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사진이나 교과서에서 현실의 금각을 이따금 접하기는 하였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버지가 들려 준 금각의 환상이 훨씬 멋진 것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결코 현실의 금각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 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7~8쪽

금각은 넓은 연못-경호지-에 면한 3층 누각의 건축으로서, 1398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 2층은 침전 모양으로 만들어 덧문을 달았고, 3층은 4면 3자의 순수한 선당, 불당식으로 만들어, 중앙에 잔당호(틀을 짠 다음 얇은 판자를 붙인 문), 좌우에 화두창(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창)을 달았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금동의 봉황이 올려져 있다. 또한 연못에는 ㅅ자형 지붕을 올린 수청이라는 낚시터를 돌출시켜, 전체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산뜻하게, 가느다란 나무로 경쾌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등, 주택식 건축에 불당 양식을 가미하여 조화를 이룬 정원 건축의 수작으로서, 귀족 문화를 도입한 요시미쓰의 취미와 당시의 분위기를 잘 전하여 주고 있다.
요시미쓰의 사후, 기타야마 저택은 유언에 따라 선찰로 바뀌어, 녹원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곳의 건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황폐되거나 했지만, 금각만은 다행히도 남아 있다. -24쪽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꿈꾸는 금각은, 그 주위에 몰려드는 어둠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름답고 갸날픈 기둥의 구조가, 안으로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 건축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더라도 아름다운 금각은 잠자코 섬세한 구조를 드러내 보이며 주위의 어둠을 참고 견디어야 했다.
나는 또한 그 지붕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온 금동 봉황을 생각했다. 이 신비스러운 금빛 새는 새벽을 알리지도 않고 날갯짓도 하지 않고, 자신이 새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날지 못할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다른 새들이 공간을 난다면, 이 금으로 만든 봉황은 번쩍이는 날개를 펴고 영원히 시간 속을 나는 것이다.-24~5쪽

금각은 내 손 안에 잡히는 작고 정교한 세공물처럼 생각되는 때도 있었고, 혹은, 하늘 높이 끝없이 솟은 거대한 괴물과도 흡사한 건물이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미라는 것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적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소년인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여름철의 꽃들이 아침 이슬에 젖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구름이 산 저편을 가로막고 천둥을 머금은 채 암담한 테두리만을 금빛으로 번쩍일 때에도, 그 웅대한 광경을 보며 금각을 연상했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마음속으로, '금각처럼 아름답다'고 형용하기에 이르렀다. -26쪽

그리하여 그토록 꿈에 그리던 금각은 너무도 싱겁게 내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었다.
나는 연못의 이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의,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에 그 정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 건너에 절반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의 정교한 투영이 비치어, 그 투영이 오히려 완전한 모습으로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과장시킨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 -28~9쪽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금각이 이따금 보여 주는 미 가운데서도, 이날만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내 심상으로부터, 아니, 현실 세계로부터도 초탈하여, 변하기 쉬운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금각이 이토록 견고한 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68~9쪽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204~5쪽

생각하는 도중에, 해학적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금각을 불태운다면'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에 연못가에 계속하여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205쪽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210쪽

그 무렵 불과 불은 서로 친밀하였다. 불은 이처럼 세분되어, 멸시당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불은 다른 불과 손을 잡고, 무수한 불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인간도 아마 그러하리라. 불은 어디에 있거나 다른 불을 부를 수 있었고, 그 소리는 곧바로 전하여졌다. 절의 화재가 실화나 비화 혹은 전쟁에 의한 것일 뿐, 방화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설령 나와 같은 사내가 옛날의 어느 시절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기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절은 언젠가 반드시 불탔다. 불은 풍부하고, 방자하였다. 기다리기만 하면, 기회를 노리던 불이 반드시 봉기하여, 불과 불은 손을 마주 잡고,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 금각은 실로 보기 드문 우연으로 불을 모면하였을 뿐이다. 불은 자연히 일어났고, 멸망과 부정은 정상이며, 세워진 건물은 반드시 불에 타, 불교적인 원리와 원칙은 엄밀하게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설령 방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의 힘에 호소한 것이었기에,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것을 방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216쪽

"지금 생각하면, 이 불행한 연애도 나의 불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날 때부터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내 마음은, 환하게 밝은 세계를 전혀 몰랐던 듯이 여겨진다."-224쪽

"남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유별난 짓을 저지르면, 또 남들은 그렇게 봐 주지. 세상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가야만 돼.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봐 주십시오"라고 결국 나는 말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봐 주십시오."
스님은 술을 입에 부어 넣고는, 나를 잠자코 보았다. 비에 젖은 녹원사의 크고 검은 기와지붕처럼 침묵의 무게가 내 위에 있었다. 나는 전율하였다. 갑자기 스님이, 더없이 맑고 쾌활한 웃음소리를 발하였다.
"꿰뚫어볼 필요는 없어. 전부 네 얼굴에 나타나 있거든."-2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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