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길 - 상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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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첫 만남은 <모래그릇>이었다. 그 당시(2007년)만 해도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가운데 <너를 노린다> <점과 선> <모래그릇> 정도만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세 작품 중 뭘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셋 중 가장 평점이 낮았던 <모래그릇>을 골랐던 기억이 난다. 큰 기대 없었기 때문일까.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내친 김에 드라마 <모래그릇>을 찾아봤고 점점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수많은 작품을 영상화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의 작품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부지런한 일본어 능력자분(이분들에게 축복이 가득하길!) 덕분에 <검은 가죽 수첩> <의혹> <나쁜 녀석들> <역로> 같은 작품을 원작보다 먼저 접했다. 이렇게 마쓰모토 세이초의 몇몇 작품을 드라마로 만나긴 했지만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라도 원작의 변형이고 대리만족일 뿐 그의 소설을 '텍스트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져갔다. 약 100편의 장편, 350편의 중단편, 여기에 에세이까지 더하면 1천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던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미스터리가 붐처럼 인기를 끌었지만 주구장창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나 소개될 뿐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만나는 길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역사비평사와 북스피어가 손을 잡고 '세이초 월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규모가 작은 두 출판사가 힘을 모아 함께 만든다는 것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아니던가. 기대는 점점 커졌고, 드디어 세이초 월드가 시작됐다.

  

  "짐승길: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라는 정의로 시작하는 <짐승의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 한 여자의 이야기다. 뇌연화증으로 누워 있는 간지. 그런 간지를 부양하기 위해 고급 온천 여관에서 일하는 다미코. 집에 돌아올 때마다 간지는 다미코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는 않을까 질투하고, 짐승처럼 그녀의 몸을 탐한다. 이런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는 다미코. 무능하고 병든 남편.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의 무게가 다미코를 점점 억누른다. 그러던 중, 여관에 손님으로 온 고급 호텔의 지배인 고다키가 다미코에게 잠시 '도구'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세상에는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며 "당신도 그래 볼 마음이 없"냐고 묘한 제안을 한다. 설사 도구가 된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의 행복을, 여자로서의 행복을 되찾고 싶었던 다미코는 집에 불을 내 남편을 죽이고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기토 고타의 애인 겸 하녀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 "자네도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어.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했을 때의 마음가짐이네. 그만한 기회에 올라탈 수 있는지 어떤지는, 본인의 평소 준비에 달려 있거든"이라는 말처럼 다미코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움켜쥔다. 하지만 그 댓가로 그녀는 인간의 길을 뒤로한다. 욕망의 길, 다시 말해 짐승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다미코. 과연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짐승의 길>에서 다미코의 길을 대로(大路)라고 볼 때 그녀와 이어지는 몇 개의 간로(間路)가 있다. 모두가 간지의 죽음을 사고사라고 볼 때 다미코에게 의심을 품은 형사 히사쓰네. 그는 다미코를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기 위해 쫓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한번 품고자 하는 일념으로 그녀를 추격한다. 히사쓰네 외에도 뒤에서 정재계를 막론하고 세상이라는 무대를 조종하는 기토 고타, 그런 그를 은밀히 돕는 고다키 등의 인물의 행적이 뒤섞여 크고 작은 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길은 도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부이건, 사회적 성공이건 행복이건 간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비뚤어져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짐작하지 못한다. 그저 "행선지를 알 수 없는 탈것"에 올라탄 이들처럼 운명에 몸을 맡긴 채 파국을 향해 질주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짐승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들이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시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고,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이 시대의 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승의 길>은 더 서글프다. 뒷표지의 기리노 나쓰오의 말처럼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등바등 살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을 일삼아 누구 한 사람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니. <짐승의 길>을 읽으며 오히려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얼마나 같잖은 것인가 싶어져 씁쓸했다.

 

  드라마화된 <짐승의 길>의 주연도 요네쿠라 료코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다미코와 요네쿠라 료코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하긴 2000년대에 드라마화된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의 주연은 거의 요네쿠라 료코의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본 마쓰모토 세이초 드라마에는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심 다미코도 그런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녀가 측은해졌다. 그 누구도 그녀를(혹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없지만, 그저 그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는 것으로, 그녀에게 잠시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불편했고, 요즘 TV에서 하는 막장드라마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단순한 치정극이라고 치부하기엔 사회비판적인 내용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곁들여져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분량은 제법 되지만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 오랜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아준 책. 앞으로, 길게. 그리고 즐겁게. 세이초 월드를 계속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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