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절판


한밤중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 동생들은 내 방에 모여서 자신들이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먹어본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것,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웃겼던 일, 만난 사람 가운데 재미있던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허기의 위협에 함께 어깨를 겯고 맞섰다. 그중 몇몇 이야기는 소설이 되어 내 옆에 남았고 어떤 가벼운 이야기는 시가 되었다. 그저 이야기로 남은 것도 있으며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지 않고 갈무리된 채 내생來生을 기약하는 것도 있다.-11쪽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정신적 자양은 자신의 손에 의해 탄생한 예술작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기도 하는 게 제 손으로 만들어낸 못난 예술작품이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가 지울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80~1쪽

맛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내부적인 요인은 간장과 김치다. 간장에 들어 있는 아미노산이 감칠맛과 시원한 맛을 내고 김치의 유산균이 내는 산미, 천일염이 가진 짠맛 등이 복합적으로 우리의 뇌 속 미각을 자극한다. 이런 것들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가 먹는 음식을 통해 우리가 알아온 맛이다. 그러니까 뇌 가장 깊은 곳, 원시적인 부위에 내장된 원초적인 맛이다.
그 식당에는 바로 그런 맛이 남아 있었다. 세월과 타향의 수만 가지 맛을 넘어 단숨에 뇌리를 강습하는, 아득히 먼 곳에서 존재의 심부에까지 푹 찔러들어오는 벼락같은 맛이었다. -82~3쪽

그러고 보면 숙종은 우리 문학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춘향전』의 시대배경이 숙종 연간이고 장길산이 놀던 시절이 숙종 때이며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인 장희빈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것도 숙종이다. 폐비와 복위,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 인현왕후에 관한 수많은 소설이 숙종 때문에 생겼고 폐비에 반대하던 박태보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소설로 쓴 적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논쟁의 중심인 송시열, 허목이 숙종 때에 활약을 펼쳤다. 세조가 죽인 사육신을 복권시킨 것도 숙종이 한 일이다. 숙종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척 심심했을 것이다. -102쪽

거기에는 그 식당만의 고유한 개성이 없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자부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든 무난하게 먹을 수 있고 웬만한 사람이면 대충 조리할 수 있는 음식으로 표준화되어 있었다. 감동을 줄 리 없었다.-1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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