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블랙
수전 힐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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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5대 공포소설이자 영국에서 롱런한 연극 <우먼 인 블랙>의 원작소설 『우먼 인 블랙』. 작년에 한국에서도 무대에 오른 바 있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못 봐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해리포터>의 주인공 다니엘 래드클리프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원작소설이 함께 출간되었다. 운 좋게 시사회 당첨이 되서 영화로 먼저 접한 이야기는 음습한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마냥 어리게만 느꼈던 해리포터 군이 애 아빠로 나온다는 설정이 익숙지 않았고, 소리로 놀래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괜찮긴 한데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지만, 영화와 비교하며 읽은 『우먼 인 블랙』은 얇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촘촘하게 이야기가 짜여 있어 오싹함으로 조금씩 마음이 죄어들었다. 

  젊고 패기 있는 변호사 아서 킵스. 상사의 명령으로 고객이었던 드래블로 부인의 장례식 참석과 유산 정리를 위해 크라이신이라는 작은 마을을 찾는다. 장례식 참석을 위해 왔다는 얘기를 듣자 호텔 주인은 경계심인지 의혹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인다. 그저 외딴 곳에 살았던 여자였으니 마을에서 마녀 취급을 받았던 것이리라 하고 가볍게 넘어간 아서.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 그곳에서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수척한 한 여성을 본다. 그리고 조수 시간에 맞춰 노부인이 살았던 일 마시 하우스에 문서 정리를 하러 들어갔다가 그 여성을 다시 만난다. 그녀를 다시 만난 아서는 "그 여자는 육체가 있는 산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전통적인 '유령'에 다한 흔한 상상과는 달리 투명하거나 흐릿해 보이지는 않았다. 진짜 사람처럼 그곳에 있었고, 또렷이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만질 수도 있을 듯했다"라고 회상하면서 그녀가 유령이라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의문도 갖지 않는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자꾸 아서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검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왜 마을 사람들은 공포스러워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렇게 뭍과 물의 경계에서 아서는 삶과 죽음, 그리고 공포와 호기심의 경계를 몸소 체험한다.

 

  누구나 유령 이야기를 하나쯤은 알고 있다. 유령이 나온 수많은 문학작품을 논외로 하더라도 '전설의 고향'류의 귀신 이야기는 얼마나 많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분위기 잡으며 나누는 도시괴담류의 이야기도 꽤 많다. 하지만 『우먼 인 블랙』의 아서를 평생 괴롭힌 유령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도, "피가 고이거나 스멀스멀 기어들거나 그런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어쩌면 오싹할긴 하지만 식상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우먼 인 블랙』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아서는 "그래, 나도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것도 진짜 이야기가. 유령과 악귀, 두려움과 혼란, 공포와 비극의 실화가.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벽난롯가에 둘러앉아 재미 삼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말로 자신이 간직한 이야기에 대해 운을 뗀다.

 

  그의 말처럼 분명 『우먼 인 블랙』 속의 이야기는 '재미 삼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히 원한(혹은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 존재가 구천을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악의'를 품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뒤 분노와 복수심, 상실과 절망, 그리고 광기와 비통함의 화신이 된 한 여인.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마을에는 사고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잃는다. 자신에게 닥친 절망에 대처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지만, 『우먼 인 블랙』 속의 여인은 절망을 복수로 뒤바꾼다. 가끔 자신의 에너지를 적의로 표출하는 사람을 접할 때가 있다. 별일 아닌 것 같은 것에 분노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격하게 반응하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태도가 옳고 그르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먼 인 블랙』을 읽으며 과연 그녀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동정의 여지가 있다 해도 누구도 그녀에게 다른 사람의 삶 또한 파괴할 권한을 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멋대로 다른 사람의 삶에 침범해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태도에 분개할 필요는 없다. 그저 '검은 옷을 입은' 이 여인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초래하는 일련의 사태와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우먼 인 블랙』의 몇 가지 설정이 바뀌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아서의 지위의 문제다. 영화에서 아서는 네 살 난 아들을 혼자 키우는 아버지로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약혼녀는 있지만 결혼은 아직 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바로 이 설정 때문에 전체적인 골격은 똑같지만 세부적인 내용이나 결말이 다르게 전개된다. 소설이 으스스하면서도 말단을 조금씩 자극하면서 전개된다면, 영화는 소리와 분위기로 공포감을 전달한다. 영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개연성이나 아서에 대한 이해도는 역시 원작이 영화보다 더 농밀했다. 그저 무언가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의 등장 때문에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서 도출되는 공포를 다룬 이야기니만큼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데 영화에는 이 부분이 너무 가볍고 광기로 처리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영화가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 같은 것으로 말단을 자극했다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일 머시 하우스라는 낡은 저택을 상상하게 하고, 그 안에 들어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했다.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의 방법론적인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침대 안에서 혼자 상상하면서 오싹오싹하는 것이 더 좋았다. 얇아서 가볍게 읽었는데, 영화에서 만나지 못한 심리묘사와 치밀함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래서 세계 5대 고딕소설이라는 평을 듣는구나 싶었던 책. 짧지만 강렬한 공포를 원한다면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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