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 하나에 귀가 쫑긋했다.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봤다면 누구나 어딘지 알 법한 식당에 얽힌 사연이었다. 사연을 보낸 이는 첫 월급을 타고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거하게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허름한 메밀국수집에 이끌고 가 맥이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실망한 그에게 어머니는 그 식당이 아버지와 첫 데이트할 때 온 곳이라고, 아들과 한번 함께 오고 싶었노라고, 허름할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들으며 문득 누구에게나 이렇게 사연이 담긴 식당이 한군데쯤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문학동네 까페에서 오후 5시면 언제나 고픈 배를 더 꼬륵거리게 만드는 성석제의 <칼과 황홀>이 생각났다.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음식과 거기에 얽힌 사연. 내가 라디오에서 들은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칼과 황홀>에는 오미(五味)처럼 담겨 있었다. 

  "에미가 다섯시에 일어나서 해놓은 밥을 안 먹고 가는 아들놈이 공부는 해서 뭐할 것이며 학교는 뭐하러 다니느냐. 때려치워라, 그 망할 놈의 학교"라는 작가의 어머니의 말에 빵 터졌다가 달걀을 먹으며 밥값을 아껴 남동생 운동화를 사보냈노라는 여공의 이야기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밥상, 술상, 찻상이라는 장의 구분을 넘어, 세대의 경계를 넘어 '공감'의 방식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일전에 <소풍>에서 작가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음식 철학'은 <칼과 황홀>에서도 유효하다. 단순히 '맛집'을 나열하는 책도, 자신의 요리비법을 전수해주는 책도 아니지만 우리가 특별하게, 혹은 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찾아먹은 끼니 속에서 작가는 독자와 교감을 시도한다. 

  음식은 단순히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먹었느냐도, 어떤 분위기 속에서 먹었느냐도 중요하다. 책 속에 소개된 음식 중에 유독 먹고 싶어진 음식이 있었다. 바로 '배추전'이다. 작가는 배추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배추전의 밀가루옷이 얇으면 얇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래야만 배추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배추전의 맛이라는 게 무엇일까. 배추전이 그렇게 맛있다면 왜 전국적, 세계적으로 배추전을 먹지 않을까. (중략) 수분이 많은 배추전은 지진다고 해서 바삭해지거나 맛이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배추전의 맛은 밀가루의 맛, 기름과 간장의 맛이다." 그의 말마따나 배추전은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갓 상경했을 때 주인집에 갖다줬다가 핀잔("이것도 먹는 음식이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어우러져 우리 집에서 배추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음식은 독자인 내게 배추전이 갖는 의미처럼 어떤 사연이 담겼느냐에 따라 재정의된다. 소시지, 해장국, 김밥, 동파육, 조기, 스파게티, 삶은 달걀 등등. 처음 접하는 음식이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이건, 심지어는 평소 질색을 하던 음식이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의 구수한 입담에 놀아나다보면 어느샌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칼과 황홀 사이에 음식과 인간, 삶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기에 우리 삶이 더 풍요롭게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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