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시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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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그 사무실에 앉아서 죽은 파리와 놀고 있는데, 이 캔자스 맨해튼에서 온 촌스러운 아가씨가 휙 들어와서는 고작 닳아빠진 이십 달러에 자기 오빠를 찾아달라며 나를 들볶았지. 오빠란 사람은 얘기로 들어서는 얼간이 같았지만, 동생은 찾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 대단한 돈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는 베이시티로 내려간 거야. -5쪽

"당신의 무례함은 쉽게 잊게 될 것 같지 않군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세상에 누구도 이제껏 내게 당신처럼 말한 적은 없었어요."
나는 일어서서 책상 끝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러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69쪽

그런 날들도 있는 법이다. 만나는 사람이 다 멍청이인 날. 그런 날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하게 된다.-81쪽

나는 그가 생각에 빠져들게 내버려두었다. 그 자신처럼 작고, 추하며 공포에 가득찬 생각일 테니.-114쪽

내가 아는 거라고는 뭔가 보이는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늙어서 녹슬긴 했어도 항상 믿을 만한 육감에 따르면, 패가 돌아가는 대로 게임했다가는 엄한 사람이 엄청 판돈을 잃게 될 거라는 것이지. 그게 내가 상관할 일인가? 아니, 내가 상관할 일이라는 게 뭐지? 내가 알기는 아는 걸까? 알았던 적이라도 있었나? 그것까지는 따지지 말자고. 오늘밤 인간적이지 않으니까, 말로. 아마 한 번도 인간적인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지 몰라. 어쩌면 난 사립탐정 면허증을 가진 허깨비인지도 몰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지. 항상 잘못된 일들만 일어나고 결국 바로잡을 수도 없는 이 춥고 반쯤 불이 켜진 세상에서는. -138~9쪽

나는 전화가 울리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미 하루치 전화를 받을 만큼 받았다. 신경 쓰지 말자. 셀로판 잠옷을 입은, 아니면 벗은, 시바의 여왕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고 해도 너무 지쳐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머리가 젖은 모래를 담은 양동이처럼 느껴졌다.-156쪽

"나는 당신처럼 손톱을 길게 기르지 않는 여자애들한테만 강하다고. 마음속은 온갖 말랑말랑한 감상으로 가득 차 잇거든."-162쪽

"왜 사람들이 공갈범에게 돈을 주는지 항상 궁금했었지. 아무것도 살 수 없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돈을 주지. 어떤 때는 주고 또 주고 계속 주기도 하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오늘의 공포는."
그가 말했다.
"내일의 공포를 압도하지. 눈앞의 상황이 전체적 흐름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극적인 감정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실이야. 당신이라도 은막의 매력적인 스타가 커다란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를 걱정하겠지.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그녀는 영화 스타고 심각한 일은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알고 있다고 친대도 말이지. 긴장감과 협박이 논리를 이기지 못한다면, 드라마 같은 건 제작되지 않을 거야."-197쪽

"우리는 모두 글러먹은 사람들이죠.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미소지을 뿐, 그게 다예요. 쇼 비지니스죠. 이 업계에는 싸구려 같은 데가 있어요. 항상 그랬죠. 배우들이 뒷문으로 들어왔던 시절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지금도 그래요. 엄청 긴장하고, 엄청 절박하고, 엄청 미워하죠, 그 메스꺼운 짧은 장면에서도 드러나잖아요. 그 사람들은 다 별 뜻 없이 내뱉는 것뿐이에요."-225쪽

베이시티는 대양에서부터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끝난다. 나는 마지막 편의점 앞에 차를 멈추었다. 경찰에 다시 한번 익명 제보를 할 시간이었다. 어이 친구들, 이리 와서 시체 좀 가져가라고. 내가 누구냐고? 그냥 어쩌다 운 좋게 자네들을 위해서 시체를 계속 찾아주는 남자라고 해둬. 게다가 겸손하기도 하지. 심지어 내 이름도 밝히지 않잖나.-266쪽

"사랑이란 너무나 멍청한 말이에요."
그녀가 깊이 생각하고 말했다.
"영어에 사랑의 시가 그렇게 많은데도 그 감정에 대해서 그런 약한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니 놀랄 일이죠. 그 말에는 삶도 없고, 울림도 없어요. 그 말을 들으면 팔랑거리는 여름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생각나요. 홍조 어린 미소를 살짝 띠고 수줍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옷을 받쳐입은 애들."-276~7쪽

"당신 아주 웃기는 역할을 하고 있군요, 아미고. 정말로요. 당신 같은 인물들이 계속 나오는지도 몰랐어요."
"전쟁 전에 찍어놓은 재고지." -278쪽

나는 먼지가 묻은 그대로 먼지털이를 치워버리고는 뒤로 기대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심지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난 투명인간이었다. 얼굴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개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도 당기지 않았다. 심지어 술조차 당기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바닥에 구겨져서 버려진, 철 지난 달력 종이였다.
그래서 나는 전화기를 내쪽으로 끌어당겨 메이비스 웰드의 번호를 돌렸다. 전화는 울리고 울리고 또 울렸다. 아홉 번. 이 정도면 많이 울렸어, 말로.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네가 전화하면 아무도 집에 없다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누구에게 전화할 거야? 어디 네 목소리 듣고 싶어하는 친구 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
전화야 제발 울려라. 내게 전화를 해서 다시 인류에 접속하도록 해줄 사람 없을까. 경찰이라도 좋아. 마글라샨이라도 좋아. 날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어. 단지 이 얼음별에서 떠나고 싶을 뿐이야.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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