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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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고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 하고 발음하면 '그것……' 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너비.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11쪽

살면서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매는 해답은 때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어느 때는 문제 자체가 정답과는 별 상관 없는 맥락에서 출제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29~30쪽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라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 중 열일곱을 넘긴 이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내가 보기에 기적은 내 눈앞의 두 분,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였다.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였다. 한여름과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47쪽

책은 내게 밤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이자,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선생님, 그리고 비밀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파 자주 나가놀 수 없었던 나는 세계의 온갖 저자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겼다. 나는 플로베르가 공격수로 나서고 호메로스가 미드필드를, 셰익스피어가 골대를 맡은 가상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나는 플라톤이 포수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투수로 나선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했다. 경기장의 풍경은 대략 이랬다. 플라톤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면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면 곧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변화구가 고대로부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내 키보다 큰 방망이를 멍청하게 휘두르며 헛스윙을 했다. -51~2쪽

물론 철학서는 꽤 어렵고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데가 수두룩하지만, 나는 그걸 우아하고 긴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당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였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나중에야 도착하듯 말이다. 시인들과의 테니스, 극작가들과의 바둑, 과학자들과의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52쪽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그 입구에 서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이었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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