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절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온종일 입 한번 열지 않을 때도 많다. 역의 매표소 직원이나 버스 승무원에게 고작 몇 마디 할까. 그걸 빼면 숙소로 들어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다.
그런 외로움은 할머니와 얘기한들 할아버지와 얘기한들 달래지지 않는다.
이때 요긴한 방법이 멋진 남자에게 다가서서,
'저어…… 실례지만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묻는 것이다.
'저어……' 또는 '실례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면 반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몇 시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니, 누구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계가 있는 한 대답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디까지 가죠? ㅇㅇ온천? 서두르지 않으면 비가 올 거예요"라는 말도 해준다.
그렇다고 혼자 여행하는 여자의 그 말이 인연이 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로 발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아방튀르(모험)는 세상의 스캔들이나 주간지의 기사처럼 손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저어…… 지금 몇 시예요?'로부터 안개가 낀 듯 야릇해지다가 드디어 의기투합해서 한 여관에 묵는 일 따위는 있을 리 없다. -15쪽

나는 혼자 사는 서른한 살의 여자다.
특별히 혼자인 게 좋아서 혼자 지내는 건 아니다. 부득이하게 혼자인 것이다.
뭘 하든 혼자다. 혼잣말, 홀로 잠, 홀로 웃기, 홀로 울기, 홀로 먹기, 홀로 텔레비전(그런 말이 있다면), 홀로 끄덕이기, 홀로 신음하기(이상한 걸 상상하면 곤란하지만).
혼자 산다는 건 어렵다.
오해받기 쉽다. 고영오연하게 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또한 어딘지 조금 애처로운 데가 없으면 얄밉게 보인다.
그러나 또한 너무 애처로운 태를 내면 색기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균형이 어렵다. -63~4쪽

그리고 혼자인 게 좋아서 홀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여러 가지로 바쁘다. 물론 결혼 상대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남자가 다가와주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미묘한 부분이 있다.
남자가 건드려주길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의연하게 퇴짜 놓는 자세를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 기다렸습니다 하는 구석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건드리길 기다린다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남자는 다가오지 않는다. 남자라는 물고기를 낚아올리려면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한 법. 적당히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아무나 좋다고 하면 안 된다. 상대도 그렇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신은 여러모로 바쁜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호박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공상 속에서는 버젓이 행세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가 무거운 애들이 많다. 그러면서 해마다 주문이 까다로워진다. -64쪽

아무리 노력해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못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결혼을 하는 쪽이 안정되고 좋을 것이다. -75쪽

정말 내 주위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뿐. 이 사람이다 싶은 남자가 없다.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결혼했겠지. -81쪽

"외로워."
"외롭지, 외로워."
"역시 혼자는 재미없고."
"재미없지, 재미없어."-82쪽

미카코는 냉랭한 집 안으로 들어가 봄코트를 입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이 어지르지 않으면 영원히 깔끔하게 치워진 채로 있을 실내.
그건 대자연의 정적. 말하자면 북극과 같은 정적과 비정을 생각나게 했다. 미카코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엄마게에 의존하는 존재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든 요리, 엄마의 배려, 엄마의 수다, 엄마의 냄새로부터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한 의지가지없는 아이 같은 존재.
자신의 인생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자신의 발로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했건만…… 엄마의 보호 속에 따뜻하게 몸을 웅크리고 입으로만 잘난 듯이 떠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110쪽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추상능력, 분석능력, 표현능력이 있는 남자를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여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134~5쪽

나는 다카하타 씨가 건축금속물 부서에서 가정금속물 부서로 옮겨 왔을 때부터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자란 얘기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좋다.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남자라도 말 붙이기 힘든 사람은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는 부류다. -139쪽

'여보, 즐거웠어요. 재밌었어요. 덕분에 잘살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나얏코의 눈에 처음으로 진심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부부로서의 인생이 끝날 때,
'즐거운 삶이었어. 재밌었어. 고마워'라고 상대에게 말할 정도의 행복이 또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인생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172쪽

"함께 살지 않을래?"
쓰루가 씨는 성실한 사람이라 그 말을 할 때도 성실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수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재미있는 친구로 지내왔는데 아까워요. 결혼 같은 거 해버리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럴까?"
쓰루가 씨가 말했다.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다케우치 씨하고는 오래 만나와서 서로 마음도 잘 알고."
오래 만나왔다는 점이 수상쩍은 것이다.
너무 오래 만나와서,
'그래, 가는 거야!' 하는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로맨티스트라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 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구식 여자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의 가슴에 뛰어드는 격정 같은 것을 기대한다.
나는 쓰루가 씨와 마음이 잘 맞고 좋긴 하지만 그의 가슴에 안겨 여자로서의 기쁨에 몸을 떠는 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난처하다. -197~8쪽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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