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로 밴스의 정의 - 스카라베 살인 사건 / 겨울 살인 사건
S. S. 밴 다인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에 갓 맛을 들이기 시작했을 무렵,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벤슨 살인사건>이 집에서 굴러다녔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미스 마플에 익숙했던 내게 파일로 밴스는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입만 열면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벤슨 살인사건>을 읽고는 파일로 밴스라면 질색팔색하게 됐다. 하지만 파일로 밴스 없이는 고전 추리소설을 제대로 맛봤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파일로 밴스를 마냥 무시하고 살기는 영 찝찝했다. 게다가 쿄고쿠도 시리즈로 말 많고 아는 척 많이 하는 탐정에게 단련(?)됐기에 다시 한 번 파일로 밴스에 도전해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마음 한 켠에 다시 밴 다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던 중에 <위대한 탐정 소설>을 통해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미스터리를 많이 읽고 나만큼 주의 깊게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을 접하고, 대체 이런 말을 하는 작가는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썼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마음에 파일로 밴스를 다시 만났다. 

  동서, 해문 등 다른 출판사에서도 밴 다인의 작품이 출간된 바 있지만 북스피어판을 고른 것은 번역 때문도 있겠지만 역시 멋진 외양 때문이었다. 잘난 척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파일로 밴스의 자부심을 채워줄 것 같은 디자인, 게다가 시리즈로 나오다니 밴스뿐만 아니라 나의 소장욕도 자극하는 구성에 북스피어판을 선택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보는 것을 좋아해서 이왕이면 시대순으로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북스피어판의 출간 순서는 출간순이 아니었다. 하지만 밴 다인 중기 걸작인 <스카라베 살인사건>과 마지막 작품인 <겨울 살인사건> 두 작품만으로도 밴 다인의 작품 양상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추측하는 재미가 있어서 그 점은 좋았다.

  앞선 작품인 <스카라베 살인사건>(기존에 <딱정벌레 살인사건>으로 출간된 바 있다)은 이집트 학자의 죽음이라는 소재, 어떻게 보면 '저주'라고 볼 수 있는 소재도 흥미로웠고 등장 캐릭터도 개성 있어서 좋았다. 특히나 어릴 때 질색팔색 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할 정도로 파일로 밴스라는 캐릭터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애정이 솟았다. 처음에는 밴스가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질 때는 "하던 얘기나 계속 하라고!"라고 버럭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가니 그마저도 그러려니 하면서 그의 장광설을 즐기게 되었다. 모든 증거가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밴스는 쉬운 길을 걷지 않는다. 당장 범인을 지목하기보다는 사건을 찬찬히 되짚고 분석해 범인의 체포는 물론이고 범행의 이면에 감춰진 음모까지도 간파해낸다.

  뒤이은 <겨울 살인사건>은 밴 다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편으로까지 살이 붙지 않은 작품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밴 다인 식의 러브스토리라는 점에서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나 싶다.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이나 반전 같은 플롯상의 재미보다는 분위기가 돋보인 작품이랄까. 실제 스케이팅 선수를 모델로 해서 쓴 작품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독자라면 김연아를 모델인 것처럼 보는 것도 재미있는 독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만난 파일로 밴스. 여전히 마지막에 마지막이 될 때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아 때로는 피해를 더 키우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뽐내야 성질이 풀리는, 어떻게 보면 그냥 거들먹거리기 좋아하고 막말하는 밉상이지만 그럼에도 파일로 밴스는 어쩐지 매력적이다. 추리소설에 갓 빠졌을 때 파일로 밴스를 만났더라면 후대 작가들이 만들어낸 파일로 밴스의 아류(?)를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어지간한 캐릭터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지금이 내가 밴스를 만나기 최적의 타이밍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때로는 독설을 날리고, 때로는 하이개그를 하는 밴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나같이 밴스를 꺼려해온 독자에게도, 밴스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에게도 모두 만족적인 만남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북스피어에서는 총 6권으로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고, 현재 2권까지 출간되었다. 모쪼록 무사히 완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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