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품절


무네스에 고이치로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미워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누구나 파헤쳐보면 '추악'이란 원소로 환원된다. 아무리 고매한 도덕가, 성숙하고 덕망 있는 성인의 가면을 쓰고 우정이나 자기희생을 역설하는 자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 보신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 -37쪽

뉴욕에는 가지각색의 '세계제일'이 가득하다. 고층 빌딩, 월스트리트, 저널리즘, 교육 시설, 복합 기업, 문학, 미술, 음악, 연극, 패션, 요리, 다양한 오락……. 세계 제일의 상품이 몰려들어 더더욱 그 한도를 높여가는 것과 비례해, 악도 지하 깊숙이 그 흉측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살인, 방화, 절도, 강간, 매춘, 마약을 대표로 셀 수도 없는 갖가지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 이제 뉴욕의 상층과 하층은 너무나도 격차가 벌어져서 그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한 뉴욕에서 자신을 잃고 초조해하며 자신의 바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몸부림치고 있다. 뉴욕의 아름다움의 밑바탕은 모두 추악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36~7쪽

한 마리 늑대처럼 외따로 움직이는 형사는 가공의 세계에나 등장한다. 수사가 완전히 조직화된 현재 경찰 조직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대의 형사들은 조직과 형사소송법이라는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흉악범을 쫓고 있다. -257쪽

"요즘 경쟁이 심한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아는 거야. 막 인생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유치원생이나 국민학생들한테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겟니. 애초에 요즘 엄마들은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너무 조급하게 굴어. 아이의 재능은 언제 어디서 싹을 틔울지 모르는 일이야. 어릴 적부터 억지로 등을 떠밀어도 부모 마음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 대부분 부모의 허영과 이기심으로 아이를 경쟁시키는 거 아니겠니. 내가 보기에 유치원, 국민학교 때부터 등수로 아이들을 줄 세우며 우쭐해하는 부모는 키우는 동물이 재롱떠는 걸 가지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302쪽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듯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이 모자이크처럼 한데 모인 복합 국가이다. 국민 모두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이다.
이런 국가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기 쉽다. 사람들은 인간보다 물질은 믿게 된다. 세상에서 자동판매기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음식물, 잡지, 승차권부터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을 자동판매기에서 살 수 있다.
외롭고 쓸쓸할 때, 곤란할 때, 실연당했을 때도 동전을 넣으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테이프 레코더로 인생의 고민에 다정하게 대답해준다.
거룩한 신의 가르침부터 독신자를 위한 전화 섹스 상대까지 동전 한 닢만 넣으면 주크박스의 선곡 버튼을 누르듯 원터치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322~3쪽

사람들은 그 간편함과 편리함, 확실성(어디서든 같은 물건을 살 수 있다)에 빠져 별 생각 없이 자동판매기를 이용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물신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스템이다.
절약으로 인건비를 아끼려 하지만, 그 전에 오직 돈이 인간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자동판매기만큼은 아니지만 역, 구장, 극장, 은행, 호텔, 모텔, 레스토랑, 주차장 등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곳에서 인간은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돈을 주고받는다. 처음부터 손만 보이도록 만들어놓은 곳도 있다. 돈은 그야말로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인간은 무기물로 변한다. 오로지 돈만이 존재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323~4쪽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네도 생각이 바뀔 게야."
"아내를 얻어 자식이 생겨도 인간이 모두 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평생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헤어져야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으면 대부분의 인생을 함께 걷게 되지 않나."
"단순히 함께 걷는 것뿐이지 고독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편대를 짜서 함께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비행기?"
"네. 어떤 비행기가 고장 나거나 조종사가 부상을 입어 비행이 불가능해도 동료가 대신 조종해줄 수는 없죠. 옆으로 다가가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고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죠. 아무리 격려하고 응원해도 고장 난 기체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조종사가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비행기를 날게 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거 참 삭막한 사람이구먼."
"인생은 홀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설령 기체가 고장 나도 남의 비행기에 옮겨 탈 수는 없고, 대신 조종해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350~1쪽

남녀 사이에 우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둘 중 한쪽이 상대에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경우,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이성인데도 상대는 친구라는 이름의 중성의 존재로 대한다. -456쪽

남녀 사이란 처음 계기를 놓치면 좀처럼 진전이 없는 법이다. 어제까지 '좋은 친구'로 지내다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하기란 쉽지 않다. 성별 구분이 없는 담백한 친구 사이에서 남녀 관계로 발전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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