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과 진실 규명
문국진 지음, 강창래 인터뷰어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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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대학 도서관에서 000번부터 900번대까지 한 서가에서 책 한 권 이상씩, 좀 다양한 책을 읽어보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택도 안 되는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서가에서 <명화로 보는 사건>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명화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법의학을 더 가깝게 소개하는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저자가 미술학자가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 대한 전문가의 소개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법의학자의 자부심이랄까 열정이 느껴져 꽤 인상적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문국진 선생을 우연히 다시 만났으니,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라는 다소 익살스런 제목의 인터뷰집이 바로 그것. 국과수 최초의 법의관 문국진에 인터뷰어 강창래의 전작인 <빗물과 당신>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두 사람이 이야기가 궁금해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쳐들었다. 

  <CSI>를 비롯한 미드 수사물과 최근 방영한 한드 <싸인> 등 일반 대중에게도 법의학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 가미되어 있다고는 해도 허구는 허구. '사건' 뒤에 숨겨진 '법의학자'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문국진의 말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50년 간 현장에서 뛴 그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고문과 자백으로 '만들어진' 범인이 비일비재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로서의 파란만장했던 삶, 그리고 은퇴 후 북 오톱시를 하며 법의학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가 마치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한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치른(혹을 치를 뻔한) 사람들. 수사관의 심증, 그리고 그것에 따른 강요(고문)에 의해 범인을 '만들어낸' 시대 속에서 문국진은 묵묵히 법의학을 알리고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고문이라는 야만적인 관행을 깨는 숨은 공로자가 된다. 은사에게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그런 거 하면 못 써"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택한 길이었고, 보수도 동료 의사와 비교할 때 턱없이 적었고, 부검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도끼에 맞아 죽을 뻔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서 보람과 사명을 느꼈기에 법의학자의 길을 걸었노라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정액을 통해 아내를 페니실린 쇼크로 죽였다는 이야기나 윤 노파 사건 등 그가 직접 겪은 사건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가 시반이나 시랍 등 법의학적 증거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마치 수업을 듣는 듯이 진지하게 읽었다. 단순히 교과서를 읽어내려가는 수업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이 어우러진 좋은 강의를 듣고 나온 듯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니 법의학, 특히 한국의 법의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 대한법의학회 모임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좀 할 작정이오. 법의학문화상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그래서 <싸인>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자고. 그렇게 격려해줘야 더 좋은 법의학 드라마를 만들 거 아니오. 그러면 자연히 일반인들도 법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될 거고, 그래야 제도도 만들어지는 거디요. 언제나 제도가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세상이, 세상 사람들 인식이 바뀌어야 제도가 만들어지는 거요. 내가 왜 <새튼이>나 <지상아>를 썼겠어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디요"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아직 법의학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인식이 바뀌고는 있다 해도 제도가 바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뛰고 있을 그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니 <지상아>와 <새튼이>가 궁금해졌다. 거의 30년이 다된 지금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지상아>야 비교적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겠지만 중고로도 구하기 힘든 <새튼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탐이 났다. 내년이면 50번째 저서를 출간한다는 문국진. 한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그의 길. 그 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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