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아키였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처럼 유치한 일기를 교환하고 있는 아키, 나를 소꿉친구처럼 '사쿠짱'이라고 부르는 아키. 너무 가까워서 미처 내게 어떤 존재인줄 몰랐던 그녀가 지금 한 사람의 여자로 저기 서 있다. 마치 책상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두었던 돌멩이 하나가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하니 돌연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31쪽
돌연, 무서운 확신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금 이 순간보다 더한 행복은 바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응ㄴ 이 행복을 언제까지나 소중하게 지켜 가는 것뿐이다. 내 손에 넣은 행복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만약 한 사람 한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 순간에 평생 분의 행복을 탕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녀는 달의 사자에게 끌려가버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긴 시간만 남겨진다....-33쪽
무엇을 보아도 내게는 사막으로 보인다. 초록으로 물든 산도, 빛나는 바다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까지도. 이런 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아키가 죽고 세계는 온통 사막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도망간다. 세계의 끝으로. 끝까지 뒤쫓아가는 내 발자국을 바람과 모래가 지워버린다.-70쪽
자신만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으면 돼. 자신만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으면 돼. 하지만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자신보다도 상대방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먹을 것이 조금 밖에 없으면 나는 내 몫을 아키에게 주고 싶어. 가진 돈이 적다면 나보다 아키가 원하는 것을 사고 싶어. 아키가 맛있다고 생각하면 내 배가 부르고, 아키한테 기쁜 일은 나의 기쁜 일이야. 그게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 이상 소중한 것이 달리 뭐가 있다고 생각해? 나는 떠오르지 않아. 자신의 안에서 사람을 좋아하는 능력을 발견한 인간은 노벨상을 받은 어떤 발견보다도 소중한 발견을 했다고 생각해. 그걸 깨닫지 않으면,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는 편이 나아. 혹성에든 뭐든 충돌해서 빨리 사라져버리는 편이 낫다고.-82쪽
생명이 한정되어 있다는 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평소에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136쪽
"아키의 생일은 12월 17일이잖아." "사쿠짱 생일은 12월 24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1초도 없었어." "그렇게 되나?" "내가 태어난 이후의 세계는 전부 아키가 있는 세계였던 거야." 그녀는 난처한 듯 눈썹을 모았다. "나한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고, 그런 것이 존재할 지 어떨지조차 모르겠어"-174쪽
매일을 사는 것이 하루하루 정신적인 자살과 부활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밤에 잠들 때에는 이대로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적어도 아키가 없는 세계에 두 번 다시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지만 아침이 오면 그녀가 없는 공허하고 차가운 세계에 다시 깨어나 있다. 그리고 절망한 그리스도처럼 부활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하루가 시작되면 밥을 먹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한다. 비가 내리면 우산도 쓰고 젖은 옷을 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엉터리로 마구 두드린 피아노 건반이 엉터리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을 뿐.-192쪽
어떤 하루를 택해도 그 앞의 하루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연속적인 시간은 내 안에 흐르지 않았다. 무언가가 계속되어 간다는 감각, 무언가가 자라서 변화해 간다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살아가는 것은 한 순간의 존재로만 있는 것이었다. 미래는 없고 어떤 전망도 열리지 않았다. 과거에는 건드리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추억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피를 흘리며 그런 추억만 가지고 놀았다. 흘린 피는 점점 굳어져 딱딱한 딱지가 되겠지. 그러면 아키와의 추억을 건드려도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일까?-195쪽
"좋아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어째서 괴로운 것일까? " 대답 없이 잠자코 있자 할아버지는 계속했다. "그건 이미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이별이나 부재 그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그 사람에게 준 마음이 이미 있으니까 이별을 괴로워하며 그 모습을 애타게 찾는거지. 애석한 마음은 끝니 없어. 그렇다면 비애나 안타까움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커다란 감정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까?" "모르겠어"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무나.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이 없어지면 아무렇지도 않을 게다. 그런 것은 없어지는 것 축에도 들어가지 않아.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정말 없어지는 거고. 요컨대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도 역시 사람에게 보내는 마음의 일부분일 수 있다는거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이고, 부재는 남겨진 자에게 슬픔을 가져온다. 그러니까 슬픔은 모두 마찬가지란다. 이별은 괴롭지만 언젠가 다시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할아버지는 그 분과 다시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맺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 단지 형체의 문제를 말하는 거냐? 보이는 것, 형체가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정말 따분한 것이 될 거 같다."-199쪽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내 입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에 적합한 형태가 되어있다. 하지만 얼굴을 떠올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언젠가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오래된 앨범 속에서 사진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작은 비애를 느꼈다. 이목구비를 잃은 해변의 지장보살처럼 아키의 추억도 역시 풍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긴 시간을 지나면 마지막엔 이름만이 남는 것일까?-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