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소설을 갓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국내에 소개된 일본현대작가가 별로 없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나름 많이 읽었지만, 어느새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외에 다른 좋은 작품들도 많이 소개된데다 무슨 공장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작품을 쏟아내는 속도에 기함해 어느샌가 손을 놓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무슨 작품이었는지 가물할 지경이라(아마 가가 형사 때문에 읽은 <신참자>가 아니었나 싶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알라딘 머그컵이나 받아야지 하는 불순한 동기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구입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고, 그저 히가시노 게이고니까 잘 읽히긴 하겠지, 하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강도짓을 한 세 청년이 경찰의 눈을 피해 밤을 지샐 곳을 찾던 중 우연찮게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간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은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간다. 조용히 숨어 있다가 새벽이 되면 첫차를 타고 도주할 예정이었던 그들에게 느닷없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얼결에 편지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어떤 이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장난인가 하고 무시하려다가 어느샌가 답장을 쓰게 된 이들. 하지만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다시 편지가 날아든다. 시간이 이상하게 뒤틀린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세 청년은 어느새 진지하게 누군가의 고민을 상담하기 시작한다. 첫 이야기인 <답장은 우유 상자에>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이 점을 내려놓고 본다면 다섯 편의 연작은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평범한 이들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 보면 세상엔 이렇게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소하게는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신을 아는 누군가에게는 선뜻 말하지 못할 고민이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을 때 그냥 누구라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독백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할 때, 누군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경청해준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다. 결혼을 예정한 애인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이 얼마 남지 않아 고민인 이도, 가업인 생선가게를 물려받는 것과 꿈인 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도, 부모와 함께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이도, 어떻게든 성공을 하고 싶어 사무보조일을 그만두고 호스티스의 길을 걸을까 고민하는 이도 모두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상담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일 때도 있고, 누가 내 등을 떠밀어줬으면 하는 마음일 때도 있었지만 고민을 글로 옮기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마주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당연히 그렇다 쳐도 이를 들어주는 이들의 입장도 사뭇 진지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장난에서부터 시작한 고민 상담이었지만, 나미야 잡화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면서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구멍이 휑하니 뚫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대면해 보듬어준다. 나미야 잡화점 할아버지뿐이 아니다. 엉겁결에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온 좀도둑 패거리도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별로 대단한 충고는 못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하면서 누군가에 고민에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륜이 있는 할아버지가 하는 조언이든, 가방끈 짧고 누군가의 고민이라고는 진지하게 들어본 적 없는 좀도둑들의 조언이든 이들의 조언은 그 조언을 받는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전해준다.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분명 갸웃할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탐정도, 시체도, 살인범도 존재하지 않는다. 끽해야(라기는 그렇지만) 좀도둑 정도가 등장할 뿐이다. 주요 사건도 범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과 삶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담겨 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몰입력은 분명 히가시노 게이고인데 그 소재가 예전 작품과 사뭇 달라 '이거 의외네' 하면서 쉴 새 없이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나미야 잡화점'이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무슨 고민을 써서 보낼까, 무슨 답장을 받게 될까 괜한 몽상에 빠져들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스토리로는 이미 산전수전 다 써본 작가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런 작품도 쓸 줄 안다니 솔직히 좀 의외였다. 미스터리 요소가 거의 배제됐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던져놓은 조각을 다른 이야기에서 맞추는 식으로 큰 그림을 완성해가는 정도의 떡밥은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기대했던 미스터리는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밤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읽다보면 어느샌가 이불의 온기만큼이나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다. 역자의 말처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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