죽는다. 30년쯤 살면 전설이 될 정도이다. 그런만큼 그들의 마음은 사랑으로 그득하다. 모든 금성인은 모든 금성인을 사랑한다. 그들은 타인을 증오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는다. 험담도 하지 않는다. 살인도 싸움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애정과 배려다.
"설사 오늘 누가 죽는다 해도 우리들은 슬퍼하지 않아."
금성에서 태어난 차분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대신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하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미리 앞당겨 사랑을 하는 셈이로군?"
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든 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나?"
라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성은 슬픔으로 묻혀버릴 테니까."
라고 그는 말했다-34쪽

때로, 어제 일이 작년 일처럼 여겨지고, 작년 일이 어제 일같은 생각이 들었다. 심할 때에는 내년의 일이 어제 일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47쪽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왔다가 물러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을 열고 찾아온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문을 열고, 어이 잠깐만 기다려줘, 한 가지 얘기 안한게 있다구, 라고 외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안에는 벌써 한 계절이 의자에 자리잡고 앉아,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만약 잊고 얘기 못한게 있다면, 이라고 그는 말한다, 내가 들어주지, 잘하면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됐어,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니까. 바람소리만 사방 가득하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한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54~55쪽

모두들 채 감당하지 못랄 문제를 껴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열심히 그것들을 주워모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77쪽

많든 적든 다들 자신의 시스템에 순종하며 살기 시작한 때였다. 그것이 나와 너무 다르면 화가 나고, 너무 비슷하면 슬퍼진다. 그뿐이다-79쪽

어디에 가야 나는 나 자신의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86쪽

똑같은 하루의 똑같은 반복이었다. 어딘가에 반환점이라도 만들어두지 않으면 착각할 만큼 똑같은 나날이다-106쪽

여자와 만나기 시작한 후부터 쥐의 생활은 한없는 일주일의 반복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루하루란 감각이 전혀 없다. 몇월? 아마 10월이겠지. 모르겠다.... 토요일에 여자를 만나고, 일요일에서 화요일까지 사흘간은 그 추억에 잠겼다.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반나절은 다가올 주말 계획에 할애하였다. 그리하여 수요일만이 갈 곳을 잃고, 공중에서 방황하였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수요일.. -112쪽

난 45년을 살면서 한 가지밖에 터득하지 못했어. 이런거지. 사람은 무슨 일에서든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이야. 아무리 진부하고 평범한 일이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그 어떤 면도칼에도 철학은 있다, 고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지 않을까.-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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