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절판


이런 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끗쯤 되는 별볼일 없는 것이었으리라. 세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주거나 아니면 두끗이나 한끗짜리만 있는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뿐이다. 그래봐야 그가 긁을 수 있는 판돈이란 푼돈에 불과하다.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세끗이라도 좋다. 승부가 결판나는 순간까지 나는 즐길 것이다.-29쪽

어차피 그녀는 그의 삶에 틈입한 곰팡이 같은 존재였다. 건조하게 살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건물의 음습한 곳에서만 서식하는 그런 곰팡이처럼 그녀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 구석구석을 균열시켜 놓았다.-54쪽

봄에 내 의뢰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지루한 겨울에 대한 반동이라기보다는 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봄을 두려워한다.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다.-57쪽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은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61쪽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도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떤 부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불쾌하다. 그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C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98쪽

두려움은 흔히 혐오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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