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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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강물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일 년의 태반을 버티고 있으니 강물의 주인은 실은 얼음이었다. 터벅터벅 그 강 위를 걸었다. 투두둑.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방금 디뎠던 얼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단 한발짝뿐. 그 한 발만 내디디면 세상은 숨겨 왔던 그 거대한 죽음의 아가리를 드러낼 것이다. 이옥의 말이 머릿속을 때렸다. 나는 큰 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이라네. 그 거미는 구중궁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거미의 것이었다. -56쪽

세상 모든 것 다 잃은 사람처럼 처량한 글을 써 내려가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참으로 짓궂은 글. 이옥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만의 마음이 담긴 글이었다. 웃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잠시라도 고통을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라질 고통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고통은 그의 글들에 커다란 살점을 툭툭 묻혀놓고 있었다. 그 고통의 정점은 거울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삶과 고통에 찌들어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반납해 버린 남자 이옥이 낡아 빠진 거울을 붙잡고 진지하게 질문을 해 대는 꼴이란. -110쪽

내게 글 쓰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글에 목숨 건다는 말보다 그냥 쓴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114쪽

생각하는 창문, 이는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오른쪽 창문에 붙인 현판이다. 내가 북쪽에 있을 때는 어느 하루도 남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남쪽으로 옮겨 오게 되자 또 어느 하루도 북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생각이란 이렇듯이 때를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그 괴로움은 전날보다 더욱 심하였다. 창문에다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 무릇 생각은 즐거워도 나고 슬퍼도 난다.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서 있어도 생각나고 앉아 있어도 생각나며, 걸어도 생각나고 누워도 생각난다. 어떤 때는 잠깐 생각나고, 어떤 때는 오래오래 생각난다. 어떤 때는 생각을 오래 할수록 더욱 잊지 못한다. 그러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여 느낌이 있으니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소리에 따라 운을 붙이니 곧 시가 되었다. -1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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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5-24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계시는군요.^^
관심가는 책이에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이매지 2011-05-25 16:23   좋아요 0 | URL
다 읽었는데, 청소년들도 일반대중도 옛글의 재미에 빠질 수 있는 책이더라구요^^
제가 워낙 이옥에게 관심이 있어서 읽은 책이지만요^^